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58)
1과장과 식사도 했고, 전승공의 깜짝 연락도 끝났으니 이제 근신 장소인 아카데미로 복귀할 때가 됐다.
이거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근신 장소를 근무지로 정하는 미친놈이 대체 어디 있냐고. 말은 안 했지만 근신 기간 동안 집에만 처박혀 지낼 생각에 조금은 두근거렸는데.
‘그 새끼 전생에 백수로 살다가 죽었나.’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 없다. 자기가 아닌 남이 쉬는 것도 혐오하는 걸 보면 3대 정도는 백수로 살다가 죽은 게 분명하다. 저건 그 정도 업보는 쌓아야 완성되는 성격이야.
문제는 황태자한테 ‘요즘 공무원들은 한 성질 하거든요!’ 라고 외칠 명분이 부족하다는 거다. 애석하게도 제국 공무원은 직책이 높을수록 더욱 화려하게 갈리는 편이고, 그 처절한 공밀레에는 놀랍게도 황실마저 포함된다.
지금은 노쇠해서 황태자에게 실무를 넘기고 있는 황제도 옛날부터 워커 홀릭으로 유명했지. 황태자는 책봉 이후로 신나게 갈려나가는 중이고.
‘뭐라고 말을 못하겠네.’
황태자에게 반항했다가 ‘나도 일하는데 불평을 해? 너 역적이야?’ 라는 가불기에 걸리면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퇴직으로 도망치는 게 답인데 퇴직은 받아주지를 않는다.
솔직히 내가 늙어 죽기 직전까지 가야 퇴직 가능성이 생길 것 같기는 해. 그마저도 확정이 아닌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게 슬프지만.
‘시발.’
그만 생각하자. 이 문제는 생각할수록 암울하기만 하다. 공무원을 무자비하게 가는 블랙 컨츄리에 희망을 가지는 게 어리석은 거다.
빨리 돌아가서 근신 소식이나 전달해야지. 아무리 정신 나간 근신이어도 아무튼 근신이다. 평소처럼 동아리실에 있기는커녕 숙소 밖으로 나가면 안되는 상황.
교장이나 빌라르에게는 나를 찾으려면 숙소에 오라고 말해야 하고, 마르게타한테도 당분간 못 찾아갈 것 같다고 말하고…
‘새로 온 연락도 받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통신구가 다시 화려한 빛을 뿜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번에는 누구야. 별거 아니면 다음에 연락하라고 하고 바로 끊어야지.
“감찰부장입니다.”
– 아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애석하게도 나를 별거 아닌 놈으로 만들 수 있는 분의 연락이었다.
– 제도에 왔다고 들었단다.
“예,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 그러니?
그러자 마종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거슬리는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뭐지, 뭐가 문제지? 방금 이상한 말을 했나?
– 포션은 부족하지 않니?
“…마침 더 받아야 해서 돌아가기 전에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잠시 머리를 굴렸다가 한 말에 마종공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정답이구나.
포션은 저번에 넉넉하게 받아서 절대 부족하지 않다. 그건 직접 준 마종공이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하루에 한 번만 먹는 포션이 갑자기 떨어질 리가 있을까.
그걸 아는 마종공이 갑자기 포션 얘기를 꺼내는 건 좋게 말할 때 당장 달려오라는 의미.
‘까라면 까야지.’
그리고 오라면 오는 거다. 갑자기 부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작이 보자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 잘 됐구나. 마침 쉬는 중이었으니 바로 탑주실로 오렴.
“예, 각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계속 고개를 숙이다가 통신이 끊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하필 돌아가기 직전에 잡혔네.
사실 어차피 아카데미로 복귀하려면 마탑에 들러 마법사를 구해야 한다. 결국 걸렸을 일을 조금 빨리 당한 거기는 하지만.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왕이면 아무 접촉 없이 돌아가고 싶었다. 징계 먹으러 온 게 뭐 자랑이라고 인사를 드리고 가겠나.
마종공에게 인사를 했다가 무슨 일로 제도에 왔냐는 말을 들으면 도저히 할 말이 없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우리 아가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활기차구나.’ 라는 말이나 듣겠지.
‘그건 그거대로 슬프네.’
그런 말을 들으면 철없는 아이가 된 자괴감이 들 것 같다.
아무튼 빨리 인사나 드리고 가자. 더 시간 끌면 동아리 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다. 내일부터 근신인데 온갖 사람들하고 인사하고 있네. 이거 진짜 내일 구속되는 사람이 속세에서 마지막 인사 하는 것 같잖아.
망할, 이런 인사 필요 없어.
***
이번에도 아가는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 만약 아가가 왔다는 소식을 뒤늦게라도 듣지 못했다면 아가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갔겠지. 괘씸하다. 나는 만날 때마다 소중히 대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라니.
물론 아가를 향한 연심은 지금까지 꽁꽁 숨기고 있었으니 눈치채지 못했어도 이해한다. 그래도 최대한 아가를 각별히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연심은 몰라도 호의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고의로 피하는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제도와 아카데미를 오고 가는 입장이니 직접 오지 못하는 건 이해한다. 바쁘다면 그럴 수 있지.
문제는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제도에 와서도 연락 하나 주지 않는 야박함이다. 그게 실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 고의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예전과는 달라.’
그래, 예전과는 다르다. 아가는 이제 다른 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마르게타 공녀.’
철혈공의 막내딸. 아가와의 혼인을 위해 사교계에 은밀히 소문을 풀 정도로 진심인 아이.
처음 마르게타 공녀에 대해 들었을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가가 나와 같은 수명을 얻으려면 40년은 걸릴 테니까. 그 40년 동안은 누구와 어울려도 내가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아가는 나와 수백 년의 시간을 함께 할 테니 그 정도는 눈 감아줄 수 있다. 마르게타 공녀가 노리는 칼의 옆자리? 내가 진심으로 나서면 금방 차지할 거라는 생각에 여유를 가졌다.
“조만간 제국에 큰 경사가 생길 것 같습니다. 감찰부장이 짝을 찾은 것 같더군요.”
하지만 얼마 전, 전승공의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눈 감을 수 없었다. 여유가 사라졌다. 분명 40년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가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치가 떨렸다.
아니,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상관없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도 있는 자리에 내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
‘기다릴 수 없어.’
그래서 생각이 변했다. 40년의 유예 따위는 없다. 아가가 다른 여자와 함께 하려면 나를 먼저 택해야 할 거다.
그러니 아가가 나를 고의적으로 피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나를 밀어내는 아가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본다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 똑똑
“각하, 감찰부장입니다.”
“들어오렴.”
아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 앞으로의 수백 년이 행복할 테니.
그리고 주눅이 든 아가의 얼굴을 보자 타오르던 전의가 사그라들었다.
‘…넘어갈까?’
앞으로 아가와 수백 년은 함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로 벌써부터 감정이 상하면 곤란하다. 이번 일은 우리가 그릴 긴 미래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기도 하고.
그래, 바빴겠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연락도 못한 거겠지. 저렇게 처질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데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넘어가자.’
결국 고민 끝에 추궁은 포기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하셨는데,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
마종공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반겨줬다.
“어서 오렴. 차라도 마시겠니?”
“아, 제가 타겠습니다.”
“괜찮단다. 손님은 앉아있는 걸로 충분해.”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손님이기는 하지. 너무 일방적으로 초대당한 손님이지만.
마탑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딱히 불릴 이유는 없었다. 예전처럼 이상한 짓을 하다가 걸린 것도 아니고, 마종공에게 주거나 받을 것도 없고.
‘대체 뭐지.’
분위기를 보니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설마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건가? 전승공처럼?
그럴 듯한 가설이기는 하다. 이미 전승공도 그러는데 마종공이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마종공은 포션까지 챙겨줄 정도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기도 했으니.
“묻는 게 늦었구나. 제도에는 어쩌다 온 거니?”
아무렇지 않게 묻는 마종공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이 질문을 받기 싫어서 그냥 돌아가려고 한 건데.
“그게, 징계를 받을 일이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차를 타던 마종공은 황급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한 것보다 더 수치스럽다.
“징계라고?”
“예, 그렇게 됐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라는 눈빛에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원래 4인전에 참가하기로 한 강사가 마탑의 소환으로 자리를 비웠다, 그 공백을 어쩌다 보니 내가 채우게 됐다, 최대한 힘을 조절했는데 류티스 왕자가 일격에 기절했다, 그래서 징계 먹었다.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고 부끄러운 사정을 들은 마종공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시발점은 마탑의 소환령이니까. 그 스노우볼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힘들었겠구나.”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마종공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왕족을 상대로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니.”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살며시 고개를 들었던 마탑을 향한 원망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전승공의 걱정과는 다른 느낌의 따뜻함이다. 이게, 어머니의 포용력?
“그래도 서운하구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묻고 나서야 말하고.”
머리를 쓰다듬던 마종공의 귀가 조금 내려갔다.
“괜한 말로 각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에 도로 올라갔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하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각하.”
빠른 대답에 마종공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종공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걸 세는 게 더 빠르겠네.
“시말서로 끝난 걸 보면 황태자 전하도 아가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렴.”
“예?”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했잖니. 근신이나 구금이면 돌아가지 못했을 테니… 아니니?”
지극히 상식적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 그게 맞다. 근신을 당하면 아카데미 복귀가 아니라 제도에 남는 게 맞다. 징계를 받으러 온 놈이 근무지로 복귀하면 누가 봐도 시말서로 끝낸 거지.
그런데 짜잔, 근신이었습니다. 황태자는 정말 신박한 개새끼군요.
“근신입니다.”
마종공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카데미 근신 처분 받았습니다.”
“근신을… 아카데미에서?”
이번에는 마종공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