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59)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산 어르신도 할 말을 잃게 만든 황태자의 기행. 그래도 마종공의 반응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제국에서는 황태자 같은 인성이 평균인 건가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당연한 징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몸을 비트는 정신 나간 공무원이 되고 만다. 안타까움이 아니라 경멸을 받는 존재가 되는 거지.
‘그 정도로 블랙은 아니구나.’
다행스럽게도 제국이 블랙 컨츄리인 건 맞지만 슈퍼 블랙까지는 아니었다. 황태자는 평균 저 아래에 위치한 폭발하는 인성의 소유자고, 나는 가련한 피해자에 불과했다. 마종공이 인정한 거니 확실하다. 반박할 놈은 200년 정도 살고 와라.
“독특한 방식이구나.”
침묵을 깨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이런저런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마종공은 금방 마음을 정리─
아, 아니구나. 귀가 떨리는 걸 보면 아직도 정신이 아찔한가 보네.
“다시는 없을 방식입니다.”
혼란스러운 마종공에게 슬쩍 덧붙였다.
장수종에게 잘못된 상식을 주입시키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저번 황혼 교단 사태 때의 타니안 전진 배치도 그랬지만, 딱 한 번 일어나야 할 변수를 요즘 애들의 트렌드로 인식시키면 후대가 피곤해진다.
근무지 근신은 요즘 트렌드가 아니라 그냥 황태자가 미친 거다. 2황자라는 심연과 싸우면서 스스로도 심연이 된 괴물의 악행. 이딴 기행이 후대로 이어지면 절대 안된다.
“아무래도 제가 맡은 일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전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왕족 폭행 사건이니 일단 징계를 하는 모습은 보여야겠고, 그렇다고 제대로 징계를 주기에는 왕족을 통제하고 감시할 사람이 사라진다.
물론 개소리다. 황태자는 왕족들이 없었으면 감찰부 당직실을 근신 장소로 정했을 놈이다. 오늘부터 네 집은 여기야, 라면서.
그래도 마종공 앞에서 ‘그 새끼 순 개새끼에요!’ 라고 울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아무리 어머니 마종공이어도 그 꼴을 보면 차가운 눈으로 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드물게도 말을 흐린 마종공은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리 깔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됐다는 듯이.
‘아니야.’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머니, 나 그 새끼 너무 싫어요.
욕을 내뱉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지만 이성의 힘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슬슬 돌아가겠다고 운을 띄우니 마종공은 포션을 한 박스 안겨주었다.
아직 먹지 못한 포션이 가득 있다는 건 나도 알고 마종공도 아는 사실이지만, 일단 마종공을 만나러 온 명목은 포션을 받으러 온 거니까.
‘앞으로는 알아서 와야지.’
괜히 뭉그적거리다가 짐만 쌓였어.
“아가, 잠시만 기다려보렴.”
“아, 예.”
박스를 품에 안고 나가려고 했지만 잡히고 말았다. 뭐지, 더 줄 게 있나? 아니면 오랜만에 피라도 뽑히는 건가?
미리 소매라도 걷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마종공은 검은 케이프를 걸쳤다.
아, 어디 나가는 거구나.
“아카데미에 가는 건 오랜만이구나.”
“예?”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마종공이 아카데미에는 왜 가. 마음 고생으로 귀도 맛이 간 건가?
“지금은 여유가 있는 마법사가 없단다. 마차를 타고 돌아갈 수는 없잖니?”
그러니 친히 아카데미로 텔레포트를 시켜주겠다는 말.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마탑에 인적이 드물었다.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 그럴 일은 별로 없는데. 심지어 가끔 보이는 마법사는 뭐가 그리 바쁜지 숨 가쁘게 뛰어다녔고.
생각해 보면 아카데미에 파견을 온 마법사도 소환당할 정도의 일이 터졌다. 마탑에 있는 인원들은 말할 것도 없지.
‘이 시발.’
결국 또 돌고 돌아서 북방 때문이다.
“제가 각하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닌지…”
“신경 쓰지 말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빠르게 차단당했다. 그래,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기는 하다. 단순히 왕복 시간만 따지면 5분이나 걸릴까 모르겠네.
그런데 회장님하고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탄다고 생각하면 5분이 아니라 50초도 숨 막히잖아. 아니, 이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게 아니라 회장님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얻어 탄 수준 같지만.
타기에는 부담, 거절하면 무례. 극한의 양자택일.
“감사합니다, 각하.”
당연히 부담을 택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게 윗분의 심기가 상하는 것보다 싸게 먹히니까.
…나도 텔레포트나 배울까. 마검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사실 아가를 데려다 줄 마법사 정도는 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만일을 위한 인력은 언제나 대기 중이니까. 애초에 제국 마법의 결정체인 마탑이 고작 텔레포트도 못해준다고 하면 둘도 없을 치욕이다.
하지만 없다고 했다. 거짓을 입에 담는 건 마음에 걸리지만, 아가와 조금이라도 오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마르게타 공녀와 달리 나는 아가와 떨어져 있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작년이었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한 번 왔으니 다시 오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대로구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시선을 위로 올리자 아카데미 본관이 눈에 들어왔다.
졸업 이후로도 아카데미에 온 적은 몇 번 있었다. 마법부 교사들에게 조언을 주거나, 교장의 취임식에 참여하기 위해. 상당한 간격을 둔 방문이었지만 아카데미는 늘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기꺼웠다. 내 인생에서는 언제나 나 홀로 그대로였고, 주변은 변했다.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내 곁을 떠난 이후로는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마탑도 변했으니.’
아카데미는 아펠스 시절의 유산이기에 제국이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탑은 제국의 자랑, 제국 마법의 결정체. 마법이 발전하면 마탑도 변했다. 오죽하면 어제의 마탑과 오늘의 마탑은 다르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해하지만 쓸쓸하다. 그 감정이 치솟을 때면 종종 아카데미를 보러 오기도 했었는데.
“아가.”
“예, 각하.”
이제는 아니다. 나와 함께 변하지 않을 사람을 발견했으니.
더 이상 나 홀로 그대로일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변하는 걸 지켜보기만 할 필요가 없다.
이제 아가도, 칼 저 아이도 나와 같아질 테니.
“예쁘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귀여웠던 아가가 왜 이리 예뻐 보일까.
“잘 만든 것 같기는 합니다. 저는 매일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아가의 대답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내가 본관을 보고 얘기한 걸로 알겠지. 그렇게 알라고 말한 거기는 하지만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아가를 매일 봐도 좋기만 할 것 같은데. 그것이 100년이든, 200년이든.
“언젠가 아가도 알게 될 거란다.”
변하지 않는 동반자의 존재가 얼마나 행복한지.
때가 되면 나도 아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겠지.
“저도 100년 정도 지나면…”
본관을 바라보던 아가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라도 다문 것을 보면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리 내 나이가 100이 넘는 건 맞지만, 그 말을 아가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다.
엘프의 피가 흐르기에 인간 나이와 다르다고 생각해도 아가는 이제 스물 하나. 괜찮다고, 신경 쓸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아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평생 그렇겠지.’
포션이 제 역할을 다하더라도 아가는 여전히 나보다 연하다. 이건 하늘이 무너져도 바꿀 수 없다.
그러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나보다 연상으로 할까?
진중한 중년의 모습인 아가를 상상해봤다.
‘나쁘지 않아.’
진지하게 검토할 안건이다.
***
마탑으로 돌아가던 마종공의 눈빛은 꽤나 섬뜩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 같았지.
이 정신 나간 놈, 그 타이밍에 100년 얘기는 왜 나와. 그냥 ‘각하는 오래 사셔서 안목이 높아지셨네요!’ 라고 말하지 그랬냐.
‘그래도 돌아왔네.’
어제 류티스에게 푸른 피가 아닌 붉은 피가 흐르는 걸 확인한 이후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하루 동안 마음 졸이며 호출을 기다렸고, 황태자는 근무지 근신이라는 미친 판결을 내리고, 1과장은 반반 와인을 대접하고, 마종공 면전에 나이 드립을 날리고…
이거 정말 이틀 동안 일어난 일 맞나. 체감으로는 거의 2주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망할.’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팔자를 가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미 해탈한 사람이겠지.
한숨을 내쉬며 통신구를 꺼냈다.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말해줄 사람이 많으니까. 교장도 있고, 빌라르도 있고, 마르게타도 있고.
흐으으음.
– 칼? 돌아온 건가요?
“네. 방금 돌아왔습니다.”
누구에게 먼저 할까 하다가 마르게타를 택했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기에는 마르게타가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 다행이에요. 혹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모습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먼저 연락하기를 잘했다.
– 역시 황태자 전하도 칼이 어쩔 수 없었던 걸 아신 거예요. 근신도 아닐 정도면 딱 보여주기로 징계를 주신 거네요.
“아.”
5초 후, 마르게타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황태자의 기행은 연전연승이구나, 개 같은 거.
아카데미 근신이라는 내 생애 다시 없을 빅-이벤트는 생각보다 마음 아픈 일이었다.
숙소에만 처박혀 있는 답답함 때문에? 어딘가에 박혀 있는 건 감찰부에서 많이 경험했다. 근신 중에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건 늘 가지고 다니는 옵션이고.
“숙소에만 있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최대한 다양하게 가져 왔으니 골라서 먹으면 돼요.”
“…아, 예. 고맙습니다.”
입은 웃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마르게타 덕분에 마음이 아팠다.
마르게타는 근신 첫날 아침부터 이런저런 음식을 싸들고 숙소에 방문했다. 정말 종류별로 다양하게.
“내일도 올게요. 혹시 필요한 거 있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요?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그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사식이잖아.’
갇혀있는 사람에게 넣어주는 사회의 음식… 아무리 생각해도 사식이다.
나는 근신이다. 구금이 아니라 그냥 근신이다.
하지만 마르게타 마음 속에서 나는 이미 차디찬 감옥에 있는 것 같다.
‘어쩌지.’
이제 시말서 하나만 더 쓰면 진짜 구금인데.
그때는 마르게타가 기절하지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