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6)
제 16화
제과 못하는 제과 동아리 – 2
칼과 에리히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다. 칼은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주변을 확인하느라 그랬고, 에리히는 자신이 먼저 칼에게 말을 걸기가 부담스러워 그랬다. 하필 에리히의 시선으로는 칼의 표정이 진지해 보여서 더욱 그러했다.
‘좋은 사람.’
그런 칼을 바라보던 에리히의 머리를 문득 스쳐 지나가는 두 단어. 자신이 평생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기도 한 ‘좋은 사람’ 이라는 말이었다.
에리히는 자라면서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인 가주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도 조금 애매했다. 심지어 형인 칼마저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오묘한 회색 지대 사람이었으니까. 루이제를 만나기 전까지 에리히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그저 이상에 불과했다.
그런 에리히가 루이제도 아닌, 칼을 보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떠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얼마 전, 루이제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에리히에게 있어 동아리실에 가기 전, 즉 아카데미 정규 과목 시간은 같은 반이라는 행운으로 방해꾼 없이 루이제와 단 둘이 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 시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활발한 루이제로 인해 예상치 못한 화제가 나오기도 했다.
“혹시 에리히는 칼 오라버니 싫어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훅 치고 들어오는 루이제의 말에 에리히는 당황하여 루이제를 쳐다보았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 그리고 걱정된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제. 그 모습에 에리히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칼 앞에만 서면 긴장하는 에리히의 모습에 루이제는 형제의 관계를 걱정한 모양이다.
“아니.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형을 좀 어려워해서.”
“왜? 혹시 어릴 때 무슨 일 있었어?”
그 말에 에리히는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칼과의 사이가 그나마 좋았던 시기를 고르라고 하면 차라리 어릴 때였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 오히려 그래서 어색한 게 아닌가 싶네.”
차라리 무슨 일이 있었다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칼에게 익숙해졌다면 자신이 칼을 어려워하고 꺼릴 일이 없지 않았을까? 에리히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그냥, 형이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무겁잖아. 나하고 다르게 몇 년 전부터 관료로 지내서 자주 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그래. 별 거 아냐.”
애써 웃으며 넘어가려 했지만, 루이제는 오히려 그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칼 오라버니, 에리히를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았거든.”
“형이?”
이제는 에리히가 의아할 차례였다. 서로가 서로를 방임한다고 말할 수 있는 크라시우스 가문이다. 그런데 관료가 된 이후로 자주 보지도 못하는 칼이 에리히를 신경 쓴다? 아무리 루이제의 말이지만 딱히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응. 항상 에리히를 보고 있던데?”
그러고 이어지는 루이제의 말은 이러했다. 동아리 시간에 언제나 에리히를 보고 있었고, 가끔 아카데미에서 지나가다 저 멀리 칼이 보이면 칼의 시선은 루이제 옆에 있는 에리히를 보는 것 같았다고. 표현은 하지 않지만 에리히를 언제나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내가 칼 오라버니를 처음 봤을 때도, 에리히한테 따뜻하게 말해줬잖아.”
“그랬었나…”
에리히는 그 투박한 말이 어떻게 들어야 따뜻한지 의문이 생겼다. 그럼에도 에리히가 반박하지 않은 건 루이제의 말이기 때문인 것이 첫째고, 에리히 스스로도 미약한 기대심을 품어버린 것이 둘째였다. 정말 루이제의 말처럼 칼이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면?
‘정말, 동생이라 생각 중인 건가.’
다른 평범한 형제처럼 서로를 꺼리지 않고 우애롭게 지낼 수 있다. 그 가능성이 에리히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심정을 눈치챘는지 루이제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 사실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다? 그래서 칼 오라버니가 고문을 맡아줬을 때, 조금 신기하고 좋았어.”
“형도 모르는 사이에 여동생이 생겼었네.”
“히히, 그런가? 그래서 칼 오라버니하고 에리히 사이가 안 좋다고 하면 많이 슬플지도 모르겠다.”
칼 오라버니도 에리히도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좋은 사람 같거든.
루이제가 덧붙인 그 말에 에리히는 입을 열지 못했다.
‘좋은 사람이라.’
배시시 웃으며 말하던 루이제의 목소리가 아직도 에리히의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에리히라고 칼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은 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겠는가. 그저 본능적으로 꺼려졌기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을 뿐.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칼이 동아리 고문을 맡으면서 에리히는 트라우마인 칼과 맞설 필요성과 용기를 얻었고, 루이제와의 대화에서 트라우마를 이길 희망을 보았다.
‘루이제 덕에 이제야 직시하네.’
몇 년 동안 에리히는 본능적으로 꺼려진다는 이유로 칼을 피해 다녔다. 제대로 대화를 하지도, 칼을 지켜보지도 않았음에도 무서워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칼을 볼 마음이 생겼다.
그러한 에리히의 변화를 느꼈는지 걸음을 옮기던 칼이 뒤를 돌아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곳까지 와버렸다. 이 자리에서 형과 조금씩 가까워지자. 그런 다짐을 하며 에리히는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칼이 조금 더 빨랐다.
“너 루이제 좋아하는 거 맞냐?”
아.
이게, 좋은 사람…?
에리히의 눈 앞이 깜깜해졌다.
‘여기면 괜찮겠지.’
적당한 장소를 찾다 보니 사람이 올 일도 드물고, 근처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 올 수 있었다. 여기라면 부담 없이 얘기해도 좋을 거다. 뒤를 돌아보니 에리히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너 루이제 좋아하는 거 맞냐?”
시작으로는 너무 과격하고 자극적인 말이지만, 부디 에리히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지금 에리히를 강하게 만드려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애매한 배려는 오히려 아이를 나약하게 만들겠지… 에리히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로 인한 패배가 아닌, 충격으로 인한 승리다.
그런데 이런 형의 깊은 뜻도 모르고 감히 에리히의 넋이 도망치려고 한다. 어림도 없지, 바로 이어서 간다.
“혹시 내가 모르는 둘 사이의 깊은 인연이 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야.”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이다. 다른 넷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추억의 공유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에리히는 해당 사항 없다.
“솔직히 마음을 표현했나 하면, 그것도 아니야.”
화려한 고백은 화려하게 차일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상대에게 자신을 이성으로 인식 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에리히는 해당 사항 없다.
“너를 선택할 압도적인 이유가 있냐면… 너도 알지?”
너 그런 거 없어. 순수하게 둘이 쌓는 인연으로 가야 해.
조금씩 에리히에게 다가간 나는 너덜너덜한 에리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지금 네가 다섯 중에서는 제일 불리해.”
에리히는 말이 없었다. 눈빛이 흐려진 것이 충격을 조금 세게 받은 모양. 다짜고짜 형이라는 놈이 밝히지 않은 연애 사업 관련으로 숨 쉴 틈 없이 후드려 갈기니 정신이 없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파괴는 재창조를 위한 이전 단계. 이 충격이 강화 성공 에리히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내 동생을 믿는다.
“…너,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겠고.”
물론 이렇게 마무리 하면 에리히가 어디서 칼을 가져와 나를 찌르려 할지도 모른다. 찔려도 죽지는 않겠지만, 그 다음부터 서로 보기 너무 어색해지잖아. 그러니 충격을 줬으면 희망적인 얘기로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나는 슬쩍 에리히의 옆으로 가 에리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루이제가 직접 제과 동아리를 만든 거. 잊지 마라.”
그 말에 에리히의 흐릿한 눈이 나를 향했다. 이게 루이제 이름 얘기하니 바로 반응하네.
“루이제가 제과를 좋아하는 거, 그 정도는 알지? 너도 같이 해라. 너 제과 솜씨 전혀 없는 거 아는데, 옆에서 하는 시늉이라도 해.”
아니, 어쩌면 미숙한 에리히를 보고 루이제가 기뻐서 도와줄지도 모른다. 원래 고인물은 뉴비에 환장하는 법이니.
“만들 때 같이 만들고, 못 따라하겠으면 물어라도 봐. 그렇게 취미를 공유하는 걸로도 유리해.”
신분이 까마득하게 차이 나는 높으신 분들과 신분 차이가 그나마 적은 같은 취미의 클래스 메이트. 이거 누군가한테 의지해야 할 일이 생기면 누구한테 가겠냐. 비교가 가능하냐?
내 말이 이어질수록 에리히의 눈에 다시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 충격을 주니 새로운 지식도 순조롭게 들어가잖아. 충격 없이 꽉 막혀 있었으면 이 정도의 효과는 없었을 거다.
“사실 신분 차이? 오히려 네가 유리할 수도 있다. 나이어드 가문이 무슨 가문이지?
“남작가, 지…”
“그렇지. 남작가지. 단순 계산하면 크라시우스 가문하고 두 단계 차이 뿐인 남작가.”
물론 단순 오등작으로 계산할 때 얘기다. 크라시우스는 단순 백작가로 취급할 수 없는 가문이니까. 하지만 저 위의 황족, 왕족, 성자 후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그렇기에 에리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걸 내려 놓았다가 다시 주입하니 새로 보이는 것들이 있겠지. 그리고 내가 확인 사살 겸 조용히 덧붙였다. 넷 중 셋은 외국인이라 아카데미 졸업하면 돌아가야 한다고.
그 날, 에리히는 강해졌다.
이제 제과 못하는 제과 동아리 부원에서 제과 하는 부원 정도로는 레벨업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를 슬쩍슬쩍 어색하게 쳐다보는 에리히를 먼저 동아리실로 돌려 보냈다. 부원들이 왜 맨손으로 오냐고 물으면, 그냥 오늘 올 줄 알았던 재료가 일이 생겨 다음에 오기로 했다고 변명하라 일러두었다.
나는 뭐, 나온 김에 잠깐 바람 좀 쐬고 들어가야지. 너무 나만 말해서 몸에 열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못난 놈.”
쯧, 혀를 한 번 차고 벽에 몸을 기댔다. 동생을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내가 이런 조언을 줘야 하는 상황인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그렇게 특별한 조언을 준 것도 아니다.
이해가 안된다. 정말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본능적으로 움직여지는 게 있지 않나?
심지어 지금까지 본 루이제는 조금 단순한 편이다. 적당히 루이제가 곤란한 점을 들어주고, 필요한 것을 해주고, 하는 일에 호응해주고, 완성작을 먹고 좋은 반응만 보여줘도 루이제의 마음을 얻기는 쉬운 일이다.
그런데 다섯 중에 그걸 제대로 하는 놈이 없네. 진짜 사랑에 눈이 멀면 지능이 떨어지나.
그렇다면 루이제와 맺어지는 상대는 다섯 중 누가 되든 지능이 안타까운 상태일 것이다. 루이제에게 미리 애도를 표해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최약체인 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는 칼의 모습에 에리히도 감동했겠죠. 아, 참된 형…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지만, 아직 미숙해서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렌지주스님! 후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