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62)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요즘 들어 힘도 없고 의욕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한 번을 못 보지?’
2학기가 된 이후로 칼 오빠와 만나지 못했다. 오죽하면 방학 동안 같이 있던 시간만큼 학기에서 차감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에넨께서도 정말 야박하셔. 피조물이 불리한 거는 철저하게 적용하시잖아.
심지어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합당한 이유 때문에 오빠를 보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네.
‘동아리만 같았어도 좋았을 텐데.’
2학기가 시작한 이후로 매일 그런 생각을 할 정도다. 루이제가 제과 동아리 만든다고 할 때 그냥 이름 올릴 걸.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저번 학기 때는 원예 동아리인 나도 제과 동아리에 수시로 방문하여 오빠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원예 동아리가 한가했으니 선배가 배려를 해준 것.
“학기 초에는 바쁜 거 알잖아. 조금만 참아.”
“네, 선배.”
당연히 동아리가 바쁘다면 그런 배려는 기대할 수 없다. 선배 말처럼 학기 초에는 동아리 업무가 몰리는 시기고, 저번 학기 때도 초에는 바빴으니까. 그때는 오빠를 피해 다닐 때라 별 지장이 없었지만.
결국 동아리 때문이다. 내가 제과 동아리가 아니라 원예 동아리라서 이런 비극이 생긴 거다.
‘이제 와서 탈퇴할 수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쉴 뻔했다.
아카데미의 동아리는 단순한 취미 공유 장소가 아닌 엄연한 사교의 장이다. 동아리 역사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제국 각지에 퍼진 동아리 선배의 숫자도 그에 비례할 정도로 많다.
그런 사교 단체에 자발적으로 발을 들였으면서 일방적으로 나간다? 바로 무수히 많은 선배들에게 찍히겠지. 차라리 아무 곳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면 아군도 적도 없었겠지만, 가입하고 탈퇴하면 적만 생긴다.
‘조금만 참자.’
그래, 참으면 되는 거야. 아무리 많은 일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니까. 끝나기만 하면 다시 오빠를 볼 수 있다.
‘…내년에도 이러겠지?’
하지만 갑자기 든 생각에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기껏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망쳤어.
우울함이 온몸을 잠식하자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아침부터 이런 기분이면 밤까지도 이럴 거야. 오늘 하루는 망했어. 그냥 이대로 잠이나 자야지.
‘조퇴하고 싶다.’
차라리 아프다고 하고 돌아갈까? 솔직히 마음이 아픈 것도 아픈 건 맞잖아.
그리고 이런 자그마한 일탈 계획을 꾸미는 사이,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이리나, 자는 거야?”
아직 고개도 들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다. 루이제구나.
자는 척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굳이 엎드려 있는 사람을 부른 걸 보면 중요한 일이겠지. 그리고 루이제를 무시하고 싶지도 않고.
“아니야. 그냥 엎드려 있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슬쩍 고개를 들자 걱정스레 묻는 루이제가 보였다. 우울했던 기분이 아주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래? 다행이네.”
활짝 웃는 루이제를 보자 나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도 루이제 덕분에 마음이 평화─
“그러면 잠깐 나와줄 수 있어? 할 말이 있어서.”
응?
난데없는 요청이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디 멀리 가자는 것도 아니고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는 거니.
게다가 루이제가 비밀스러운 대화를 원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것도 있지만 걱정되기도 하고.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이런 곳도 있었구나.’
그 와중에 루이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처음 와본 곳이었다. 아카데미가 워낙 넓어서 학생이 모르는 곳도 많지. 인적도 없고 조용한, 정말 누구도 모를 것 같은 장소.
이런 곳을 용케도 알았네. 확실히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기에는 딱 좋은 곳 같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를 보며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예쁘지? 나도 아는 선배한테 들은 장소야.”
“응, 예쁘다.”
자연적으로 피어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관리하는 건지 모를 꽃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어지간한 화단보다도 예쁜 것 같아.
그렇게 잠시 꽃들을 보며 긴장을 풀었다. 루이제가 무슨 용건으로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까지 굳어 있으면 안되잖아. 나를 믿고 말하는 걸 텐데 믿음을 줘야지.
“저기, 이리나. 물어볼 게 있어.”
루이제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힘들게 말하는 걸 테니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말자.
“오라버니한테 선물로 드린 산사나무. 왜 그걸로 드린 거야?”
‘아.’
순식간에 흔들리고 말았다.
“그, 그거?”
최대한 태연하게 답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최근에 준 것도 아니고 저번 학기에 준 선물이다. 루이제가 모르게 준 것도 아니고. 그런데 갑자기 이제 와서 묻는다고?
‘눈치 챘나?’
가슴이 급격하게 요동쳤다. 평범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질문을 할리가 없다. 무언가 알아채서 이러는 거겠지.
그리고 그 선물에 숨겨진 의미는 하나밖에 없다.
‘유일한 사랑.’
산사나무의 꽃말을 떠올리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그 의미로 준 선물은 아니었지만, 정작 산사나무는 내가 의도한 꽃말이 아닌 유일한 사랑으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알아버렸다. 그 부끄러운 강제 고백을 기어코 들켜버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지.’
진정하자. 생각해 보니 들켜도 문제가 되는 건 없잖아.
부끄럽고 민망한 건 맞다. 오빠에게 고백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들켰으니까.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잘못된 건 아니잖아.
“꽃말이 좋아서 그걸로 골랐어. 오빠는 모르시는 것 같지만.”
비록 아직까지도 오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내가 먼저 마음을 보이지 않더라도 남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산사나무의 꽃말은 유일한 사랑이래.”
그러니 당당하게 말했다.
“나한테 오빠가 딱 그렇거든.”
처음으로 속을 털어놓은 상대가 오빠가 아닌 루이제라는 건 조금 이상하네.
그래도 루이제니 괜찮겠지. 친한 친구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건 흔하잖아.
– 뿌득
…무슨 소리지?
***
이리나의 말에 무심코 이를 갈고 말았다.
역시 맞았어. 이리나도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게 맞았어. 아니기를 바랐는데, 내 오해이기를 바랐는데.
‘나보다 먼저였잖아.’
아무리 늦어도 산사나무를 선물로 줬을 때부터 오라버니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다. 방학 중에서야 스스로에게 솔직해진 나보다 빨리.
이유 모를 분함이 스멀스멀 가슴에 퍼졌다. 아니, 모르지 않아. 공녀님 말고 나보다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게 분한 거야.
공녀님이면 이해할 수 있는데. 공녀님이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너도 가만히 있었으면서.’
공녀님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아니잖아. 나처럼 가만히 있었잖아. 선물은 나도 오라버니한테 많이 드렸다고.
‘내가 먼저 만났는데.’
오라버니를 먼저 만난 건, 가까이에 있던 건 나였어.
내가 먼저, 내가 먼저야. 오라버니의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여야 돼.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
“루이제,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이리나의 모습에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리나의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처음 이리나를 만나고, 친구가 되고, 같이 놀고, 같이 웃고, 가끔 싸우기도 하고.
‘바보 같아.’
가슴을 좀먹던 분함은 자괴감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리나한테 어떻게 이래. 소중한 친구를 미워하면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나는 이리나 덕분에 기회를 얻은 거잖아.
이리나가 아니었으면 나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거다. 허락해 준 건 공녀님이어도 기회를 준 건 이리나다. 그런 이리나한테 분노를 품는 건 염치가 없는 거지.
응, 염치가 없는 거야.
‘얼마나 추해지려고.’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하다. 바보에 비겁하지, 거기에 염치도 없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감히 품어서는 안되는 마음이 있는 법인데.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은인 같은 우정을 버리려고 하고.
심지어 아까 한 말도 이상해. 왜 산사나무를 드린 거냐고? 지금 그게 선물을 준 사람한테 할 말이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리나를 추궁하는 거야.
왈칵 눈물이 나왔다.
***
당황스럽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만.
“미안, 미안해애애애…”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루이제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래도 진정시키는 게 먼저니 괜찮다고 다독이며 얼굴을 닦아줬다.
“나, 나도 오라버니 좋아하는데에에… 이리, 이리나도, 오라버니, 를… 좋아한다고 해서어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자 히끅거리면서 뭔가 애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 거였구나.’
어떻게든 조각처럼 흩어진 말을 모아 듣자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질투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나도 좋아한다고 하니까 질투를 한 거지.
이해한다. 아무리 부인이 여럿인 게 드물지 않다고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있으면 슬플 수밖에.
“괜찮아. 이렇게 말해줬잖아.”
그 슬픔을 솔직히 터뜨리는 건 굉장히 양호한 방식이다. 감정을 꽁꽁 숨겨서 결정적인 순간에 비수를 날리거나, 정말 냉담한 무시나 경멸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펑펑 울며 투정을 부리는 건 귀여운 수준.
그건 그렇고 의외네. 루이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다섯 중 하나가 될 줄 알았는데.
“진짜 미안해, 잘못했어…”
“괜찮다니까.”
무심코 루이제를 쳐다보자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밖으로는 왜 부른 거야. 얘는 독한 건지 순한 건지 구분이 안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