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64)
근신도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다행이다, 일주일 사이에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야.
에넨도 양심은 있는 것 같다. 이미 누군가에게 얻어 맞은 상대를 또 패는 건 너무 치졸하고 잔인한 짓이지. 게임을 봐도 초보자에게는 보호 기간이 있는 법이고, 본진이 거하게 털린 사람도 일정 기간 연속 침공이 불가능한 법이다.
‘너무 긴장했나?’
생각해 보면 2학기에 들어서는 부원들도 잠잠한 편이었다. 예전과 달리 루이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기행을 저지르기는커녕 평범하게 학창 시절을 즐기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
게다가 일이 터져도 교장이나 빌라르 같은 사람들도 버티고 있잖아. 그냥 내가 직접 처리해야 마음이 놓여서 이러는 것 같다. 이거 병인 것 같은데.
‘노예 근성이 생겼어.’
착잡한 심정에 한숨이 나왔다. 4년 동안 구르다 보니 발목에 걸린 쇠사슬을 당연하게 생각하잖아. 주인님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눈치 보는 노비도 아니고.
살짝 아래로 내려간 시선을 다시 위로 올리자 차를 마시는 마르게타가 보였다.
“마르는 관료가 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네?”
너무 뜬금없는 말에 마르게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사실 마르게타도 딱히 관료가 될 생각은 없고, 나도 간간이 공무원은 할 게 못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는 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맥락 없이 말한 적은 없었지.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마르게타가 나처럼 노비가 되어버리면 매우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말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어…
“관료가 아니면 저는 딱히 할 게 없는데, 칼이 책임져주실 건가요?”
잠시 눈을 깜빡이던 마르게타는 장난기를 담아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확실히 날이 갈수록 공격력이 높아지고 있네.
조금은 아쉽다. 당당하게 말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웠는데 지금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태연하니까.
“마르가 무슨 일을 하든 책임지겠습니다.”
“그래요? 기쁘, 네요.”
그래도 방어력이 유감스러운 건 여전하니 아쉬움은 덜했다. 본인이 먼저 시작해놓고 답변을 하면 부끄러워 하는 이 안정감은 대체.
‘확인하고 싶은 건가.’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조용히 찻잔에 입을 대는 마르게타를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마르게타 나름의 애정 확인 방식이 아닌가, 하고.
작년에는 혼담을 거절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이후로는 마르게타의 마음을 알지만 은근히 밀어냈다. 그런 꼴을 당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겠나.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애정 결핍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이렇게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며 결핍을 채우려는 거겠지.
‘업보가 짙구나.’
과거의 나는 뭐하는 새끼일까. 자괴감 들고 괴롭다.
“칼,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 예. 편하게 말하십쇼.”
슬금슬금 몰려오는 자괴감은 마르게타의 목소리 덕에 퇴치할 수 있었다.
“저기, 혹시…”
머뭇거리는 모습에 의아한 감정이 들었다. 마르게타가 할 말을 망설이는 성격은 아닌데, 무슨 일이지?
하지만 재촉하면 더 말하기 힘들 거다. 가만히 기다─
“부인이 여럿인 건 어떻게 생각하나요?”
리면…?
‘뭐지.’
이건 대체 무슨 말이야.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모르겠다.
***
혼란스러운 듯한 칼의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올 뻔했다.
무슨 심정인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이 말을 하는 나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듣는 칼은 오죽할까.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스스로도 어이가 없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왜 이러는지.
칼에게 슬쩍 루이제 영애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것 정도는 그럴 수 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이런 노골적 암시는 그 수준이 다르다. 오히려 칼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으니.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입 밖으로 내버렸는데.
“사실…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있어요.”
어제 루이제 영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지. 세 명 정도는 괜찮냐는 말이 부인을 말하는 걸 줄은.
생각해 보면 그렇게 충격적인 말은 아니다. 내 눈에 멋진 남자면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지 않겠나. 나도 모르는 곳에 칼에게 연심을 품은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굳이 그 말을 내 앞에서 꺼낸 이유가 중요할 뿐.
“이리나도 오라버니와 함께하고 싶어해요. 그… 선배가 허락해주신다면…”
그 뒤로 구구절절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요약하면 간단했다.
첫 번째 부인 자리는 감히 노리지도 않으니 그 다음을 허락해 달라는 말. 이 말을 당사자가 직접 하고 싶지만 갑자기 방문할 수는 없었으니 내일 찾아오고 싶다는 말.
…솔직히 루이제 영애에게 듣는 것도 만만치 않게 갑작스럽지만, 그래도 당사자의 기습 방문과 제3자의 조기 전달은 느낌이 다르긴 하지.
“오랜만이에요, 이리나 영애.”
아무튼 만났다.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리나 영애의 가문, 요룬 백작가가 감찰부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버님께서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기에 저런 일이 터졌냐고 혀를 차시기도 하셨으니.
그리고 그 피해자가 가해자인 감찰부장인 칼을 마음에 품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니지.’
사람의 감정을 어찌 타인이 간섭할까. 심지어 자기 나름대로 전전긍긍했을 영애한테.
“칼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면 전 막지 않을게요.”
“가,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는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런데 이리나 영애는 알까. 아무리 내가 허락을 해도 과거 칼의 철벽을 생각하면 앞으로 갈 길이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만약에 칼이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칼이 밀어내면서 두 영애가 상처를 받으면─
‘별로네.’
내가 1년 동안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저 둘이 겪을 거다.
“고위 귀족들은 부인이 여럿인 게 흔하잖아요. 칼은 어떻게 생각하나 해서요.”
“예, 뭐. 부인이 여럿인 분들이 많긴 하죠.”
그래서 이 지경이 됐다. 혹여나 칼이 다처가 아닌 일처를 고집하지는 않을까, 저 둘을 영원히 밀어내지 않을까 싶어서 입을 열었다.
오지랖이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 사실 칼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걸 생각하면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게 맞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는 걸. 지인이 가시밭길을 걷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 하지 못하겠는 걸.
‘내가 이러는 걸 알고는 있을지.’
문득 두 영애의 얼굴이 떠오르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건 내 독단으로 하는 거라 생색을 낼 수도 없고, 이걸 핑계로 빚을 지을 수도 없는데.
‘빚이라고 할 건 없나?’
내가 하는 건 단순히 칼의 의향을 묻는 것, 그리고 칼이 되도록이면 여러 부인을 들이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내가 뭐라고 말하든 칼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빚은 아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
가끔 별거 아닌 말이 머리에 깊숙이 남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일부다처.’
마르게타가 돌아간 뒤에도 계속 그 단어가 머리에 맴돈다.
사실 부인이 여럿이든 하나든 딱히 신경 쓴 적은 없다. 내가 빙의 전 현대인 마인드의 힘을 빌려 ‘으어딜 구시대의 잔재를!’ 같은 말을 하기에는 여기 구시대 맞다. 로판 배경이 보통 중세, 근세 유럽풍이니 뭐.
게다가 일부다처에 태클을 걸 거면 애초에 신분제에도 이의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나. 귀족으로 빙의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갑자기 일부다처에 난리를 치는 건 좀 이상하지.
“서로 마음이 맞으면 여럿이어도 상관없죠. 요즘 시대에 납치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르게타에게는 그렇게 답했다. 황제도 부인이 여럿이었고, 공작 중에도 부인이 여럿인 사람이 있고, 그 아래 귀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다처 반대!’ 같은 걸 외치면 반동분자밖에 더 되겠나.
“마음이 맞으면… 그래요, 그게 중요하죠.”
다행히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마르게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뭐지.’
정답을 고른 것 같기는 하지만 무슨 의도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갔으니 괜찮나?
그래, 아무튼 마르게타의 기분이 괜찮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지. 그거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게다가 근신 마지막 날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니 충분하다 못해 과분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명언을 잊고 있었네.
“이야, 고문 선생.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그래.”
네가 오기 전까지는 정말 좋았지. 어차피 내일 볼 건데 왜 굳이.
달싹거리는 입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름 위로 면회를 온 녀석에게 당장 꺼지라거나 왜 왔냐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진정하자. 비록 1학기 때 이 녀석에게 당한 것이 많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안 했잖아. 심지어 이번 근신은 내가 류티스를 패서 일어난 사고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하러 온 가슴 따뜻한 이야기.
“준비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이거 늦는 게 아니나 싶었는데, 다행히 마지막 날에는 됐군요!”
그렇게 웃음을 터뜨린 류티스는 상자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출소한 죄인을 위한 보양식입니다.”
‘이 새끼가.’
워딩이 이상하잖아. 그냥 보양식이라고 해줘.
“나름 유명한 음식이지만, 저는 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왕자한테 죄인이 먹을 음식을 주면 역적이지 그게.
급속도로 찝찝한 기분이 샘솟지만 어서 열어보라는 눈빛에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하얀 케이크.
…케이크?
‘왜 평범하지?’
그것보다 출소한 죄인한테 케이크?
그리고 케이크 윗면을 보니 137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었다. 이건 또 뭐야.
“원래는 죄수 번호가 있어야 하는 자리인데, 고문 선생은 그런 거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올해 년도로 했습니다.”
“하.”
순간 웃음이 터졌다. 개새끼, 이번에는 좀 웃겼다.
그리고 류티스를 돌려보낸 이후, 케이크를 빵이 아닌 두부로 만들었다는 걸 알고 두 번 웃었다.
일주일 동안 갇혀 있어서 그런지 사소한 걸로도 웃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