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67)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 앉았다. 나도 게르하르트도 크리스티나도 아무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방금 한 사람의 세계가 무너졌으니까.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세계, 혹은 인생을 박살 낸 혐오스러운 인성이 나라는 것에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최대한 외면했지만, 애써 크리스티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폭탄을 터뜨리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너무하잖아.
‘망할.’
그리고 보자마자 괜히 봤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넋이 나갔다는 말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시선은 하염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몸도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차라리 무슨 소리냐고, 말도 안되는 개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쳤으면 덜 미안했을 텐데.
아니, 그래도 미안하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동일 인물이라니, 정말입니까?”
게르하르트도 그런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 담당 교수로서 석사가 열심히 쓴 논문이 하루 아침에 쓰레기가 되었으니 궁금하긴 하겠지.
“예, 맞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진짜다. 아리두 케자, 우데스르 자이루그. 아무리 봐도 유사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저 두 이름은 한 사람의 이름이다.
당시 우리도 꽤나 당황했었지. 분명 검 들고 설치던 근딜이 갑자기 활로 깔짝이는 원딜로 나타났다. 심지어 이름도 바꿔서.
“위대하신 그 분께서 나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셨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냥 스카우트였다. 카간이 보기에 꽤나 잘 싸우는 놈이라 다른 씨족인 놈을 자기 씨족으로 데려온 거다. 씨족명만 바꾸면 정이 없으니 이름도 새로 붙여서.
그 와중에 카간한테 ‘너는 검보다는 활이 어울려.’ 같은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무기도 바꾸고.
그런데 진짜 활을 더 잘 쏘더라. 개새끼.
“원래는 아리두 씨족이었지만 역천자가 직접 거두며 우데스르 씨족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주로 활동하는 전장이 변했고, 주무기도 바꿨으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하, 하지만 분명 우데스르 자이루그 등장 이후에도 아리두 케자가 나타난 기록이 있었어요!”
게르하르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크리스티나가 절박하게 말했다.
감히 하늘 같은 교수가 대화하는 도중에 석사 나부랭이가 끼어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 상황은 그걸 가능하게 했다. 게르하르트마저 처절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을 정도니.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항변은 실로 설득력 있었다. 우데스르 자이루그가 나타난 이후로 아리두 케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모를까, 하필 두 이름이 같이 언급되던 시기가 있었지.
“그거 잘못 기록한 겁니다. 갑자기 이름을 바꿔서 종종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있었죠.”
유감스럽게도 그냥 실수다. 군대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아, 아아…”
혼신을 다하여 만든 논문. 하지만 그 논문의 전제가 실수에 불과했다는 충격적 진실.
크리스티나는 탄식을 흘리다가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미치겠네.’
시선을 돌리기 직전, 눈가에 무언가 반짝이는 걸 보고 말았다.
이 죄책감은 대체 어떻게 풀지.
크리스티나는 병가(사유: 정신 붕괴)를 신청했지만 반려당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예?”
미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정신이 나갈 뻔했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며 진정하던 크리스티나마저 누구 하나 갈아버릴 듯한 눈으로 게르하르트를 쳐다봤다.
‘뭐가?’
이 미천한 머리로는 뭐가 잘 된 건지 모르겠다. 혹시 새롭게 논문을 쓰면 학업 성취에 도움이 되니 잘 됐다고 하는 건가?
아, 이 잔인한 사람…!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 진실은 없습니다. 어차피 터질 거라면 논문이 통과된 이후보다 제출 전이 낫습니다.”
“그렇군요.”
다행히 정상적인 이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한창 교수나 총장을 하고 있는데 석사 시절 논문이 심연에서 끄집어지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자꾸 비유를 석사라고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석사인 걸 어떡해.
‘맞는 말이기는 한데.’
어쨌든 게르하르트의 말은 맞다. 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고통이 없는 건 아니지.
미래에 큰 타격이 되니까 지금 잠깐 아프고 말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남는 장사지만 막상 지금 아픈 사람한테는 그 말이 들리겠냐고.
‘잠깐 수준도 아니잖아.’
저건 못해도 사지가 날아간 충격이다.
“그리고 감찰관님 덕분에 논문 주제도 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적절한 반응을 찾지 못했다. 방금 멀쩡한 논문 하나를 박살냈는데 무슨.
“아.”
반면 크리스티나는 게르하르트의 말에 무언가 깨달았는지 안색이 밝아졌다.
“이건 대발견입니다. 당연히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일 인물이라뇨!”
게르하르트는 본인이 말하고도 가슴이 벅찬지 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대발견이기는 하네. 나도 관우와 장비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 놀라기는 하겠다.
“문제라면 제출 기간이지만… 이 정도 발견이면 1년 정도는 감수할만합니다.”
‘아닌 거 같은데.’
정작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안도 반 슬픔 반이 뒤섞였다. 바로 주제를 찾은 건 다행이지만, 끔찍한 석사 생활을 1년이나 더 한다는 생각에 너무 신나는 모양.
어쩔 수 없지. 사고를 쳤으면 책임을 지는 수밖에.
“혹시, 논문 심사는 어디서 주관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교육성입니다. 정확히는 편찬부입니다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게르하르트는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해줬다.
그런데 편찬부? 거기 교과서 담당하는 곳인데 겸임하는 건가? 뭐, 다른 부서 일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편찬부 관할이라는 거니.
‘아는 사람이네.’
다행히 편찬부장하고는 그럭저럭 안면을 튼 사이다. 그리고 빚도 조금 지운 상황이고.
인맥은 이럴 때 쓰는 거지.
***
멍하니 자리에 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연락 좀 하고 오겠다던 감찰관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내년 2월까지만 제출하면 된다고 합니다. 통과 논문 등록은 3월에 일괄적으로 하니 하나 추가되는 건 상관 없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엄청난 소식과 함께.
그 깐깐하기로 유명한 편찬부에서 그런 양보를 해줬다. 제출한 논문이 자연 재해로 사라지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연기는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편찬부에서.
“저 때문에 크리스티나 양이 새로 논문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수습도 제가 하는 게 맞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감찰관님에게 크리스티나 양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었다.
당연하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
‘통과는 확정이군.’
본래 제출 기한을 지켜야 한다면 무리지만, 내년 2월이면 충분하다. 정식 교사의 논문도 아니고 보조 교사의 논문이니까.
심지어 정식 교사 논문이었어도 문제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상식을 뒤바꾼 주제다. 이건 어지간히 글을 못 쓰는 게 아닌 이상 제출만 하면 통과 확정이다.
솔직히 보조 교사 논문으로 사용되기 아까운 주제지만, 이 역시 크리스티나 양의 운이 아니겠나. 원래 학자에게는 운도 능력의 일부다.
“축하드립니다, 크리스티나 양. 이제 보조를 뗄 날도 머지않았군요.”
드물게 활기찬 모습으로 책장을 정리하는 크리스티나 양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옥에 있다가 천국으로 가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다 교사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빈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게 어디 내 덕분이겠나. 다 감찰관님 덕분이지.
북방 유목민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걸 기대하고 모셔온 건 맞다. 설마 첫날부터 이런 격변을 겪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런 오산이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안개가 걷히고 진실이 드러나는 거니까.
“내일도 이 시간에 찾아오겠습니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동아리 시간이 아니면 할 일 없는 백수라서요. 오히려 게르하르트 씨가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됩니다! 무조건 됩니다!”
확답도 받았다. 단발적인 만남이 아니라 지속적인 만남, 그에 비례하는 조언.
정말 기쁜 날이다.
***
간신히 석사 멘탈 살해범이 되는 건 피했다. 편찬부 주관이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 것 같은데.
‘다행이다.’
아직도 아찔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연락을 안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연락하려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래도 편찬부장에게는 이래저래 빚을 얹어둔 게 있어서 무난히 끝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감찰부장에게 신세를 진 게 있으니 그 정도 편의야 봐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선량한 보조 교사 하나 살리신 겁니다.”
“하하! 그거 좋군요. 그 친구가 성공하면 생색이나 내야겠습니다.”
역시 인생은 인맥이다. 쪼아대는 상사보다는 서로 돕고 지내는 공무원 친구가 더 좋은 법이지.
그런데 뭔가 불안하다. 첫날부터 이런 사고가 터졌는데 앞으로 괜찮을까?
‘오늘은 그나마 제출 전이었지.’
재수 없으면 게르하르트가 이미 제출한 논문을 저격하는 사태가 터질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무섭네.
그래도 게르하르트의 열정을 보면 오히려 좋다고 할 것 같기는 하다. 아니, 애초에 과거의 자신이 쓴 논문을 지금의 자신이 반박하는 거니 성장했다는 증거 아닐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그리고 동아리 시간, 타니안에게 혹시 내가 알려준 대로 답을 썼느냐고 물었다.
“형제님이 알려주신 게 옳다고 생각하니 무의식적으로 써지더군요. 진실을 아는데 거짓을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
그래도 본인도 머쓱하기는 한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