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68)
지금까지 아카데미 생활 루틴은 간단했다. 아침 칼기상과 식사 이후 적당히 동아리실로 출근하고, 거기서 몸 좀 풀다가 적당히 부회장실에 가서 마르게타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뒤로는 동아리 시간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갑자기 깜짝 이벤트만 터지지 않으면 평화롭고 한가한 일상.
“아두메 씨족과 가릴티오 씨족은 경쟁 관계였습니다. 랑카 부족의 주도권을 두고 툭하면 충돌했죠. 역천자 앞에서는 자제하는 척이라도 했지만, 뒤로는 꽤나 난리였던 걸로 압니다.”
“오, 그렇군요!”
그 간단한 루틴에 새로운 일정이 추가됐다. 게르하르트와 신나고 두근거리는 토론 시간.
정확히는 일방적인 정보 전달 시간이었지만 듣는 사람 리액션이 좋으니 괜히 나까지 신나더라. 기껏 말했는데 그뭔씹이라는 반응이 나오면 슬프잖나. 애초에 게르하르트가 먼저 요청한 거니 그럴 일은 없지만.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크리스티나 양.”
한창 얘기하던 중 크리스티나가 간단한 다과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
석사의 숙명으로 표정이 어두운 건 디폴트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썩 괜찮은지 목소리는 묘하게 밝았다.
‘행복하니 다행이다.’
인간으로서 가진 최소한의 양심이 작동했다. 만약 논문과 쓰레기를 등가교환한 걸 수습하지 못했으면 저 석사는 혀를 깨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 생명을 살렸구나.
솔직히 지금 생활을 때려치우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논문 준비는 잘 돼가고 있습니까?”
“네! 다 감찰관님 덕분입니다!”
“제가 쓰는 것도 아닌데 별 말씀을.”
우렁찬 대답에 픽 웃음을 흘렸다. 멀쩡한 논문을 내다 버린 것도 나고, 새로 논문을 쓰는 건 크리스티나다. 감사의 인사를 듣기에는 많이 민망하다. 제출 기간을 늘려주기는 했지만 그건 마이너스를 제로로 돌린 수준이고.
논문을 다시 쓸 때의 충격과 빡침은 잘 안다. 나도 학사 졸업 논문 정도는 썼으니까. 남들 다 통과하는 그 논문도 문제가 생기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생기는데, 석사 논문은 오죽할까.
“쓰다가 문제가 생기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쇼. 어차피 매일 있을 텐데 다과값이라도 해야죠.”
“하하, 감찰관님은 여기 계시는 걸로도 과분합니다.”
내 말에 게르하르트가 웃으며 답했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은 안 했다. 크리스티나가 나한테 새로운 걸 물어볼수록 튀어나오는 지식이 늘어나니 굳이 만류하고 싶지는 않겠지.
‘다들 이런가?’
학자들의 열정이 다 이런 수준인 건지, 아니면 게르하르트가 유독 뛰어난 건지 모르겠다.
사실 사료가 파멸적으로 부족한 북방 연구에 올인하는 뚝심을 보면 후자 같기는 한데. 자신의 능력을 마이너한 곳에 발휘할 정도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부족할 테니.
‘왜 이런 사람은 행정부에 없지.’
갑자기 깊은 서운함이 몰려왔다. 아카데미 교사도 명목상 공무원이기는 하지만 행정부에서 구르는 관료는 아니다.
이 능력, 이 열정. 제국을 위해 행정부에 봉사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아쉬울 따름이다.
그날 밤, 장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 너 요즘 뭐하고 지내냐?
“예?”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대형 사고가 터졌을 때 ‘너 시발 지금 뭐하고 있냐?’ 같은 말을 종종 들어서 본능적으로 쫄고 말았다.
하지만 긴장을 풀고 다시 생각하니 쪼인트를 까기 위한 발언이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너 정말 뭐하고 지내냐는.
자세히 보니 표정도 순하네. 화가 난 상태는 확실히 아니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늘 요즘만 같으면 좋겠네요.”
– 월급 도둑이라는 말을 편하게 하는구먼. 찔리지는 않냐?
“전혀요. 오늘부터 제 꿈은 도적왕입니다.”
그리고 망할,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굴렀는데. 앞으로 일을 안 해도 제국한테 연금을 받아야 할 수준으로 고생했다고.
장관도 정말 비꼬기 위한 말은 아니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 양반도 월급 루팡이 될 수 있다면 진작에 했을 양반이라.
그렇게 잠시 웃던 장관은 먼저 용건을 꺼냈다.
– 편찬부에 부탁을 했다던데.
“아, 그거 말입니까?”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을 했는가 싶었는데 들은 게 있어서 한 거였다.
공무원 사회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편찬부장은 교육성 장관한테 말하고, 교육성 장관은 장관한테 말했겠지.
딱히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늘 업무로 구르는 일상 속에서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그랬을 거다. 나도 가끔 그랬으니까.
“아카데미에 보조 교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 논문을 늦게 받아달라고 했습니다.”
– 아니 임마, 그래서 그걸 왜 부탁했냐고.
이제 말하려고 하는데 성질도 급하지. 저러다가 가는 것도 빨리 갈 텐데.
평소에 돌연사를 기원하기는 했지만 정말 가버리면 곤란하다. 황태자 그 새끼, 내 위가 비면 바로 올리려고 기회만 노리는 중이라.
“그게 말입니다.”
여하튼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애들이 공부하는 사이에 슬쩍 훈수를 뒀더니 교사가 달려온 스노우볼. 마침 할 일도 없고, 북방에 대한 정보가 널리 퍼지면 좋을 것 같아 조언을 주기로 한 결정.
그리고 말 한 마디로 가녀린 석사를 나락으로 처박은 아카데미에 길이 남을 괴담까지.
“인간적으로 그걸 보고 어떻게 넘어갑니까.”
그 모습을 보고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을 자만 나에게 돌을 던져라.
– 미친놈.
봐라, 장관도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나지막한 탄식만 흘렸다.
그런데 탄식 이후 침묵하던 장관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 보조 교사 이름이 어떻게 되냐?
“크리스티나입니다.”
– 성은?
그건 안 물어봤는데.
원래라면 귀족끼리 통성명을 할 때 성도 말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다. 적어도 어느 가문인지는 알아두는 게 예의 아닌가.
하지만 나와 크리스티나의 첫 만남은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아직도 성을 모른다.
“모르는데요.”
–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자연스럽게 딜을 박은 장관은 턱을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 처조카 같은데?
“…예?”
상상도 못한 정체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어제의 충격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내가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석사가 알고 보니 직속 상관의 처조카?
“역천자가 거느리는 여덟 마리의 준마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몇 안 되는 가아르 부족의 기록이지만, 그 준마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래도 게르하르트가 계속 말을 걸어서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그건 말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킨 겁니다. 역천자의 휘하에서 가장 강력했던 여덟 명을 말한 거죠.”
종이에다가 이름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카간의 휘하에 있던 여덟 마리의 준마, 대충 팔준마라고 부르던 전투머신들.
하나하나 각개격파 한 경우도 있었고, 재수 없게 여럿이 뭉쳐 다니던 걸 겨우겨우 토벌한 적도 있었고, 기어코 살아서 도망친 놈도 있었다.
“팔준마는 차우지드 솔르고 우레, 사레이 도브라 탈라, 우데스르 자이루그, 랑카 아두메 키리타이, 잘라이르 모그 카리알, 모그 티무엔, 오르도 쿠만 일라이…”
카간이 없었다면 각자 자기 영역에서 칸 정도는 칭했을 것 같은 괴물들. 카간에 모든 역량을 쏟아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것들도 견제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지막으로 우데스르 도르곤. 이렇게 여덟입니다.”
팔준마 중 유일하게 생존한 놈. 심지어 카간의 혈육.
거기다 먼 혈육도 아니고 아들이다. 혈통도 능력도 끝판왕이라 카간이 케식의 대장을 맡길 정도였지.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아직도 제국이 북방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다. 하필 가장 골치 아픈 놈이 생존 중이니까.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종이에서 게르하르트로 시선을 돌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신기하긴 하다. 북방에서는 정말 꿈에 나올까 개 같은 이름이었는데, 죽고 나니 누군가가 듣고 좋아하는 이름이 됐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죽어서 보람이 되는 것들.’
제국 학자가 성장하는데 거름이나 되렴.
“정말 감사합니다. 저 혼자였다면 알아내는데 몇 년이 걸렸을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게르하르트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나를 알려주며 바로 감사를 표하고, 두 개를 알려주면 네 번을 인사한다. 예의가 바르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로 예의가 과하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다가 시선을 크리스티나에게로 돌렸다.
– 처조카가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활용성이 적은 학문을 고집한다고 걱정이 많더군.
어제 장관이 했던 말. 크리스티나라는 이름, 보조 교사라는 직업, 활용성이 적은 학문.
이 정도면 알아볼 필요도 없다. 성은 모르지만 성 빼고 다 같으면 정답이지 뭘.
“크리스티나 양?”
“아, 네!”
열심히 무언가 끄적이던 크리스티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부끄럽지만 저희가 제대로 통성명도 못했군요.”
“아, 아…!”
크리스티나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정식 인사는 이게 처음이야.
“크리스티나 아이라스입니다!”
‘맞네.’
맞다. 장관의 부인 되시는 분께서 혼인 전에 쓰셨다던 성이다.
난 장관의 처조카에게 빅엿을 먹였었구나… 그랬구나…
‘미치겠네.’
그리고 이날 이후로 게르하르트와 크리스티나에게 더욱 열정적으로 조언을 주기 시작했다.
솔직히 장관의 인척이면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하필 부인의 조카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 분이 표현이 서툴고 조금 거칠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이에요.”
“물론입니다, 부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감찰부장 같은 부하가 있으니 정말 마음이 놓이네요.”
도대체 어떻게 부부가 됐는지 의문일 정도로 장관의 부인은 좋은 사람이니까.
망할. 이게 이렇게 엮이는 게 말이 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