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69)
요즘 들어 기분이 좋지 못하다. 아니, 정확히는 기쁘면서도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든다.
“마르,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칼이 부회장실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착각 같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확연하게 줄었다.
난 하루 중에서 이 시간만 기다렸는데. 물론 칼이 매일매일 찾아와주는 건 좋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어줬으면 하는데.
“벌써 가는 건가요?”
“네.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칼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서운한 마음에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서 떼를 쓰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할 일이 있다고 하는데 방해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칼.”
칼을 부른 뒤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말없이 칼을 바라보자 칼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를 안아줬다.
응, 이러니까 괜찮네. 마음이 풀려.
‘이대로 있었으면.’
이왕이면 어디 가지 말고 계속 안아줬으면 싶은데.
“미안합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마르와 같이 있고 싶지만 어쩔 수 없군요.”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칼은 귓가에 속삭였다.
제발 안고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으면. 몸이 떨리는 걸 들킬 테니 부끄럽단 말이야.
“괜찮아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다 이해해요.”
애써 떨리는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동안 나와의 시간에 충실했던 칼이다. 갑자기 자리를 벗어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길래 며칠 내내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대체 어딜 가는 거냐고,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는 않았다. 이렇게 대범하게 믿는 모습을 보여야 칼도 감동할 테니까.
– 남편을 관리하는 건 부인의 의무지만, 너무 옭아매서도 안 돼.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정이 떨어질 수도 있단다.
얼마 전에 넷째 언니와 했던 연락. 분명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언니가 맞을 거야.’
부부 사이의 관계가 좋고 자식도 많은 넷째 언니잖아. 틀린 말을 할 리가 없어.
그러니 참고 보냈다. 칼과 함께 할 시간이 길고 긴데, 벌써부터 집착하고 억압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마르와 있으면 답답합니다. 저를 믿어주면 안되는 겁니까?”
칼이 나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하는 걸 상상하니 다시 몸이 떨렸다.
안돼. 그건 절대 안 돼. 칼에게 미움을 받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내일 봐요, 칼.”
최대한 밝게 웃으며 떠나는 칼을 배웅했다.
칼에게 미움을 받을 수 없지만, 난 애초에 칼을 믿으니까. 내가 묻지를 않아서 말하지 않는 거지, 나에게 숨겨야 되는 일을 하는 건 아닐 거라 믿으니까.
…응, 분명 그럴 거야. 나는 칼을 믿어.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칼은 일찍 떠났다.
그래도 누구보다 믿는다.
“아, 이제 갈 때군요.”
다음날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칼을 사랑하고 믿어.
“죄송합니다. 먼저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믿는데…
칼이 부회장실을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손톱을 깨물고 말았다.
‘왜…?’
며칠 정도는 이해했다. 칼도 분명 바쁜 일이, 개인적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1주를 넘어가고 2주를 향해 달려가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대체 무슨 일이지? 칼이 저렇게 바쁘게 움직일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텐데?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상대에게 말하자고, 숨기는 거 없이 사실대로 말하기로 약속했다. 저렇게 바쁠 정도의 일이면 분명 말하고도 남았을 일인데.
‘나한테 말할 수 없는 일?’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한테 숨길 일, 나에게 말하면 안 되는 일.
“헌신은 중요하지. 하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마음을 보내면 상대가 질릴 수도 있어.”
이번에도 넷째 언니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애정을 보이는 건 중요하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좋아하면 상대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심할 수도 있다는 말.
‘정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나한테 질린 건가?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간 건가?
아니야. 우리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야. 분명 칼도 나를 사랑할 거야. 우리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야.
‘…정말로?’
한 번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가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생각들이 이어졌다.
칼은 분명 나에게 솔직하게 말한다고 했다. 더 이상 숨기는 게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지며 웃고 있다.
그렇지만 엄연히 따지면 정식으로 함께 하자는 말을 한 적은 없다. 약혼도, 결혼도 약속을 잡은 적은 없다.
나만 기뻐한 거라는 생각, 칼이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같이 있어줬다는 생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는 생각. 정말 끔찍한 상상이 줄을 이었다.
‘안돼.’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공녀로서 품위 없는 일이지만 칼의 뒤를 밟았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당장 두 눈으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칼의 뒤에 붙어서 미행하는 건 피했다. 칼은 누군가의 기척을 파악하는 것에 능해서 미행했다가는 금방 들킬 테니.
‘아버님도 그랬으니까.’
어릴 때 아버님의 등 뒤로 몰래 다가가면 오히려 아버님이 갑자기 뒤로 돌아 놀래키셨지. 무인들은 전부 감각이 좋은 건가?
아무튼 지나가던 학생들에게 물어가며 칼이 향한 곳을 찾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교사들의 연구실이 모여있는 연구동.
‘뭐지?’
너무 의외의 장소라 눈만 깜빡였다. 사실 칼이 어디에 있든 의외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교사 연구실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신기해서.
일단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연구실을 하나하나 살폈다. 교사가 수업 중이기에 보조 교사만 남았거나, 아니면 보조 교사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는 중인 교사들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연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칼이다.’
칼을 확인하자마자 쪼그려 앉았다. 혹시 칼이 창문을 보면 바로 들킬 테니까.
슬쩍 고개를 들자 ‘역사학 교사 게르하르트’ 라는 팻말이 보였다. 역사학… 여전히 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검술부면 모를까.’
차라리 그쪽이라면 이해했을 거다. 검술부는 에리히 영식이 속한 곳이기도 하니까.
“─니, ───써──?”
“── 감─!”
칼과 역사학의 연관 관계를 생각하는 사이, 연구실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몸을 조금씩 일으켰다.
‘아.’
그리고 남색의 머리를 가진 여성과 웃으며 대화 중인 칼을 볼 수 있었다.
***
게르하르트는 급하게 나갈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웠다. 보통 이러면 연구실에는 침묵만 감도는 편이지만─
“아니, 이 정도 분량을 벌써 쓰신 겁니까?”
“다 감찰관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가 장관의 처조카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일부러 말을 붙이고 있다.
처음에는 크리스티나도 조금 낯설어 했지만 역시 시간이 답이더라. 이제는 게르하르트가 없어도 우리끼리 잘 지낸다.
‘차라리 몰랐으면 상관 없는데.’
무슨 관계인지 알면서도 푸대접했다거나 무신경했다는 말이 나오면 곤란하다. 그러니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야지.
“우데스르 자이루그는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쏘면서도 빗나간 적이 없었죠.
“신기하네요.”
“그런 놈들만 모인 게 팔준마니까요.”
그래도 지식 전달이라는 원래 목적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익숙한 공간이지만 가끔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뭐지.’
부회장실에 들어가자 이유 모를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슬쩍 시선을 돌리자 마르게타는 조용히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칼.”
그리고 서명을 마친 후 나지막한 한 마디.
미소를 짓고 있지만 평소와 달리 억지로 짓고 있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심지어 눈가는 묘하게 붉어졌고.
“저로는 부족한 걸까요?”
“…예?”
예상하지 못한 폭탄 발언을 하고 말았다. 아니, 갑자기 부족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뒤로 혼란한 정신을 부여 잡으며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칼이 저에게 비밀로, 다른 영애와… 만나는 걸…”
마르게타는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목소리가 멀쩡했어도 얼굴을 보면 절대 멀쩡하다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실수했네.’
아무튼 마르게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번에도 내가 머저리 같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고.
확실히 요즘 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고의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일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 같아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거다. 당연히 물어봤으면 설명─
아니지, 물어보기 전에 말하는 게 맞았지.
‘경험이 중요하구나.’
엄청난 실책에 한숨이 나올 뻔했다.
생각해 보면 빙의 전은 물론, 빙의 후에도 정상적인 연애를 한 적이 없다. 헤카테와는 북방에서 구르고 같은 막사에서 지내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알 건 다 아는 사이였으니.
인생 유일한 연애여서 그런지 그걸 기준으로 삼아버렸다. 그건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었는데.
“마르.”
서서히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는 마르게타의 손을 잡았다. 어떤 말로 포장해도 이건 내 실수다.
평소보다 빨리 자리를 떠나면서 무슨 이유인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건 나라도 불안했을 일.
마르게타가 묻지 않아서, 마르게타라면 이해해줄 거라 생각해서 너무 막 나갔다. 속으로 참고 있는 건 줄도 모르고.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그리고 자세히 설명했다. 게르하르트의 요청으로 북방 연구에 대한 조언을 주기로 했고, 보조 교사인 크리스티나는 장관의 처조카라 최대한 친절히 대한 거라고.
물론 미안하다는 사과도 계속 덧붙였다.
“그, 그렇군요. 미안해요. 제가 이상한 오해를 했네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지더니 마르게타가 황급히 수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뭐가 미안할까. 이번 일은 내 잘못이 맞는데. 마르게타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은 것도, 마르게타가 불안해 떨게 한 것도.
‘애초에 믿음이 있었다면.’
작은 어긋남 정도는 기꺼이 웃어 넘길 수 있을 정도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
“저기, 마르?”
그렇다면 그 믿음을 만드는 것이 내 역할 아니겠나.
“내년 신년하례식이 끝나면 말입니다.”
그래도 당장은 무리다. 적어도 신년하례식 이후는 돼야 시간이 생길 테니.
“…철혈공 각하를 뵈러 가도 괜찮겠습니까?”
“넷?”
그 말에 마르게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