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70)
그 사건 이후로 마르게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건이라고 하니 무슨 봉변이 터진 것 같은 어감이네. 그렇다고 그 발언이라고 하면 신문 1면을 장식할 망언을 한 것 같고.
물론 마르게타 입장에서는 한동안 머리를 장악할 1면 소식이기는 하다.
“아버님, 께요?”
쉴새 없이 요동치는 눈,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아까와 달리 슬픔이 아닌 흥분에 가득 찬 신호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저도 마르도 바쁘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신년하례식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 같이 가면 어…”
하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르게타가 갑자기 달려들어 품에 안겼기 때문에.
“고마워요, 고마워요 칼…!”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니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은 상황에서도 마르게타를 마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건 정말 마지막 기력을 쥐어짠 덕분이겠지.
너무나도, 정말 상상한 이상으로 좋아한 모습을 볼 때는 흐뭇함보다는 씁쓸함이 더욱 컸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어디 있겠나.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그 단순한 한마디에 그리 기쁘게 웃을 줄 알았다면 진작에 말할 걸. 스스로에게 자괴감만 생긴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길래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면서 손으로는 얼마나 속이 타고 불안했을까. 심지어 내 과거를 알기에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어차피 결혼은 마르게타.’
예전부터 가졌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결혼을 하기는 한다.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마르게타와 할 것이다.
어차피, 당연히. 내 머리에서는 이미 마르게타가 부인인 것이 확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속내를 마르게타에게 그대로 보인 적이 있었나? 앞으로 솔직해지겠다고 말하면서 무엇도 말하지 않고, 마르게타가 언제든 기다려주겠다는 말에 안심해서 아무 행동도 안 하고.
“연상은 듬직하게 이끌어주는 거야! 자, 이 누나한테 안겨!”
“연상이 연상 같아야 듬직하지.”
이 타이밍에 헤카테의 말이 떠올라버렸다. 그때는 나이를 이상하게 먹은 철없는 연상이라 생각했는데.
‘나도구나.’
이제는 내가 듬직하지 못한 철없는 연상이다. 빙의 전 나이를 합하면 마흔이니 쉰이니 할 것도 없다. 이 육체로도 마르게타보다 세 살이나 위인데.
부끄럽네 이거. 차라리 마르게타가 나보다 누나라면 이런 감정은 안 느꼈겠지.
물론 내가 마르게타보다 동생이었어도 지금처럼 행동하면 개새끼다. 순간 자기합리화 할 뻔했네.
‘신년하례식 이후라.’
자기합리화 가동을 멈추고 침대에 누웠다. 지금은 지나간 실수가 아닌 앞으로 잘할 거를 생각해야 하니.
신년하례식은 이제 세 달도 남지 않았다. 그 시간만 흐르면 드디어 철혈공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
– 공작성으로 오면 반병신으로 만들어주마.
철혈공의 무시무시한 선포… 아, 저렇게 말한 건 아니었나? 그래도 대충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가기 전에는 든든히 먹고 가야겠다. 한 사흘이나 나흘 정도 무릎만 꿇을지 어떻게 알아.
‘가능성 있어.’
현역 시절에는 정말 화끈하고 저돌적이었다고 알려진 철혈공이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은퇴도 하고, 자식들을 늦둥이 딸까지 보며 많이 순해졌지만 언제 매콤했던 본성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것도 다 업보지.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그리고 그날, 철혈공 앞에서 눈물의 그랜절을 하는 꿈을 꾸고 말았다.
길을 가던 중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행복해 보인다는 답을 들을 것 같은 사람이 반겨줬다.
“어서 와요, 칼.”
부회장실 문을 열자마자 마르게타가 밝게 웃으며 반겨줬다. 평소처럼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문 앞에 서있는 모습으로.
“아니, 계속 서있었던 겁니까?”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칼이 오는 게 보였거든요.”
그런 내 물음에 마르게타는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마 다행이네. 혹시 바쁜 사람이 나 때문에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제-”
자리에 앉자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르게타가 양팔을 벌렸다.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기에 끌어안자 마르게타도 내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앞으로는 매일 이렇게 인사하면 안 될까요?”
“얼마든지요.”
귀여운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르게타가 반말로 명령을 해도 무엇이든 들어줘야 하는 입장 아닌가. 이 정도는 부탁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렇게 한참이나 끌어안고 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음도 기대할게요.”
그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오늘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는 것 같아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다음날 근무에 지장이 올 불면에 한숨부터 나왔겠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행복의 결정체였다. 이렇게 밤을 새는 거면 사흘 내내라도 좋아.
‘드디어.’
드디어 칼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아버님을 뵈러 간다는 거면 그거 말고는 없잖아. 분명 허락을 받으러 가는 거야.
보는 눈이 없기에 표정이 녹아내렸다. 히죽히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미 칼의 어머님에게는 허락을 받았다. 아버님도 칼이 사위가 되는 걸 기정사실로 생각 중이시니 거절할 일은 절대 없다.
“그 놈의 눈이 문제가 있는 거다. 어떤 남자가 너를 싫어하겠느냐. 내 장담하마. 아무리 늦어도 3년 후면 스스로 찾아올 거다.”
작년, 칼에게 혼담을 거절당한 뒤 아버님이 했던 말씀. 솔직히 그때는 아버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아버님이 맞았다. 역시 아버님이야. 연륜도 깊고 현명하시니 모르는 게 없으시잖아.
그 3년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가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구애를 한 시기였다는 건 최근에 알았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기다리지?’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지만, 정작 신년하례식 직후라는 날짜가 정해지자 인내심이 떨어졌다.
처음 칼의 과거를 들었을 때 각오했던 10년도 아니다. 심지어 졸업 이후도 아니다. 고작 3개월도 남지 않은 시간인데.
‘진정하자.’
그래, 3개월 정도는 금방이야. 그 3개월 사이에 칼이 말을 바꿀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창 밖을 내다봤다. 슬슬
칼이 올 시간이니까.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칼이 나와 공식적인 관계를 약속했으니 나도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야지.
“행복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단다. 밖에서 돌아오면 먼저 배웅을 나가 맞이해주는 것. 사소하지만 큰 힘이 되는 일이지.”
이번에도 넷째 언니의 조언. 맞는 말 같다. 사람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걸로도 이루어지는 법이니.
“어서 와요, 칼.”
그래서 그런지 칼은 나를 보자 놀라면서도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역시 칼도 이게 좋은 거야. 칼은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는 제도에서 혼자 지냈다고 했잖아. 가족이 이렇게 반겨준 적은 없었겠지.
‘가족.’
그래, 가족이다. 누구보다 가까운 부부라는 이름의 가족.
다시 표정이 녹아내리려는 걸 겨우 참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계속 이럴 것 같아.
“이제-”
걸음을 옮기려는 칼에게 양팔을 벌리자 칼은 거부하지 않고 바로 안아줬다.
가족이니까 이 정도는 매일 해도 되는 거야. 응, 아무 문제없어.
“다음도 기대할게요.”
오늘만 하는 게 아니라 내일도, 그 모레도.
그리고 언젠가는 포옹만 하는 게 아니라…
응, 그 다음도. 그 다음도.
***
요 며칠 동안 마르게타의 애정 표현이 더욱 노골적이게 됐다. 본인은 자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정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지.
고민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야 하나.
‘부담은 아닌데.’
당연히 싫지는 않다. 단지 받는 게 있으면 돌아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적정 수치를 모르겠다.
너무 심심하게 하면 서운해 할 것 같고, 그렇다고 과격하게 하면 기절할 것 같고. 그 사이 중간치는 대체 뭘까.
“감찰관님?”
“아, 예.”
게르하르트의 부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다른 생각을 해버렸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다행히 게르하르트는 내 무례에 언짢아하지 않고 웃으며 대해줬다.
그런데 그렇게 티가 났나. 오래 본 사람도 아니고 게르하르트가 눈치 챌 정도라니. 거의 얼굴에 써있는 수준이겠는데.
“하하, 게르하르트 씨도 그런 것 같군요.”
차마 ‘예쁜 공녀님과의 약혼이 임박했어요!’ 같은 말을 당당히 하기는 민망해서 말을 돌렸더니 게르하르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야 감찰관님을 뵌 이후로 늘 좋죠.”
“그거 참 과분한 말씀입니다.”
“과분하다뇨. 감찰관님 덕분에 저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진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당한 감사 표현이지요.”
그 말에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학생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게르하르트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몹시 당연하게도, 교사가 열심히 하면 그 아래 학생들이 구르는 법이다.
“시험이, 시험이 끝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배운 것들이 쓰레기가 됐어. 내일이면 오늘 배운 게 쓰레기가 되겠지.”
요즘 동아리실에는 부원들의 곡소리만 들렸다. 그거만 봐도 얼마나 굴리는지 대충 알겠더라.
하지만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나.
“앞으로도 감사를 들으려면 더 분발해야겠군요.”
“아하하! 그거 정말 기대됩니다!”
애초에 나는 북방 역사가 널리 퍼졌으면 하는 입장이니까.
힘내라. 원래 학생이 공부로 힘든 건 어쩔 수 없잖아.
미취학보다는 과잉 학습이 낫지, 아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