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71)
학생회실 문을 열자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 반겨줬다. 학생회 간부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모습.
처음 겪는 일은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미안하다. 한창 바쁠 때 방해한 것 같아서 원. 게다가 동시에 일곱 명의 눈빛이 꽂히면 괜히 움찔하게 되니까.
“감찰부장님.”
회의를 방해한 방문자가 나라는 걸 확인한 회장은 빠르게 웃는 얼굴을 만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런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아니, 방해한 내가 더 미안하지.”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이라 말하는 회장을 보니 절로 민망해졌다. 이건 누가 봐도 내 잘못이잖아. 거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오히려 멕이는 것 같다고.
하지만 회장의 표정은 진심인 것 같아 더 무서웠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내가 뺨을 쳐도 ‘제 뺨이 거기 있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감찰부장님이 오신다는 걸 알면서도 모인 게 잘못이죠.”
“맞습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른 간부들도 줄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회장의 발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여섯 명이 하나 된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녀석들은 추천장을 받은 이후부터 이렇게 됐다. 예전에는 나를 무서워하는 느낌이 더 컸다면, 추천장을 뿌린 뒤로는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내가 진로를 책임져 준 입장이니 이해가 가긴 하지만.
‘나였어도 그랬겠지.’
막 대학교를 졸업한 싱싱한 인력을 대학원으로 납치하는 게 아니라 정상적인 직장으로 알선해 주는 교수.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며 찬양할 것 같기는 하다.
‘미안하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작은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이 아이들이 나를 원망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지금이야 시험도 없이 직장에 프리 패스로 꽂아준 영웅으로 보이겠지만, 공무원 생활에 구르고 구르다 보면 지옥에 쑤셔 박은 악마로 보일 거다.
그래도 죄책감은 잠시였다. 얘네는 내가 아니었어도 공무원이 됐을 녀석들이니. 나는 그 과정을 보다 쉽게 만들어줬을 뿐.
‘얻는 건 확실하니까.’
그리고 제국은 공무원을 처절하게 굴리는 것과 비례하는 부와 명예를 준다. 아주 일방적인 착취는 아니지 않나.
단지 그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시발, 나도 재산은 꾸역꾸역 늘어나는데 지출이 없잖아.
“그래도 다들 앉아라. 회의 중이라 바빴을 텐데 할 일은 해야지.”
애써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손을 휘휘 젓자 그제서야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말은 잘 듣는구나.
이유 모를 흡족함에 간부들을 훑어보다가 마르게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나도 마주 웃었다.
원래 마르게타는 보는 눈이 많으면 자제했지만 이제는 누가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
‘멋지네.’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면이 가끔은 존경스럽다. 나는 솔직하지 못해서 빌빌거렸으니까.
“사실 회의가 막 끝나서 말입니다.”
잠시 마르게타와 시선을 교환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자 슬며시 회장이 입을 열었다.
헛소리다. 누가 봐도 회의가 끝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회장이 다른 간부들을 이끌고 나가버렸다.
‘너도 나가면 어떡해.’
넌 여기가 집무실이잖아. 학생회장 없는 학생회실은 대체 뭔데.
우르르 나가는 여섯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 마지막으로 나간 남학생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문을 닫았다.
쟤는 누구더라. 선도부장이었나?
“선도부장이 요즘 칼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슬쩍 알려주는 마르게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도부장 맞네. 아직 기억력이 쓸만한 것 같아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고맙다고? 나한테?
“그렇습니까? 추천장은 전부 써줬는데요.”
선도부장에게만 해줬다면 고마워할 일이 맞지만, 전원에게 뿌리지 않았나. 굳이 선도부장만 언급한 걸 보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딱히 짚이는 건 없다. 내가 간부 개개인과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올리비아가 학생회에 들어왔잖아요.”
그 말까지 듣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원래 선도부장이 올리비아를 선도부에 가입시키려고 꽤 노력했다고 했지.
물론 올리비아는 아멜리아와 원 플러스 원 행사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라 실패했다. 결국 내가 둘을 동시에 집어 넣고 나서야 선도부장은 꿈을 이뤘고.
‘컬렉터구나.’
한 번 찍은 인재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타입.
아카데미에서도 그런 타입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 적당히 높은 직책의 공무원이 되면 부서를 크게 부흥시킬 사람이구나.
“고마워하는 걸 보면 둘 다 잘 지내나 봅니다.”
“그럼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빈곤 자매의 안부를 묻자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순무 갉아먹는 거 볼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저기, 칼.”
“예?”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마르게타가 보였다.
“지금 아무도 없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마르.”
“좋은 아침이에요, 칼.”
그래도 이해하자마자 바로 안아줬으니 괜찮겠지.
아무튼 아침부터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마르게타를 봤으니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딱히 즐겁지 못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다.
– 표정이 왜 그렇소, 감찰부장?
“아닙니다. 잠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통신구를 통해 정보부장의 연락이 왔을 때는 도로 품 속에 집어넣을까 고민했었다. 내가 먼저 요청한 게 아니라 정보부장이 먼저 연락을 준 거라면 보통 일이 아닐테니까.
이상하다, 오늘은 분명 마르게타의 미소라는 버프를 받았는데… 아닌가? 버프를 받든 말든 일이 터지는 건 늘 있던 일이었나?
그런 내 혼란과 별개로 정보부장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 다섯 기둥은 혼란을 수습했소. 다시 비둘기파가 실각할 일은 없을 거요.
“그건 다행이군요.”
일단은 긍정적인 소식이다.
아무리 비둘기파를 몰아낸 매파가 화려하게 자폭했다지만 일단 한 번 실각한 비둘기파다. 갑자기 자기들끼리 책임론을 들이밀며 내분에 빠지거나, 아니면 비둘기도 매도 아닌 새로운 파벌이 부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섯 기둥은 그런 다이나믹한 전개를 이겨내고 부활에 성공했다. 거기다 한 번 거하게 처맞았으니 대외 활동은 자제하겠지.
‘다섯 기둥은 확실히 끝.’
이미 왕족 암살 미수가 들킨 시점에서 다섯 기둥이 아카데미 부수기를 할 가능성은 0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게 있잖아. 이걸로 그 혹시나도 사라졌다.
– 대신 다른 쪽이 시끄럽소.
작게 한숨을 내뱉은 정보부장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기껏 한쪽이 조용해지니 다른 한쪽이 발광을 시작했다. 너무 기뻐서 천국으로 가고 싶은 소식 아닌가.
물론 나도 그렇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어느 쪽입니까?”
– 붉은 파도요.
‘환장하겠네.’
아니었으면 하는 답이 나왔다. 다섯 단체 중 남은 건 제5제국과 붉은 파도. 애초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들이라 그런지 또라이력이 하늘을 찌르는 것들이기는 하다.
그리고 둘 중 누가 더 미쳤냐고 물어보면 백에 아흔아홉은 후자를 고를 거다. 붉은 파도인지 적조인지. 하여간 시뻘건 반동분자들.
“또 개꿈이라도 꿨답니까? 한동안 잠잠하더니.”
– 그러게나 말이오.
이번에는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제5제국도 붉은 파도에 비하면 그나마 상식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붉은 파도는 진짜 광기로 가득한 집단.
애초에 제5제국은 크펠로펜 제국의 뒤를 이어 아르메인이 새로운 제국이 되자는 놈들이다. ‘천명’과 ‘유일 제국’이라는 대륙의 질서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하는 놈들에 불과하다. 그 주장이 현실성 없고 어그로만 만땅이라 문제지.
반면 붉은 파도에게 질서 존중 따위는 없다. 대륙에 퍼진 신분제를 부정하고 군주와 귀족의 푸른 피로 땅을 적시려고 한다. 제5제국도 ‘너 붉은 파도냐?’ 같은 말을 들으면 정색하면서 화를 내지 않을까.
– 감찰부장도 알겠지만 붉은 파도는 점조직이라 소탕이 곤란하오. 기껏 하나를 적발하면 거기서 끝나지.
그나마 그 작은 점들이 우르르 적발돼서 무언가 일어나는 중이라는 걸 파악했다는 게 정보부장의 말.
“정확한 목적은 모르는 겁니까?”
– 짐작되는 것은 있소. 마침 토벌된 지부가 토벌 직전에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군. 운이 좋았지.
확실히 타이밍이 좋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지시 사항은 소각했을 거고. 빨랐다면 지시를 받기도 전에 박살났을 테니.
– 푸른 호수를 만들자, 그게 놈들의 목적이었소.
“푸른 호수요?”
– 아마 황궁이나 행정부, 아니면 아카데미를 노리는 거겠지. 못 배운 것들이 어쭙잖게 비유를 하려고 하니 이 모양이오.
경멸 가득한 정보부장의 말에 무심코 공감하고 말았다. 너무 노골적인 비유기는 했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암호문으로 썼냐고.
‘붉은 파도 아니랄까봐.’
본인들이 붉은 피니 귀족들을 죽이고 죽여 푸른 피로 호수를 만들겠다는 망상. 이 새끼들 파도라 그런지 절대 귀족들을 바다라고 비유하지는 않더라.
아무튼 호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다수의 귀족들이 죽어야 하는데, 그런 장소는 정보부장 말대로 황궁, 제국 행정부, 아카데미. 셋 중 하나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아카데미겠지, 망할.
– 자세한 정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소만, 아무래도 감찰부장이 있는 곳도 후보군이다 보니 미리 말했소.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적당히 몇 마디 안부를 묻다가 연락을 끊었다. 붉은 파도, 붉은 파도라…
1학기는 세번째 영광, 방학은 황혼 교단, 2학기는 붉은 파도.
‘어째 시즌마다 하나씩 오냐.’
물론 지들끼리 자폭한 다섯 기둥은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규칙성 있게 오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변칙적으로 오면 헷갈릴까봐 정직하게 오는 것 같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개 같은 거.
‘이것도 순항이라면 순항인가.’
아무튼 변수가 없긴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