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72)
쿠키를 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당분이 들어가면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고 하지만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배가 차니까 마음이 편안하긴 하더라.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편안함. 역시 루이제의 쿠키는 나만의 인간 사료가 맞는 것 같다.
‘붉은 파도.’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도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다. 이 새끼들은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 번거롭게.
물론 다른 단체들과 약속이라도 했는지 한 시즌에 하나씩 오는 건 다행이다. 만약 두세 곳에서 우르르 왔다면 정신이 아찔했을 테니까.
그래도 개 같은 건 개 같은 거다. 이 반동 놈의 새끼들, 오기만 하면 전부 대가리를 날려버리던가 해야지.
– 현재로서는 아카데미가 유력하오.
그리고 오는 게 맞았다.
정보부장이 붉은 파도에 대해 언급하고 며칠 정도 지난 후, 다시 연락이 왔었다. 황궁과 제국 행정부, 아카데미 중에서 맨 후자가 정답 같다고.
예상한 일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이것들이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면 오히려 당황스러웠을 테니.
– 상대적으로 만만한 곳을 노리는 모양인 것 같은데─
아카데미 보안도 허술한 편은 아니지만 황궁과 제국 행정부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확실히 만만하기는 하지.
– 물론 경비 병력의 질을 말하는 거지,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감찰부장을 말하는 건 아니오.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때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상한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아니, 아카데미가 만만한 건 나도 인정하는데 왜.
그리고 덤덤히 이어지는 말에는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 아카데미 내부에 붉은 파도가 있는 것 같소. 정식 멤버든 아니면 단순 협력이든.
‘돌아버리겠네.’
정보부장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것과 내부에 스파이가 있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게다가 정보부장이 직접 한 말이지 않나. 비록 있는 것 같다, 정도의 발언이었지만 정보부장이 말했다면 분명 있는 거다.
“뭐가 아쉬워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혼자 중얼거렸다. 아카데미 내부라면 교직원, 혹은 학생. 어느 쪽이든 붉은 파도 같은 반동들과 어울릴 정도로 급박한 입장은 아니다.
아카데미 교직원들은 제국 교육계에서도 꽤 알아주는 사람들이다. 명망도 있는 편이고. 학생들은 애초에 푸른 피를 타고 태어났거나, 졸업만 하면 출세 확정인 평민이다.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됐는데 붉은 파도 따위랑?
정보부장이 이상한 정보를 물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아카데미 내부에 프락치를 할 만한 사람도 없다. 제정신이 아닌 이─
‘아.’
깨달음을 얻었다. 애초에 붉은 파도는 미친 새끼들이고, 그런 것들과 손을 잡는다면 정상은 아닐 거다. 내가 너무 보편적인 시야로 생각했네.
편협한 나 자신에게 반성하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괜히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겠는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생각하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 나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내가 어떤 상황이면 붉은 파도와 손을 잡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 파도에 투신했을까.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리 생각해도 대가리에 구멍 여러 개 났을 것 같은 심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미친 놈의 입장을 알기 위해 나 스스로가 미친 놈이 될 수는 없지 않나. 하다못해 평민의 입장으로 생각하기에는 귀족으로 빙의했고.
‘빙의 전에는 서민이었지만.’
그래도 중세 유럽 평민하고 21세기 서민이 같냐. 비교가 불가능하지.
답이 없다. 내가 탐문에 능한 것도 아닌데 내부 스파이를 어떻게 찾아. 그냥 뒤통수 맞을 준비하다가 최대한 덜 아프게 맞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에넨이 그런 나를 안타깝게 생각했는지 작은 도우미를 보냈다.
“어라, 감찰부장님!”
바람 좀 쐬러 나갔다가 누구보다 처절하게 살아온 붉은 피를 보고 말았다.
“올리비아?”
오른팔에 선도부원을 상징하는 완장을 단 올리비아가 손을 세차게 흔들며 달려왔다.
“와! 여기서 다 보네요?”
“그러게. 오랜만이다.”
아멜리아와 올리비아를 학생회에 밀어넣은 뒤로는 딱히 만날 일이 없었다. 애초에 이 녀석들을 만난 것도 대항전 때 우연히 만난 거니까.
그건 그렇고 혼자인 걸 보니까 순찰 중인가?
“일하는 중이었어?”
“아뇨. 아까 끝나서 언니랑 식당에 가던 중이었어요.”
그러고는 주변을 쓱쓱 훑어보더니 헤헤 웃음을 지었다.
“언니가 또 길을 잃었나 봐요.”
누가 봐도 길을 잃은 건 너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잘 먹고 다녀서 행복한 아이한테 무안을 줄 필요가 있을까.
오랜만이라 반가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는 올리비아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굴렸다.
평민, 부모가 일찍 떠난 안타까운 가정, 소녀 가장인 언니, 딸린 식구 많음, 순무 하나를 나눠먹는 빈곤…
‘그림에 그린 듯한 프롤레타리아.’
솔직히 올리비아가 아카데미 학생만 아니었으면 레볼루숑을 외쳤어도 수백 번을 외칠 환경이기는 하다.
황제도 이런 아이가 평등을 외치면 빡침보다는 구휼성을 까는 걸 먼저 택하겠지. 물론 올리비아도 처형하기는 하겠지만.
“저기, 올리비아?”
“넹?”
그렇다고 올리비아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아멜리아도 아니고.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나름의 신념에 미친 놈들은 조금만 대화를 나눠도 티가 나는 법이다.
얘네는 그냥 배가 고파서 슬픈 아이들일 뿐이다. 그런 신념 같은 건 없어.
“혹시 붉은 파도라고 들어봤어?”
원래 이런 거는 돌려 말하는 게 정상이다. 대놓고 말해봤자 ‘그래, 내가 붉은 파도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올리비아는 돌려 말하면 해석을 못할 것 같았다. 애초에 추궁이 아니라 증언을 듣기 위한 거기도 하고.
그리고 예상 외의 반응이 나왔다.
“아, 그거요?”
해맑던 퍼플 리트리버의 표정이 구겨졌다.
“으, 고향에서 엄청 시끄러운 사람들이었어요.”
“그거 골치 아팠겠는데.”
심상치 않은 말이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기서 정색을 하고 자세히 말해보라고 해봤자 올리비아만 긴장할 테니.
“맞아요! 아침부터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고, 자기들하고 함께 해야 한다면서 끌고 가려고 하고!”
적당히 추임새를 넣자 올리비아는 쌓인 게 많았는지 분통을 터뜨렸다.
대충 알 것 같다. 평민, 그중에서도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서 선교라도 했나 보지. 사이비하고 다를 게 뭐냐.
“그래도 언니가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참았어요.”
뜬금없는 말에 잠시 주먹을 쥐었다 피고 말았다. 불쌍한 사람들, 뭔가 알고 있기에 하는 말 같았다.
가능성은 적겠지만 아멜리아가 붉은 파도에 호의적, 아니면 연민을 가지고 있다면…
“망상에 빠져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래요. 지금이 아펠스 시대도 아니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 노력도 안 하고 떠들기만 좋아한다고 하던데요?”
아니구나. 경멸이 가득하네.
괜히 머쓱해졌다. 하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악물고 버티던 아멜리아 아닌가. 아멜리아 입장에서는 입을 털며 혼란만 유도하는 붉은 파도는 쓰레기로 보이겠지.
“그런데 저희 마을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한 아저씨는 그 사람들 좋아하더라고요.”
얼마 뒤에 사라졌지만요, 하고 덧붙인 올리비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탈주한 올리비아는 견주 아멜리아가 나타나 수거했다. 올리비아 앞에 내가 있는 걸 보고 움찔하더라.
“혹시 실례 저지른 거 아니지?”
“별일 없었어. 그냥 붉은 파도 얘기 조금.”
올리비아의 말에 아멜리아의 안색이 시퍼래졌었다. 귀족이자 감찰부장이 평민에게서 공화주의 반동분자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겠지.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자리에서 아멜리아의 충성 맹세 비스무리한 걸 들어야 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난 괜찮은데.
“저는 이상한 신념으로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아요!”
아무튼 올리바아에게 들은 말과 더불어 절박한 아멜리아의 말을 들으니 확신이 섰다.
당연하지만 평민이라고 다 붉은 파도에 호의적인 건 아니다. 지식의 많고 적음도 붉은 파도와 연관은 없다.
‘교직원일 수도 있겠는데.’
오히려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있는 지식인이 더 위험하다. 그런 인간이 붉은 파도에 잘못 빠지면 더 미쳐 날뛸 테니까.
…아니, 생각해 보니 딱히 확신은 아니잖아. 용의자 추정이 아니라 용의자 범위만 더 넓어졌어.
‘망할.’
그래도 편견을 깬 게 어디냐. 이제 전혀 생각하지 못한 놈한테 뒤통수 맞을 일은 없겠네.
그런 안도감을 걸음을 옮기자 품 속의 통신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설마 또 정보부장인가?
– 부장님, 접니다.
“2과장?”
불안감을 가지고 꺼내자마자 외눈박이에서 두눈박이로 복귀한 2과장이 반겨줬다. 이 새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 아, 그게 말입니─
– 비켜요!
– 어억!
입을 열려던 2과장의 턱에 하얀 머리가 직격했다. 주먹도 아닌 머리의 공격에 2과장은 반항도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진짜 제대로 꽂히기는 했어. 장관도 저런 거에 맞으면 휘청거릴 것 같은데.
– 부장님! 잘 지내시죠?
“아니.”
원래는 좋았는데 붉은 파도가 다 망쳤어.
하지만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1과장은 히죽거리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 저런. 그래도 걱정마세요! 곧 기분 좋아지실 거예요!
“뭔데. 장관 각하가 사표 받아줬냐?”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건 나도 알고 1과장도 알고 쓰러진 2과장도 아는 일이다.
– 저 아카데미로 가요!
순간 정신이 나가고 말았다. 뭐라고?
– 아, 저도 같이 갑니다.
막 일어난 2과장도 말했다. 뭐, 라고…?
“개소리 하지 마.”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것들 못 본 사이에 거짓말이 꽤 늘었네.
그래도 상사 놀리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나쁜 짓이야.
나쁜 짓이라고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