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77)
낮에는 감찰부 2과장 라파예트 바론, 밤에는 역사학 보조 교사 찰스 슈타너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부장님 덕분에 역사학 연구실을 탈출한 날부터였다. 원래 이런 경우에는 낮에 위장 신분으로 활동하고, 밤에 탐문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활동 방식이 아니던가.
‘반대.’
놀랍게도 지금은 낮에 구르고 밤에 위장 신분으로 활동하는 기이한 현상이 펼쳐졌다. 이게 맞나? 2과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이런 경험은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야행성 인간들이 많아 위장 활동이 밤에 이루어지는 환락가에서도 낮에 탐문을 진행한 적은 없다.
“저녁 식사 이후에 돌아오시면 돼요. 너무 일찍 오실 필요는 없어요.”
“…예?”
얼마 전, 크리스티나가 했던 말.
그 말을 이해하는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녁 식사 이후에 돌아오라고? 저녁 식사 이전에 퇴근도 아니고?
혹시 후배를 위한 회심의 농담인가─ 싶기도 했지만 생글생글 웃는 표정과 별개로 눈빛이나 표정은 장난기 없이 진지했다. 농담은 아니라는 말.
‘보조 교사는 대체.’
그때를 생각하니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남들 출근할 때는 당연히 출근하고, 남들 퇴근하며 오히려 더 불타오르는 존재들.
물론 제국 관료들도 그런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잦지만, 그만한 부와 명예가 따라온다. 그 부와 명예를 누릴 시간이 부족하지만 아무튼 대가는 있다.
그런데 보조 교사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잘못 골랐어.’
며칠 지내지 않았지만 확신한다. 보조 교사는 위장 신분으로 적합하지 못하다.
그나마 역사학 교사가 부장님에게 신세를 진 것 같아 낮에는 자유롭지만, 그런 인연마저 없었다면 낮에도 연구실에 있었을 거라는 소리 아닌가. 세상에는 이런 끔찍한 직업이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아니, 이런 걸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학계의 어둠은 깊구나.’
하나의 교사가 만들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보조 교사가 죽어나갈지 의문이다.
“찰스 씨.”
2과 공식 활동지침에 보조 교사 위장은 금지할까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에리코 씨.”
업무용 미소를 만들며 뒤를 돌아봤다. 말끔한 차림새의 사내, 아카데미 교직원 중 하나인 에리코 트리안.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이후부터 쭉 만남을 가진 사람. 만난 시간이 길지 않아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안면 정도는 튼 사이.
“우연이군요. 여기서 다시 뵙다니.”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면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
‘미친놈.’
겉으로는 웃음을 유지하며 속으로는 혀를 찼다. 업무만 아니면 절대 상종하지 않을 존재다. 오히려 보자마자 잡아 죽여야지.
내가 뭐가 좋다고 칙칙한 남자와 주기적으로 만나겠는가. 우연? 세상에 우연이 어디 있어, 다 노리고 접촉하는 건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눈 앞의 남자는 우연을 가장하며 만나야 할 상대다. 이번 공작의 목표니까.
‘반동 새끼.’
붉은 파도의 끄나풀.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혐오감을 애써 억눌렀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보이면 이 반동분자가 사라질 수도 있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을 가진, 심지어 아카데미 교직원인 놈이 왜 그딴 사상을 가진 건지. 머리에 칼이라도 맞았나?
‘알게 뭐야.’
당연히 알 필요는 없다. 곧 죽을 새끼한테 사연 따위는 필요 없다. 모든 역적에게는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제국인은 역적의 의미 없는 사연에는 관심 없으니.
“마침 점심 시간이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반동분자에게 웃어 보였다.
***
푸른 피는 무엇이고 붉은 피는 무엇인가.
과거, 최초의 황제가 뮤노 제국을 세울 시기에 처음부터 푸른 피였던 자가 있었는가? 없었다. 뮤노 제국은 붉은 피라 불리던 자들이 모여 당대의 푸른 피들을 굴복시킨 위대한 국가다.
과거, 크펠로펜 제국의 건국에 공헌한 다섯의 1등 공신이 전부 푸른 피였는가? 아니다. 오늘날 공작으로 군림하던 그들의 조상 중에는 붉은 피도 있었다.
과거, 푸른 피라 으스대는 군림층의 업적에 붉은 피의 기여가 없었는가? 그럴 리가. 그들의 승리, 그들의 번영은 모두 붉은 피의 희생에서 나왔다.
‘결국 모두가 붉은 피여야 하거늘.’
격변의 시대에는 고이고 고인 푸른 피가 아닌 붉은 피에서 영웅이 나왔다. 푸른 피의 군림에는 붉은 피의 헌신이 있었다. 푸른 피도 그 기원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붉은 피가 나온다.
헌데 어째서 군림하는 건 여전히 푸른 피요, 붉은 피는 여전히 고개만 조아리고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
푸른 피가 붉은 피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한 것은 없다. 그랬다면 대륙 역사에서 푸른 피 가문은 영원히 푸른 피, 붉은 피는 영원히 붉은 피였겠지.
붉은 피가 위로 올라갔을 때 대륙은 격변을 맞이했다. 그렇기에 푸르고 붉음의 차이를 없애야 한다. 우열을 없애고 동등한 위치에 서야 한다.
설령 그 방식이 급진적이어도, 반드시.
“기회는 보다 넓어야겠지요. 제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이 그저 제자리에만 머무는 것은 손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상에 동의하는 자들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찰스 슈타너라고 했던가. 훌륭한 청년이다. 그래, 다수를 차지하는 붉은 피가 선천적인 낙인에 묶여 그 자리에만 머무는 것은 대륙, 인류의 손해다.
아직은 푸른 피라 불리는 자들의 위선에 속고 있는 단계 같지만.
‘단순히 넓어서는 안된다.’
모든 기회가 퍼져야 한다. 붉은 피를 짓밟고 군림하는 자들이 기만하는 듯 던져주는 먹이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쟁취하고, 우리가 나눠가져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기회가 넓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작금의 현실에 의문을 품고 변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이런 청년은 올바른 길로 인도할 동지가 있다면 충분히 나아갈 수 있다.
“찰스 씨의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체된 사회, 대다수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한계에 묶여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그 동지는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
“아카데미에 있는 자들은 각자의 재능을 개화한 자들. 한 사람이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에리코 씨의 사명입니다.”
나를 붉은 파도로 인도한 동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나의 사명. 태어날 때부터 감겨진 눈을 띄우는 것이 내 피를 흩뿌리며 이뤄야 할 사명.
“제도의 한계, 말입니까?”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 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 제도이니, 미래로 나아가려면 제도를 벗어야지요.”
신분이라는 낡은 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
반동분자는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열변을 토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설마 점심 시간을 꽉 채울 줄은 몰랐는데.
“인상 깊은 말씀이었습니다, 에리코 씨.”
“저야말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눈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수건으로 적당히 닦았다.
‘병신.’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방금 대화로 다시 깨달았다. 저거 병신 맞다.
어떻게 말하는 거 하나하나에 붉은 냄새가 줄줄 풍기는지. 적당히 맞장구 쳐주니까 신나서 떠들고.
‘예나 지금이나.’
옛날부터 붉은 파도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힘든 거지, 위치만 파악하면 누군지 찾아내는 건 간단했다.
언행에서 그 특유의 사상이 보이고, 방금처럼 적당히 찔러주면 술술 내뱉으니까. 이렇게 찾아내기 간단한데 마을 단위로 밀어버린 전대 부장은 뭐하는 새끼인가 싶고.
‘듣기에는 좋지.’
에리코의 말을 적당히 걸러내서 들으면 썩 괜찮은 말이다. 결국 평민들을 평민이라는 이유로 방치하는 건 낭비라는 거 아닌가.
제국도 그걸 알기에 능력 있는 평민은 귀족층으로 편입시킨다. 반대로 너무 무능하고 부패하여 가치가 없다고 판정된 귀족은 가문 단위로 없애버리고.
그런데 그걸로도 부족하다? 아예 푸른 피와 붉은 피의 구분을 없애야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전부 같은 위치, 같은 기회, 같은 권리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전제로 시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평민들에게 무작정 권리만 주면 사회가 멀쩡하겠나.
뭐, 그런 생각이 가능한 머리면 이런 사상에 오염되지도 않았겠지만.
2과장의 보고를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걔네는 어째 발전이 없냐.”
– 그러게나 말입니다.
낡은 제도 탈피니, 새로운 시대니 떠드는 것들이 정작 제일 변화가 없다. 저 새끼들 저거 거의 수십, 수백 년 단위로 떠드는 주장이잖아.
오히려 제국이 붉은 파도보다 변화에 적극적인 편이다. 평민들을 정말 개처럼 취급하던 아펠스를 무너뜨린 크펠로펜이니 나름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
그래서 자유시가 생기고, 시장도 등장하고, 의회도 만들고, 평민도 귀족이 될 수도 있고… 아무튼 그렇다.
– 다른 스파이도 찾는 중입니다만, 현재로서는 에리코 트리안 하나뿐으로 보입니다.
“다행이네. 제국에 미친놈이 적어서.”
– 동감입니다.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몸서리를 치는 2과장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워낙 붉은 파도와 부딪힌 적이 많아서 그런지 간부 중에서도 붉은 파도를 극도로 혐오하는 게 2과장이니까.
‘하나라.’
웃음을 멈추고 턱을 매만졌다. 2과장이 하나라고 하면 하나가 맞을 거다.
정말 다행이지. 제국에 정상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증거 아니냐.
‘당연한 건가.’
붉은 파도는 급진적 사상, 나름 긴 역사와 비례하여 삽질도 많았다. 한때 변두리에서 공화국을 세운 적도 있었지만 푸른 피가 자칭 혁명가들로 변했을 뿐, 딱히 평민들의 처우가 달라지지도 않았고.
그러고도 아직도 공화주의 운운하는 거 보면 신기해.
“수고했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 알겠습니다.
다이나믹한 붉은 파도의 역사를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것들 병신인 거 새삼스레 떠올리면 뭐하겠나. 어차피 다 잡아다 지하실로 보낼 텐데.
‘곧 끝나겠네.’
그래도 가장 골치 아팠던 쁘락치 색출은 성공했으니 이제 편안히 있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