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80)
꿈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본능적으로 볼을 꼬집기 위해 손이 움찔거렸지만 보는 눈이 있기에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움직인 것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눈 앞의 사내는 더욱 움츠러들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건 무슨.’
평소라면 괜찮으니 고개를 들라고, 너무 그럴 필요 없다고 달랬을 거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너무 주눅이 들어있으면 내 마음 깊숙한 곳의 장유유서가 통곡하기 때문에.
물론 선량한 연장자에 한해서 발동되는 장유유서다. 선량하지 못한 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붉은 파도라고?”
그래, 눈 앞의 반동분자는 예외다.
“예, 예. 붉은 파도 중급 간부, 로빈이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숙여지나 과시라도 하는 건지 더더욱 고개를 숙이는 모습.
그 모습에 헛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다시 들어도 어이가 없네.
‘중급 간부라.’
간부. 그중에서도 중급이면 붉은 파도 내에서도 고위직에 속한다. 단 한 명인 단장, 그리고 단장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소수의 상급 간부를 제외하면 가장 윗쪽에 위치한 존재.
다르게 말하면 진짜배기 공화주의 반동분자라는 건데, 그런 인물이 자진 투항이라고?
‘기만책인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숙소 방문, 갑작스러운 양심 선언. 너무 뜬금없고 긍정적인 일이라 절로 의심이 든다.
내 운은 내가 잘 안다. 나한테 이런 행운이 올 리가 없어. 찾은 스파이가 도망친다면 모를까, 인지하지도 못한 스파이가 스스로 찾아오다니.
‘기만치고는 허술한데.’
하지만 기만책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다. 이것들은 신념에 눈이 뒤집혀서 자폭 공격도 서슴치 않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항복을 한 역사가 없는 것들.
그런데 갑자기 중급 간부가 투항? 투항을 받는 나도 의심과 의문으로 가득한데 기만이 통하겠나.
“역도가 투항이라.”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속셈을 모르겠다면 털어놓게 하면 그만이다. 기만이든 진심이든 이 반동분자가 내 숙소에 제 발로 들어왔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천명을 거역한 자에게 돌아올 곳이 있겠나.”
심문은 특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쪼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감찰부장이라는 명함이 압박하는 데는 최고더라고.
***
“천명을 거역한 자에게 돌아올 곳이 있겠나.”
감찰부장의 말에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간단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말이다. 반역자의 투항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선언.
‘빌어먹을.’
제국은 투항자에게 관대하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황제의 품에 안기면 기꺼이 용서한다. 그것이 제국이 내세우는 기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그 기치가 통할까?
‘감찰부장의 의지에 달렸다.’
현재 현장의 책임자는 감찰부장. 그러니 제국은 감찰부장의 보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감찰부장이 투항자를 받든 죽이든, 결국 감찰부장이 어떻게 보고하느냐에 달렸다는 말.
여기서 나를 죽여도 ‘역도가 반항하여 사살’ 이라는 보고를 올리면 제국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붉은 파도가 투항을 거부하고 죽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에.
게다가 그 감찰부다. 붉은 파도를 개잡듯이 두들겨 팬 것은 언제나 감찰부였다. 비록 지금 부장은 붉은 파도 토벌에 나선 적이 없지만, 결국 같은 감찰부 아닌가.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붉은 파도에 적대감이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나은 선택지가 이거라니.’
이 미친 상황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다. 죽을 가능성이 높은 항복, 이딴 선택지가 최선이다.
그래도 도망쳐서 잡혀 죽거나, 가만히 있다가 목이 잘려 죽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적어도 입을 열 시간은 있지 않나. 내가 가진 패를 전부 보일 시간은 있으니까.
‘내 업보지.’
애초에 이 미치광이 집단에 가입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진심으로 제 선택을 후회하고 폐하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글쎄, 말로는 누구나 충신이지.”
심드렁한 대답이지만 예상한 답변이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설득될 리가 있겠나.
“물론 제 죄를 혓바닥으로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혓바닥으로 피할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떻게든 알고 있는 것들, 동정을 받을 것들을 전부 팔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다행히 난 인명 피해를 일으킨 전적도 없다. 거의 후방에서 작업하거나 감시 역할만 맡았지.
“미숙하고 어리석어 반역자들의 말에 홀렸지만, 뒤늦게 옳은 길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 정말 처절할 정도로 입을 놀렸다. 말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내 목도 같이 끊긴다는 각오로.
내가 죄인이다, 머저리에 못 배운 놈이라 잠시 홀렸다, 그래도 선량한 제국인을 해친 적은 없다, 나름 중급 간부라 아는 정보도 많다 등등.
“붉은 파도의 간부가 아닌 아카데미의 경비로서 지내온 삶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내 세월을 쓰레기처럼 취급하며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쓰레기가 맞기도 했고.
그리고 그 말에 감찰부장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
정말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간부… 이름이 뭐였더라, 로빈이었나? 아무튼 반동분자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몇 번 찌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 내뱉는 중이니 더 건드릴 것도 없어서.
예상대로 감찰부장이라는 명함이 맹활약했지만, 동시에 너무 효과가 좋아 조금은 씁쓸했다. 내 악명은 정말 엄청나구나…
“붉은 파도의 간부가 아닌 아카데미의 경비로서 지내온 삶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말에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됐다.
‘이 새끼였네.’
원작에서 붉은 파도가 아카데미 부수기를 할 때 내부에서 호응했을 놈. 에리코인가 뭔가 하는 놈이 아니라 이쪽이 메인이었다.
중급 간부라는 직책, 경비라는 위장 신분. 주인공의 위기를 만들기에 딱이지 않나.
‘위험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으니 안도감과 아찔함이 동시에 솟구쳤다. 이거 여차했으면 제대로 망할 뻔했다.
이 로빈이라는 간부는 2과장도 찾지 못할 정도로 숨 죽이고 있었다. 스파이가 에리코라는 놈만 있는 줄 알고 방심했다면 결정적인 타이밍에 결정적인 통수를 맞았겠지.
‘원작은 대체.’
이쯤 되면 원작 아카데미의 상태가 우려스러울 정도다. 다섯 단체에게 노려지는 것도 눈물 나오는데, 경비는 공화주의 스파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곳이냐.
이거 연재를 하면 할수록 모가지가 날라가는 인물들이 제법 많았을 것 같다. 어쩌면 교장도 갈렸을지 모르겠네.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
무언가 더 말하려는 로빈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말은 다 들었으니 이제 됐어.
하지만 내 반응을 사형 선고라고 생각했는지 로빈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사실 경비 얘기를 듣기 전에는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진짜 투항이다.’
확신이 섰다. 이건 기만책이나 그런 게 아니라 런각을 잡은 간부의 대탈주라고.
우리를 엿 먹이려면 가짜 항복을 하는 것보다 쭉 입 다물고 있다가 통수를 치는 게 더 효과적이다. 그 방법을 포기하고 달려온 거면 투항 맞지.
원작에서는 맹활약 했을 것 같은 놈이 왜 갑자기 투항을 하나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다섯 기둥은 매파의 화려한 자폭으로 주저 앉았다. 이번에도 그런 케이스인가 보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게 늦었지만,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내 말에 로빈의 안색이 밝아졌다. 죄를 지은 것도, 회개한 것도 전부 인정하겠다는 소리니.
그래, 애초에 붉은 파도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도중에 탈주하는 게 어디냐. 다른 놈들은 죽는 순간까지 공화주의를 외치고 죽는 판국인데.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이 진심이라면 따라와라.”
“아, 예!”
대신 마지막 확인은 해야지.
심문은 내 특기가 아니다. 로빈의 투항이 진심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나.
그래서 이 분야 전문가에게 넘겼다.
“붉은 파도 특유의 광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투항은 진심인 것 같습니다.”
다른 스파이를 발견했다는 말에 2과장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본인이 직접 나섰는데도 찾지 못했다는 것에 꼭지가 돈 것 같았다.
그 반작용으로 2과장은 로빈을 영혼까지 털었고, 덕분에 다른 수작이 아닌 진심 투항이라는 걸 재확인 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교차 검증까지 해야 일이 끝난 거지.
“와, 하나 더 있을 줄은 몰랐어요.”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1과장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신기하다. 아카데미에 붉은 파도가 둘이나 심어져 있다는 게 놀랍고, 2과장이 놓쳤다는 것에 더 놀랍고. 쟤가 일을 허술하게 하는 애는 아닌데.
“더 있는 거 아니지?”
슬쩍 묻자 2과장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없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로빈에게 시선을 돌리자 2과장의 눈총을 받은 로빈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없습니다! 아카데미에 있는 건 저와 에리코뿐입니다!”
그 처절한 모습에 조용히 시선을 돌릴 뻔했다. 분명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왜 저리 절박해보일까. 정말 신기하네…
“에리코 따위와 달리 수뇌부와 직접 연결된 거물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2과장은 로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거물이기는 하지. 애초에 간부를 사살한 적은 있어도 생포한 건 처음이니까.
“역정보를 풀기에 충분할 정도로요.”
유일하게 생포─ 정확히는 투항한 간부가 중급 간부인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수뇌부에게서 일방적인 지시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쌍방 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인물.
그러니 붉은 파도가 오는 걸 하염없이 기다릴 필요는 사라졌다. 2과장 말처럼 로빈을 통해 역정보를 풀고 유인하면 될 일.
“이제 끝낼 수 있겠어.”
유인하면 뚝배기를 부술 묵광대도 대기 중이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도 이제 끝.
“네가 먼저 찾았다면 더 빨리 끝났을 텐데.”
“망할.”
치를 떠는 2과장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2과장을 조리돌림 할 일이 생겼다는 것도 기쁜 일이니.
적어도 3개월은 써먹을 수 있는 안건이다. 차장한테도 말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