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81)
태초에 대륙이 만들어질 때, 그곳에 높고 낮음은 없었다.
대륙 위에 인간이 만들어질 때, 부리는 자와 부려지는 자는 없었다.
인간들의 제국이 만들어질 때, 첫 번째 황제는 붉은 피라 불리는 평민이었다.
그렇기에 붉음이 세상의 중심이다. 지금은 변종이 주도하는 혼돈이며, 푸름이라는 변종이 붉음을 억누르는 것에 불과하다.
언젠가 붉음이 몸을 일으키리라. 세상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리라.
– 적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걸음을 내딛을 때가 왔다.
“확실합니까?”
– 예, 단장.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는 깊은 확신이 담겨있었다. 마치 지금이 아니라면 뒤가 없다는 것처럼.
중급 간부 로빈. 몇 년 전부터 아카데미에 잠입하고 있던 요원, 올바른 사상을 퍼뜨리는 에리코 동지를 지원하는 동지.
그런 로빈 동지의 말이라면 확실할 거다. 지금까지 신중한 모습을 보였던 로빈 동지니까. 다른 상급 간부나 중급 간부의 아카데미 습격 제안을 지금까지 반대한 사람이기도 하니.
– 반 대항전 이후에는 큰 행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경비를 집중시킬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 집중된 전력이 느슨하게 풀려 잠입에 용이해진다는 이야기. 설득력이 있는 말이기에 조용히 경청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것이지, 아카데미 경비 자체는 삼엄하다. 그러나 평소보다 줄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아카데미 경비에 완전한 공백이 생기면 편하겠지. 하지만 그런 요행만을 기다리면 파도를 일으킬 수 없다.
– 그리고 당분간 서문 경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역시 로빈 동지입니다. 대단하군요.”
고무적인 소식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로빈 동지를 아카데미에 잠입시킨 것은 무리한 도박이었다. 중요한 간부를 적진에 맨 몸으로 보내는 것이기도 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잠입 기간 동안 로빈 동지의 두뇌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니.
그러나 그 도박은 성공했다. 아카데미로 향할 길이 열렸다.
– 몸을 숨기기 좋은 경로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도를 들어 올린 로빈 동지는 우리의 아지트에서부터 아카데미 서문에 이르는 루트를 하나하나 짚었다.
‘훌륭해.’
철저한 준비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상황이나 규모에 따라 변동을 주기는 해야겠지만, 이렇게 틀이 잡혀있으면 활동에 용이하니까.
– 이 숲에서 최종적으로 정비하면 될 겁니다.
한참을 설명하던 로빈 동지는 아카데미 인근의 숲을 짚었다.
확실히 괜찮은 위치다. 적당한 넓이라 동지들이 정비를 하기에도, 곧바로 아카데미를 습격하기에도 최적인 장소.
“수고했습니다, 로빈 동지. 동지 덕에 대의에 가까워질 수 있겠군요.”
– 과분한 말씀입니다.
겸허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만족스러웠다.
이런 동지들이 이상을 함께 한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증거요, 하늘이 택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다음에는 통신구가 아니라 직접 보도록 하죠.”
– 예, 단장. 기다리겠습니다.
다음에 볼 때는 이런 연락으로 볼 필요가 없다. 직접 아카데미로 찾아가, 직접 로빈 동지를 치하하리라.
“붉은 파도가 대지를 적실 때까지.”
통신을 끊기 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동지들의 의욕을 고취시키며 대의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구호.
– 붉은 파도가 대지를 적실 때까지.
로빈 동지도 가슴이 벅찬지 얼굴이 붉어졌다.
***
구호 촌스럽네. 누가 만든 거야 저거.
“대제의 광명이 함께하기를.”
순간 제국의 공식 구호가 떠올랐다. 우리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구나.
“끝났습니다.”
통신구를 들고 있던 로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붉어진 얼굴은 애써 못 본 척해줬다. 나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딴 구호를 말했다면 창피했겠지.
창피와 긴장으로 가득한 로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원 따봉을 날려줬다. 그러자 빠르게 밝아지는 얼굴.
어지간히 긴장했구나. 그럴 만한 상황이었기에 이해한다.
‘이중 스파이는 아무나 못하지.’
사실 그냥 스파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중 스파이는 말할 것도 없다.
평범한 스파이로도 힘든데 무려 이중이다. 고생이 두 배, 부담도 두 배. 딱히 부럽지 않은 두 배 이벤트다.
“단장이 직접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장이 움직이면 상급 간부들은 무조건 붙게 됩니다.”
“좋은 기회로군.”
최상의 결과다. 혹시 적당히 간부 하나만 던지고 본인은 잠수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실로 용맹하게도 우르르 온다고 한다.
‘병신.’
도박을 하면 판돈을 올인할 놈이네. 용맹과 만용은 종이 하나 차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단장과 상급 간부를 싸그리 잡으며 그 아래는 알 거 없다. 사단장과 연대장이 죽었는데 대대장 몇 남는다고 문제가 되겠나.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어.”
지도로 시선을 돌리자 로빈이 재빨리 지도를 펼치고 내 쪽으로 돌렸다.
완전히 이쪽으로 투항한 놈이라 생각하니 이제는 안쓰럽다. 머리 회전도 괜찮고 빠릿빠릿한 놈이다. 공무원 생활을 했으면 제법 잘했을 놈인데 왜 하필 첫 단추를.
“아카데미 구경도 못하고 죽겠네요.”
“그렇겠지.”
로빈을 향한 동정이 차오르는 사이, 같이 지도로 시선을 돌린 1과장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지도, 정확히는 로빈이 마지막으로 짚었던 숲을 바라봤다. 만약 저 숲을 뚫고 아카데미에 도달할 놈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신기하겠네.
“저기를 뚫을 능력이면 인정해야지.”
이름도 없는 숲, 동시에 묵광대가 실시간 주둔 중인 마경.
숲 속에서 묵광대의 습격을 뚫고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인정해야 한다. 그런 능력으로 역적이나 하는 게 괘씸하지만, 적어도 박수를 쳐 줄 생각은 있다.
그 뒤에는 추격해서 죽이겠지만.
“가자.”
1과장의 등을 툭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4과장이라면 붉은 파도가 갑자기 나타나도 잘 처리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알려주는 게 도리 아니겠나.
“오늘도요…?”
그러자 1과장은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통신구로 말해도 되잖아요.”
“그럼 먹을 걸 못 주잖아.”
어차피 배달하러 가는 길에 말하는 거지 뭘.
***
묵광대 부대장이 아닌 4과의 수석 팀장으로 지내던 시절, 부장님이 말씀하시던 게 있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도 있고, 나쁜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이어서 오더라고.”
옳다. 부장님이 하는 말씀은 언제나 옳다.
전쟁으로, 혹은 선천적인 빈곤으로 밑바닥을 구르던 우리는 그보다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부장님이 그런 우리를 거두시어 새로운 인생을 받았다.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덮은 대표적인 사례.
하지만 좋은 일 뒤에 나쁜 일도 찾아오더라. 우리는 4과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특무성으로 이전됐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신 분과 떨어지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래도 버텼다. 다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 부장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데 갑자기 이 생각이 왜 나는 거더라.
“자, 오늘도 가져왔어.”
“감사합니다, 부장님.”
저 앞에서 대장이 부장님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 깨달았다.
아, 저거 때문이었지.
“오늘도 쌓이겠군요.”
“저렇게 큰 건 안 들어가는데.”
옆에서 속닥거리는 대원들의 대화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부장님은 우리가 숲에서 주둔을 시작하자마자 매일 같이 찾아오셨다.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 심지어 우리가 대접해야 마땅하거늘, 부장님은 매번 양손 가득히 오셨다.
그래, 매번. 양손. 가득히.
“너네 작전 중에는 식사도 대충하잖아. 이거라도 먹어.”
부장님 말씀대로 작전 중에는 식사를 적당히 때우는 편이다. 너무 배가 부르면 활동에 지장이 생기기에 어쩔 수 없는 일.
작전을 너무 많이 뛰어서 이제는 소식이 습관이 되었지만, 어찌 부장님의 하사품을 거부할 수 있을까.
“많군요.”
“아껴 먹으면 며칠은 먹겠는데요?”
“부장님이 주신 거니 남기지 말고 먹어라.”
며칠 정도의 분량이지만 남겼다가 상하면 아깝다. 그러니 그날 하루만큼은 위장 용량을 초과해서 먹었는데─
“오늘 거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건 그 다음날부터였다.
적게 먹던 녀석들이 하루만 위장을 개방해서 겨우 다 먹었다. 그런데 그것과 같은 양이 다시 왔다.
“…….”
“…어쩌죠?”
가득 쌓인 음식을 둘러싸고 진지한 논의가 발생했다. 하루면 모를까 이틀 연속으로 이만한 양을 먹는 건 무리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면 사흘, 나흘로 이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남겨? 감히 부장님의 하사품을 방치하라고?
그러면 거절해? 어느 건방진 놈이 부장님에게 그런 말을 해.
“먹어라.”
결국 답은 하나였다. 대장을 시작으로 하나 둘 자리에 주저앉아 부장님의 넘치는 사랑에 목이 메여야 했다.
그렇게 다음날─
“다들 잘 먹네. 부족하진 않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다음날─
“부족한 것 같아서 오늘은 더 가져왔어.”
“감사합니다.”
우리의 한계는 나흘 정도라는 걸 깨달았다.
“…더 먹을 사람?”
“부대장님이 모범을 보이시는 게…”
악으로 먹던 대원들도 하나 둘 조용히 시선을 돌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장조차 아무 말도 못하더라.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이던 대장도 이제는 최대한 천천히 씹어 삼켰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부장님을 도울 수 있어서 좋다. 너무나도 좋다. 하지만 이 시련은 딱히 좋지 못하다.
그리고 에넨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조만간 올 것 같아.”
그 소리에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부장님에게 꽂혔다.
“단장과 상급 간부가 포함된 인원이니, 전부 처리하면 돼. 이왕이면 생포하고.”
죽여도 되니까 놓치지만 말라고 덧붙이셨지만, 솔직히 그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붉은 파도가 온다. 그것들을 잡으면 임무가 끝난다. 그러면 애석하게도 부장님과 떨어지지만, 그래도 소화를 시킬 시간을 얻을 수 있다.
‘개 같은 놈들.’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것들 때문이다. 괜히 부장님이 계시는 곳을 노려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분노가 치솟는다. 겪지 않아도 될 시련을 겪게 한 역적들이 증오스럽다. 아마 다른 대원들도 같은 생각이겠지.
전부 잡아서 1과장님에게 넘긴다. 개새끼들, 어디 불지옥맛 좀 보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