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82)
아카데미에 있던 붉은 파도의 끄나풀을 적발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중급 간부라는 거물이 스스로 투항했다. 꽁꽁 숨어있던 붉은 파도의 수뇌부에게 역정보를 흘려 사지로 유도했다. 사지에는 묵광대가 칼을 갈며 역적들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
완벽하다. 에넨이 붉은 파도에게 약점을 잡힌 게 아닌 이상 이런 준비를 갖추고도 토벌에 실패할 수는 없다.
‘준비만전.’
어쩐지 준비만전이라는 말이 불안한 플래그 같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불안감에 불과했다.
“잡았다고?”
– 예. 단장 포함 13명 생포, 24명을 사살했습니다. 도주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일이 끝났으니까.
‘이게 뭐야.’
슬슬 자려고 침대에 몸을 눕히니 갑자기 통신구가 발광하더라. 무슨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4과장이었다.
그리고 4과장의 보고에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결과는 좋지만 과정은 기이하기 짝이 없는 토벌 작전.
‘이번에도…’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못했다. 단순히 뒤에서 지휘를 하느라 개입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정말 온 줄도 모르고 놀고 있다가 보고만 듣게 됐다.
내가 꿈꾸던 월급 루팡의 상황이지만 막상 겪으니 기분이 묘하다. 이건 날로 먹은 수준을 넘어서 무능한 것 같잖아. 근처에 역적이 나타났는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이틀 후로 알고 있었는데.”
착잡함과 자괴감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붉은 파도가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건 이틀 후다. 분명 로빈이 그때로 유도하겠다고 했으니 확실하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아니면 내가 너무 마음을 놓고 있어서 이틀이 지난 것도 모르고 있었나?
그래도 그런 경우면 내가 무능한 거니 책임지고 사퇴하면 될 일이다. 최악의 가정은 로빈이 우리도 속인 삼중 스파이라는 것.
– 아직 확인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수뇌부의 독단 같습니다.
“아.”
그 말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냥 로빈에게도 말하지 않고 들이박았다는 거네.
‘미친 건가.’
현장 책임자와 소통하지도 않고 강행한다고? 보통 머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붉은 파도 단장까지 하는 놈이 정상일 리는 없지만.
“금방 갈게. 자세한 건 직접 봐야겠어.”
– 예, 부장님.
고개를 숙이는 4과장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다.
아직도 당황스럽다. 쉽게 끝낼 수 있는 요소가 겹겹이 쌓여서 금방 끝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광속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궁극기 쿨타임도 채우고, 강화 포션도 도핑하고 보스룸에 입장했더니 대화 이벤트만 뜨고 끝난 기분. 편한데 허무해. 뭐야 이게.
“야.”
– …으응? 부장니임?
급하게 1과장에게 연락을 걸자 자고 있었는지 비몽사몽한 모습으로 받았다.
“붉은 파도 잡았다. 너만 가면 돼.”
반쯤 감긴 1과장의 눈이 보름달이 되는 건 두 마디로 충분했다.
단장과 상급 간부의 얼굴을 확인할 로빈, 게르하르트의 연구실에서 골골거리던 2과장까지 붙들고 숲으로 갔다. 왜 이런 늦은 밤에도 연구실에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부장님.”
“어, 수고 많다.”
숲에 가까워지자 경비를 서던 묵광대원이 반겨줬다.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지나가자 옆에 있던 1과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멀쩡하네요. 일방적으로 팼나 봐요.”
“그러게.”
방금 지나친 묵광대원은 복장도 표정도 멀쩡하기 그지 없었다. 경비를 맡아야 하니 일부러 그런 사람을 보낸 걸 수도 있지만, 고전을 했거나 인명 피해가 났으면 저렇게 평온하지는 못했겠지.
1과장의 말처럼 붉은 파도가 꿈틀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것 같다. 그러게 왜 이틀이나 빨리 기어와서.
“망할 놈들. 이틀 후라고 해서 자료 정리 중이었는데.”
2과장의 한이 서린 중얼거림은 애써 못 들은 척 했다. 얘는 그 사이에 대학원생 다 됐어.
삽질을 거듭한 붉은 파도지만 그래도 과장 하나 멘탈은 박살냈구나. 2과장하고 붉은 파도는 상성이 안 좋은 건가.
“부장님, 저기요.”
1과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한쪽에 쌓인 시선,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려진 인원들이 보였다.
4과장이 말한 것처럼 13명. 저것들이네.
“아, 부장님.”
“부장님 오셨다. 기립.”
1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묵광대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자리에 앉아서 쉬고 있던 애들까지 일어나려고 하기에 손을 휘저으며 도로 앉혔다. 월급 루팡이 받기에는 너무 과분한 접대라 부끄러워.
“페넬리아!”
4과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1과장이 먼저 쪼르르 달려갔다.
“와, 많이 잡았네?”
물론 매일 보는 친구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새로운 장난감에 대한 기쁨의 표시였지만.
“생각보다 많이 죽었다. 이 정도도 괜찮나?”
“충분해! 다섯 아래만 아니면 돼!”
그 말에 문득 붉은 파도로 추정되는 인원들에게 눈길이 갔다. 다섯보다 2.6배인 수치. 1과장의 즐거움도 2.6배.
“부장님.”
1과장이 들러붙은 상태로 다가온 4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뭔 예티와 페페도 아니고 저렇게 붙어있어.
4과장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진 걸 보면 불편한 것 같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매몰차게 떼내지는 않더라. 마음씨도 좋지.
“수고 많았어. 나도 도왔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부장님이 주신 정보 덕분에 수월히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더 민망해졌다. 사실 그 정보도 로빈이 자진 투항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거라.
어색하게 미소로 화답하고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것들 맞아?”
“아, 예. 맞습니다.”
그리 말하는 로빈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보였다. 옛 동료들을 팔았다는 죄책감? 그딴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감정은 아니다.
‘얘도 의문이겠지.’
이 새끼들은 왜 여기 있냐, 라는 표정. 이것들은 이 시간에 여기 있으면 안된다. 분명 이틀 후에 들어오라고 유도했는데 왜 지금 오냐고.
덕분에 내가 붉은 파도가 잡혔다는 말을 했을 때는 얼굴이 창백해졌었지. 졸지에 삼중 스파이를 의심 받게 될 상황에 처했으니까.
솔직히 붉은 파도가 로빈의 배신을 눈치챘나 싶었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의 틈을 노리고, 겸사겸사 우리가 로빈을 죽이는 걸 노린 게 아니었나 싶었지만─
“──!”
재갈을 입에 문 채 발악하는 붉은 파도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것들 모르고 돌격했네.
…그럼 더 이상한데. 배신자인 것도 모르면서 이딴 짓을 했다고?
‘뭐하는 것들이지 진짜.’
아무리 정상인의 마인드로 이해할 수 없는 게 역적이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 ──!!”
“풀어줘.”
“예.”
4과장의 대답과 함께 근처에 있던 묵광대원이 달려가 한 놈의 재갈을 풀어줬다.
“로─!”
– 퍼억!
무언가 소리를 치려던 붉은 파도는 재갈이 풀리자마자 날아오는 묵광대원의 주먹에 강제로 캔슬당하고 말았다.
역시 묵광대다. 사소한 거에도 눈치가 빨라서 좋아. 이런 사소한 걸로도 업무에 찌든 부장은 기분이 좋아진다.
“단장이 누구야?”
“방금 맞은 놈입니다.”
로빈의 대답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딱 좋네.
만족감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니 묵광대원은 다른 붉은 파도들의 재갈도 풀기 시작했다. 아까 입을 열자마자 처맞은 것을 봐서 그런지 이번에는 아무 소란 없이 조용했다.
***
그루터기에 앉아 부장님이 붉은 파도를 달달 볶는 걸 구경했다.
“2과장님은 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 사이 묵광대원 하나가 수통을 건네며 말했다. 마침 목 말랐는데.
“저 사이에 껴서 뭐해. 1과장이 할 일인데.”
수통을 받고 대답했다. 나는 일이 터지기 전에 움직이는 편이지, 터진 후에는 1과장의 몫이다.
4과장은 뭐, 부장님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성격이니까.
“어차피 죽을 것들이 빨리 죽으려고 기어 들어왔네.”
“혹시 정보가 새는 걸 우려해서 조기에 움직였다고 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는 말에 묵광대원이 답해줬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이다. 정말 중요한 작전이면 공식 서류와 비공식 서류를 따로 작성하기도 하고, 아주 극소수 책임자에게만 진짜 임무를 알리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현장 책임자가 내부에서 호응해야 하는 작전인데 현장 책임자도 모르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되다 만 것들.’
붉은 파도를 상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무언가 머리를 굴리고 나름의 신념도 있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어긋난다.
애초에 그런 것들이니 정당히 출세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 망상에 몰두하는 거겠지만.
‘머저리들.’
나도 붉은 피 출신이다. 붉은 피인 내가 푸른 피에 편입된 것은 아버지가 작위를 받으셨기 때문. 심지어 내가 태어난 이후의 일이다.
붉은 피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목격한 입장에서 붉은 파도가 곱게 보일 수 없다. 오히려 저것들 때문에 제국이 붉은 피에 엄격해지면 어쩌려고.
“생각보다─”
“개새끼가!”
– 뻐억!
“많이 죽었…?”
포로와 시신의 숫자를 비교하다가 고성과 함께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부장님이 눈 앞의 포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 모습. 포로는 머리가 사라져 ㅗ로가 되어 있었고, 1과장과 4과장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세번째 영광이 부장님 앞에서 북방 얘기 꺼냈어요. 심지어 6검 분들 얘기.”
순간 세번째 영광 토벌 이후, 1과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지?
아닐 거야, 설마. 제발 아니라고 해.
***
적당히 임시 신문을 시작했지만 붉은 파도는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은 잘 열었지만, 영양가 있는 정보를 뱉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들.
‘그냥 다 죽일까.’
어차피 단장도 상급 간부도 전부 이 자리에 있다. 전부 죽이기만 해도 점조직으로 운영되던 붉은 파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작전 중 사살도 아니고, 생포한 포로를 임의로 죽이는 건 곤란하다. 어차피 생포했다면 최대한 써먹는 것이 제국의 기조니까.
저번에 4과장이 시체 대장을 죽인 것도 적당히 무마하느라 골치 아팠는데 또 그럴 수는 없지.
“그대도 지금의 제도가 불만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붉은 파도의 단장… 귀찮으니 우두머리가 말을 걸었다.
불만이지 않냐고? 공무원을 개처럼 굴리는 사태는 불만이기는 한데.
“나는 알고 있다. 그대 역시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동지라는 걸.”
“무슨 개소리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왜 너희랑 같이 해.
내 반응에 우두머리는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우리보다도 더욱 위대한 업적을 세웠지. 그 어떤 존재가 보랏빛 제관을 이은 자를 해할까.”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해하는 걸 거부했다.
보랏빛 제관. 귀족을 지칭하는 푸른 피보다 더욱 위인 존재. 즉 황족과 왕족을 지칭하는 말.
“로빈에게 들었다. 대항전 때 왕족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개새끼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주먹을 휘두른 후였다.
시발, 이 새끼가 갑자기 흑역사를 끄집어 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