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95)
부황의 집무실에 들어가고 2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답답한 심정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괜히 한숨 한 번 잘못 쉬었다가 황제와 황태자의 불화설 같은 것이 나돌면 곤란하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부황께 뺨을 맞았더라도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황태자의 숙명이다.
“전하.”
표정을 가다듬는 사이, 난데없이 2시간 동안 대기해야 했던 헨드릭 경이 다가왔다. 주인이 힘들면 호위기사도 힘든 법이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부황께서 귀중한 말씀을 많이 해주시니 나올 수가 있나.”
“두 분께서 사이가 돈독하시니 실로 제국의 홍복입니다.”
헨드릭 경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호위기사의 업무에는 육체 호위가 아니라 심기 호위도 있었나.
그래도 애써 좋은 말을 하려는 헨드릭 경의 노력이 가상하여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독하다라.’
고개를 돌린 채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운 말이다. 딱히 사이가 험악한 단계는 아니지만, 돈독이라는 단어와도 거리가 머니까.
물론 신하들 앞에서는 돈독한 척을 하고 있다. 황족 간의 골육상쟁 끝에 겨우 황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황태자가 황제와 사이가 돈독하지 못하면 신하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다행히 부황께서도 같은 생각이라 아직까지 잡음이 생긴 적은 없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몇 번이나 살펴라. 이겼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니 언제나 발 밑을 조심하라.”
순간 집무실에서 부황께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잡음이 있는 게 낫나?’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황께 일방적으로 쪼이나, 서로 대놓고 대립하나 그게 그거 아닐까 하고.
대토벌 전쟁이라는 외환과 황위 계승 분쟁이라는 내환. 그렇지 않아도 노쇠하였던 부황은 연이은 악재에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업무에서 손을 떼고 요양에 집중하는 상황.
하지만 평생을 의심 속에서 살며, 황권과 제국의 안정이라는 목표만 보고 달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순순히 요양에 전념할까?
덕분에 툭하면 집무실로 호출 당해 온갖 조언─ 이라는 이름의 잔소리를 듣고 있다. 수십 년을 정계에서 구른 괴물 입장에서, 나는 급하게 만들어진 애송이에 불과하니 안심이 되지 않겠지.
‘…그래도 이게 낫다.’
고민 끝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황실에서 다시 잡음이 생기는 것보다는 잔소리로 끝나는 게 훨씬 낫다. 이건 나 혼자 고달프고 끝나는 문제니.
내가 배가 부르기는 불렀구나. 죽을 걱정도 없는 상황을 불평하고.
“태자는 좋은 짝을 찾아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귀 따가운 잔소리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당신은 그러지 못했으니.’
철저하게 정략으로 만들어진 황후. 뒤늦게 만난 자신의 짝. 그로 인해 시작된 황실의 분쟁.
그 모든 과정을 겪은 부황은 황태자비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만 표정이 온화해졌다. 마치 자신의 뒤를 이을 자가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한 것처럼.
‘나름의 부정인가.’
오직 황실의 가주, 제국의 황제로 살아온 사람이다. 한 사람의 아버지, 한 가정의 가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런 당신에게도 부정이 있겠지. 그러니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보이는 거겠지.
그 부정이 조금이라도 빨리, 조금만 많이 보였다면 형제끼리 목숨을 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같은 모습이었다면.’
그 차가움을 죽을 때까지 보였다면, 그렇다면 평생 원망하고 증오하며 살았을 거다.
하지만 부정의 편린을 보이는 당신 때문에 괜히 기대하게 된다. 동생을 죽인 놈에게도 가족에 대한 기대가 남았다는 게 우습지만.
“전하?”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었네. 이제 가지.”
너무 감성적인 생각에 빠졌다.
황태자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 부황의 요양으로 대신 맡게 된 업무. 두 가지가 합쳐지면 그 양이 상당하다.
덕분에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해야 겨우 저녁에 일을 끝낼 수 있는 상황. 그마저도 저녁에 끝났다면 빨리 끝내는 편에 속한다.
어마어마한 업무량 때문에 가끔 서류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지만, 딱 하나만 보고 버틸 수 있었다.
“전하.”
“비.”
따스한 미소로 맞이해주는 비를 보니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업무를 마치고 복귀하면 볼 수 있는 비. 따뜻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비. 오직 그걸 보기 위해 버티는 거다.
비가 없었다면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애초에 황태자가 되지도, 정말 물리적으로도 살아있지 못했겠지.
“오늘은 평소보다 늦으셨군요.”
“내일은 비를 위한 날이 아니오. 내일 일도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지.”
“어머나.”
과장스럽게 눈을 뜨며 놀라는 척을 하는 비를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작년에도 그러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조용히 입을 닫고 말았지만.
…그래, 작년에는 업무 조절에 실패해서 비의 생일 연회에 지각하고 말았다. 공적인 문제라 비도 장인 어른도 이해해줬지만, 이렇게 툭툭 꺼낼 때마다 식은땀이 절로 난다.
비가 무심코 던지는 돌, 황태자가 맞아 죽기에는 충분하다. 제발 그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올해는 전하의 사랑을 뜨겁게 느낄 수 있겠지요?”
“물론이오.”
쿡쿡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비가 조용히 다가와 품에 안겼다.
“벌써 내일이 기대되네요.”
나도 그렇다.
다음날 아침, 제도 내에 있는 장인 어른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직 연회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비가 장인 어른을 빨리 보고 싶다고 하니 어쩌겠나.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라도 가야지.
“저, 전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너무 이르게 찾아간 것인지 시종들이 놀라는 사소한 소란이 있기는 했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비인데, 그대들은 비가 보이지 않는가?”
“아, 아닙니다!”
“농담일세.”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가볍게 농담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격했다.
이상하다. 감찰부장은 너무 빛나서 눈이 멀었습니다, 같은 말로 돌려치던데. 비도 그런 말을 들으면 은근히 좋아했고.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그리고 시종들의 소란을 느껴졌는지 장인 어른이 집사와 함께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늙은이가 건강을 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너털 웃음을 짓는 장인 어른 곁으로 비가 쪼르르 달려갔다.
머리로는 당연한 모습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조금 섭섭하다. 저렇게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모습이라니.
물론 비는 이런 날이 아니면 장인 어른을 볼 기회가 적으니 어쩔 수 없지만.
“아버지.”
“황태자비 전하.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녀는 서로의 손을 잡으며 한참이나 시선을 교환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미약하게 남은 섭섭함도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다. 공작령에 있는 아들, 황태자비인 딸. 전부 장인 어른 입장에서는 보기 힘든 자식들이니.
“너무 이르게 방문한 것 같습니다.”
부녀의 감동을 방해하지 않게 잠시 기다린 후, 슬쩍 입을 열었다.
비의 바람대로 이 시간에 온 거기는 하다. 그래도 딸을 맞이하는 아비의 입장과 황태자 부부를 맞이하는 공작의 입장은 다르지 않나.
“아닙니다, 전하. 마침 오기로 한 손님이 있어서 준비 중이었습니다.”
“허, 이 시간에 말입니까?”
이 시간에 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조금 놀랐다. 대체 어느 한가한 사람이 아침부터 연회 장소로 온단 말인가.
“예. 철혈공이 오기로 했습니다.”
정말 한가한 사람이 맞았다.
‘부럽다.’
자식에게 영지 운영도 맡기고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철혈공.
솔직히 젊은 시절에 고생했으니 늙어서 쉬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나도 가능하다면 말년에는 양위라도 할까.
“막내딸이 온다고 해서 그런지, 아침부터 오겠다고 하더군요.”
“막내 말입니까?”
그 말에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철혈공의 막내딸이면 마르게타 공녀였지.
그리고 마르게타 공녀가 참가한다는 말을 들으니 빠르게 인과관계가 파악됐다.
‘파트너.’
장인 어른의 말을 들으니 철혈공과 마르게타 공녀는 따로 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공녀가 철혈공의 파트너로 오는 건 아닐 테고, 철혈공의 파트너가 아니면 답은 뻔하다.
감찰부장의 파트너다. 마침 둘 다 아카데미에 있으니 같이 오기도 편할 테니.
‘재밌겠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철혈공이 누구보다 아끼는 막내딸이 감찰부장의 파트너로 등장한다─ 는 것까지는 문제없다. 딸을 평생 끼고 살 것도 아니잖나.
진짜 문제는 철혈공이 감찰부장을 언짢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공녀는 철혈공 대신 그런 감찰부장을 택했다는 것.
‘속 터지겠군.’
철혈공의 성격이 불같은 건 유명하다. 나이를 먹고 그나마 순해졌지만 본래 성격이 어디 가겠나. 과거 세 왕국과 전쟁을 벌였던 시기, 주먹으로 적장을 죽기 직전까지 팬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곤란한데.’
곤란하다. 너무 곤란해. 감찰부장도 철혈공도 제국의 충신인데, 둘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래, 그냥 지켜보자. 귀족 간의 사적 분쟁에 황실이 개입하는 것보다는 그저 지켜보는 게 맞겠지.
‘유감일세, 감찰부장.’
막 석방된 이후라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을 텐데 철혈공의 분노를 받다니.
이거 생각만 해도 유감이야. 너무 유감스러워.
“전하?”
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이거 충신의 안타까운 미래를 걱정하느라 너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즐거운 일이라도 떠오르신 겁니까?”
살포시 미소 지으며 묻는 비의 말에 슬쩍 입꼬리를 만지고 말았다.
음, 조금 많이 올라갔군.
“오늘이 즐거운 날이라 그렇소.”
오늘은 즐거운 날이다. 사랑하는 비의 생일이기도 하고, 비가 장인 어른을 만나 기뻐하는 걸 보기도 했고.
게다가 감찰부장이… 아니, 이건 즐거운 게 아니지. 아무렴.
‘도망치지 말게, 감찰부장.’
그리고 비겁하게 숨어 다닐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설마 그 감찰부장이 그런 치졸한 행동을 하겠나.
아무튼 오늘은 즐거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