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97)
주인이 어디 있는지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보통 주인은 인파에 휩쓸려 갇혀 있는 법이니.
“오, 감찰부장.”
“각하.”
우리를 발견한 전승공이 먼저 아는 척을 하기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보는 눈이 많아 칼 군이 아닌 감찰부장이라고 불렀지만,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있을 정도의 거물이면 나와 전승공이 친하다는 것 정도는 알지. 그래도 암암리에 아는 것과 공식적으로 밝히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감찰부장이 특정 귀족과 친목질을 한다는 이미지, 군부의 실질적 수장이 누군가를 총애한다는 이미지는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아, 감찰부장 왔는가.”
그러니 너도 좀 지양해라, 이 새끼야. 부하 놀리는 황태자 이미지는 더 심각하잖아.
아무튼 전승공을 따라 내게 시선을 돌린 황태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마치 너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뭐지.’
본능적인 불안함이 솟구쳤다. 혹시 황태자 전용 억제기가 부재 중인가 싶었지만, 황태자비는 황태자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진짜 뭐지? 이 새끼가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비 앞에서 인성질을 할 놈은 아닌데?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단 먼저 말을 거는 윗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마르게타와 함께 허리를 숙이자 황태자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고개 들게. 비를 위한 연회에서 나만 주목 받는 것 같으니 부끄럽군.”
“주인공은 마지막에 주목 받는 법 아닙니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 말에 옆에 있던 황태자비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먹히네.’
이럴 때마다 의문이 든다. 왜 이런 말이 통하는 거지?
외래종은 알 수 없는 이 세계 사람들의 감성인가? 아니면 이런 소소한 농담에도 즐거워 할 정도로 황궁 생활이 지루한 건가?
물론 어느 쪽이든 평생 이해하지 못할 이유다.
‘좋아해서 하기는 하지만.’
윗분이 좋아하면 아랫놈은 열심히 재롱을 부린다. 그게 사회 생활이지 않겠나.
“감찰부장의 말이 맞군. 그래, 주인공이 나오기 전에 조연이 시선을 끄는 건 당연하지.”
만족스러운지 웃음을 터뜨린 황태자를 따라 주변의 귀족들도 따라 웃었다.
‘이게 권력.’
나이가 지긋하고 권력이 많더라도 황태자가 웃음벨을 울리면 웃어야 한다. 그것이 신분제의 숙명.
당연히 나도 따라 웃었다. 신분제에 속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벌써부터 즐겁군. 감찰부장도 연회를 즐기기를 바라네.”
“감사합니다, 전하.”
황태자는 덕담과 함께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황태자비도 눈인사를 하며 황태자를 따라갔고.
‘망할.’
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상 저 웃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개같이 구르기 직전의 상황이 되면 저런 웃음을 보였으니까. 저 새끼가 티배깅을 못한다고 이제는 표정으로 놀리네.
‘눈치는 빨라가지고.’
아마 철혈공이 벼르고 있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거겠지. 그런 상황에서 연회를 즐기다니, 너라면 즐길 수 있겠냐.
미래가 보인다. 철혈공에게 털리는 나를 멀찍이서 구경하는 황태자가 보여.
“전하께서 감찰부장을 아끼는 것 같군.”
황태자 부부에 이어 이번에는 전승공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과분할 따름입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아끼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람을 아끼는 게 아니라 애용하는 장난감을 아끼는 거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정말 잘 와줬네. 즐거운 연회를 보내기를 바라지.”
“예, 각하.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자 전승공도 내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아까와 같은 터치인데 느낌은 왜 이리 다른지.
“공녀도 즐거운 시간 보내게. 파트너도 좋지만, 철혈공도 잊지는 말고.”
“네, 각하. 조언 감사합니다.”
다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떠나기 전, 웃음기 담긴 전승공의 말에 마르게타도 빙긋 웃으며 답했다.
연회에 참석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이유는 별거 없다.
“오랜만이오, 감찰부장.”
“아, 의장 각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괜히 얼굴을 비추면 온갖 사람들과 강제 인사 릴레이를 해야 하니까.
한두 명 정도면 상관없는데, 그 한두 명과 인사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오더라. 서로 눈치 게임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당연히 먼저 인사를 걸어오는 상대를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고, 만약 구면인데 기억하지 못하면 더더욱 예의가 아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이 사람이 누군지 떠올리는 건 힘든 일이다…
“감찰부장이 파트너와 있는 건 처음 보는군.”
덤덤한 제국의회 의장, 가주와 같은 제국백인 바르돈 백작의 말에 마르게타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바렌티 공작가의 마르게타라고 해요.”
“반갑소. 바렌티의 보물을 보는 날이 다 오는군.”
그 말에 마르게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보물…’
무심코 웃을 뻔한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당사자가 부끄러워하는 저 별명은 철혈공의 맹활약으로 생긴 별명이니까.
마르게타가 막 태어났을 당시, 늦둥이 딸의 탄생에 고무된 철혈공은 지인들에게 마르게타에 대한 자랑을 하고 다녔다. 벌써부터 말을 한다, 벌써 아비를 알아본다, 벌써 몸을 뒤집는다… 대충 그런 것들.
공작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존재. 눈치 빠른 귀족들이 그걸 놓칠 리는 없지 않나. 사교계에서는 1살에 빛나는 마르게타를 향한 온갖 칭찬과 칭호가 난사되었고, 그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바렌티의 보물이다.
“가, 감사… 합니다.”
1살 별명이 18살까지 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일단 마르게타를 보니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순간적으로 더듬어버린 말. 언제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는 마르게타지만 고대의 흑역사를 이기지는 못했다.
“반가운 마음에 늙은이가 아는 체를 했군.”
그런 마르게타의 반응을 보던 의장은 다시 시선을 나에게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말투는 딱딱하지만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재미있는 모습을 구경한 사람처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네. 기회가 되면 다시 보도록 하지.”
“예. 그때는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의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사라지다니, 유령이 따로 없네.
그래도 늙은이 운운하며 쓱 사라진 모습이나,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을 보면 의장 나름의 배려겠지만.
슬쩍 마르게타에게 눈길이 갔다. 그렇게 친하지 않은 의장마저 나와 마르게타를 보더니 자리를 비켜줬다.
‘어르신들 특징인가.’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혼사가 사교계의 콘텐츠가 된 게 아닐까? 내가 언제 결혼할지를 두고 내기가 벌어지는 건 아닐까?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니 내게 오려던 귀족 하나가 의장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일단 사교계는 몰라도 제국백 사이에서는 콘텐츠가 된 것 같다.
“마르. 잠시 쉬겠습니까?”
애써 기묘한 광경을 무시하며 마르게타의 손을 잡았다.
아직 쉴 정도로 돌아다닌 건 아니지만, 갑자기 흑역사를 발굴 당했으니까. 정신적 충격이 작지는 않겠지.
“벌써요? 이제 1시간 정도 지나지 않았나요?”
“보물에 흠집이라도 나면 슬프지 않습니까.”
그 말에 마르게타가 너무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미안합니다. 보물이라는 단어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만…
***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 표정이 무너졌다.
부끄럽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듣고 싶지 않은 별명을 정면에서 들어버렸다. 심지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에게. 게다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해.’
야속한 심정에 칼을 흘겨보자 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아줬다.
‘이런 걸로 풀릴 줄 알고?’
당연히 풀린다. 그래서 화도 내지 못하고 이러고 있잖아.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고작 별명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별명은 내 기억보다도 오래된 흉악한 단어.
차라리 최근에 생긴 별명이면 조금 낯 뜨거운 정도로만 생각할 텐데, 하필 어릴 때부터 듣던 별명이라 그 별명을 들으면 철없던 어린 시절도 동시에 떠오른다.
‘아버님…’
갈 곳을 잃은 원망은 아버님에게 향했다. 누가 지은 별명인지는 모르지만, 원인이 아버님인 건 확실하니까.
슬픈 연회다. 시작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입고 말았다.
‘괜찮아.’
그래도 만족스러운 성과도 얻은 연회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회 의장에게 칼과의 관계를 과시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의장을 시작으로 의원들, 의원들을 기점으로 다른 귀족들에게 널리널리 퍼지겠지.
그래, 그거면 된 거야. 한순간의 부끄러움을 대가로 이런 성과면 감수할 수 있어. 응…
‘…응?’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찰나, 저 멀리 정문 쪽이 소란스러웠다.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지만 정문을 지키던 경비들이 요란하게 움직이는 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사람 하나가 서있는 것도.
‘누구지?’
이미 연회가 시작한 이후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태자비 전하를 위한 연회, 다른 곳도 아닌 전승공 각하의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에 늦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
내 시선을 따라 정문을 바라보던 칼이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귀한 손님이 왔군요.”
이 거리에서도 보였는지 칼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덕분에 의문만 더욱 커졌다. 칼도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높은 사람이라는 건데.
‘올 사람이 있나?’
없다. 황족은 말할 것도 없고, 황금공과 현명공은 영지에 머물며 신년하례식 정도에나 얼굴을 보인다.
그나마 제도에 있는 마종공도 마찬가지. 그 분은 신년하례식 기간에도 하루만 참석하는 걸로 유명하니까. 그러면 후작인가?
“자, 들어갑시다. 곧 오실 것 같으니 인사라도 드려야죠.”
“아, 네.”
그래, 칼 말처럼 어차피 손님이니 보게 될 거다. 금방 풀릴 의문이니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
“아가.”
지…?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마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자마자 보는 게 아가라니, 운이 좋구나.”
다소 나른한 목소리.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니?”
하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압박감.
“후후, 그렇다면 기쁘겠구나.”
잠시 굳었던 몸을 조심스레 돌리자 백발의 여인이 보였다.
이 자리에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한 여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