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99)
가벼운 마음으로 온 연회에서 무거운 압박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아무나 좋으니까 날 여기서 꺼내줘. 지금이라면 황태자의 티배깅도 웃으면서 당할 테니까.
“아가. 한 잔 마시겠니?”
“아, 그.”
두려움에 떠는 사이 옆에 있던 마종공이 화이트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공작이나 되는 분이 황태자나 다른 공작이 아니라 내 근처에 있는 이유는 모르겠다. 덕분에 시선이 전부 몰려 있잖아.
“죄송하지만, 칼은 술을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마르게타가 선수를 쳤다. 공작의 권유를 정중히, 하지만 단호하게 거부하는 패기.
마르게타가 공작가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시도도 못할 행동이다. 괜히 옆에 있는 내가 무서울 정도.
“그렇죠, 칼?”
살포시 미소를 지은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눈은 날카롭게 떠진 채로 내 입을 쳐다봤다. 마치 대답 잘 하라는 듯이.
“그건─”
“그러니? 이상하구나. 신년하례식 때는 잘 마시던데.”
이번에도 나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도로 다물고 말았다.
이상하다. 분명 나한테 묻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나한테 듣지도 않으면서 대화가 진행된다.
이 대화에 나 필요한 거 맞나? 그냥 다른 곳으로 가게 해주면 안 돼?
“칼. 파트너를 두고 갈 생각인가요?”
“아가. 아직 내가 말하고 있잖니.”
하지만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으려고 하면 귀신같이 붙잡더라. 아까까지 은근한 대립을 하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단합력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다시 원상태로 복귀했다. 두 공작가의 대립, 그 사이에 낀 일개 백작가 후계자의 눈물.
‘도와줘.’
애타는 눈으로 저 멀리 안전 거리를 유지하는 공작들을 바라봤다. 난 힘이 없어, 당신들만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어.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전승공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누구보다 든든한 어른의 배신에 조금 마음이 아팠다.
…아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전승공이어도 마종공은 부담스러울 테니까.
대신 전승공 옆에 있던 철혈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만은.’
사실 진짜는 저쪽이다.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전승공은 발을 뺄 수 있지만, 철혈공은 마르게타의 부친 아닌가. 소중한 딸이 마종공과 기싸움을 하는 것 같은데 과연 방치할까?
그런 내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르게타와 마종공 사이에 낀 나를 씹어먹을 듯 보던 철혈공은 무언가 각오를 다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전승공과 함께 자리를 떴다.
…?
‘뭐야.’
당신 어디 가. 그렇게 떠나면 어떡해.
설마 미운 예비 사위라고 그대로 방치하는 건가? 그래도 소중한 딸이 여기 있는데?
‘믿었는데.’
철혈공만은 마종공에게 굴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아무래도 신년하례식에서 혼자 동 떨어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분위기에 어울리려고 그런 거겠죠.”
“그래, 아가는 생각이 깊으니까. 그러면 지금도 마찬가지겠구나.”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양옆에서 들리는 논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처음에는 겹겹이 포장되어 있던 발언이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제는 누가 들어도 기싸움이 맞다.
‘대체 왜…’
머리가 아프다. 이러는 이유를 알면 해결하려는 노력이라도 하지, 원인을 모르니 나설 수도 없지 않나.
마르게타가 갑자기 타인에게 시비를 거는 성정은 아니다. 난데없는 무례를 용서할 정도로 마종공이 물렁하지도 않고.
그런데 갑자기 대립하고, 그 대립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고…
‘망할.’
미치겠네 진짜.
***
결국 고심 끝에 몸을 돌렸다. 이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철혈공.”
그러자 전승공이 작게 속삭였다. 마치 이래도 괜찮겠냐는 듯이.
“괜찮소.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 심려치 마시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 말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전승공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 마르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마르 옆에 있는 빌어먹을 놈, 또 그 옆에 있는 마종공.
‘이게 무슨 일인지.’
미간이 찌푸려질 것 같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늘은 황태자비를 위한 연회. 그런 자리에서 사적인 이유로 감정을 표출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마종공도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고작 이 정도 거리에서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마법이라도 쓴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마법은 이래서 편하다. 무언가 열정적으로 대화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대화 자체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사교계에 온갖 추측이 떠돌아도 그중 정답은 없을 거다. 아니, 애초에 공작이 얽힌 일을 함부로 떠들 리 없을 테니 아무 소문도 돌지 않겠지.
황태자비 생일 연회라는 환경, 큰 소란을 원치 않는 마종공. 이건 내가 나서봤자 피만 볼 조건이다.
‘…아무 일 없을 거다.’
관여할 수 없기에 애써 그리 생각하며 눈을 돌렸다.
그래, 아무 일 없을 거다. 마종공도 문제를 키울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나.
‘일이 생길 거면 진작에 생겼다.’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모습은 보인다. 그렇기에 마르가 마종공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다.
‘그거면 충분하다.’
마종공이 권위를 내세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비로운 편도 아니다. 오히려 선을 넘는 자들에게는 가차없었다. 그런 마종공이 잠잠한 걸 보면 마르도 선을 지키고 있는 거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만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 같기에.
‘마르야.’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냐.
착잡한 심정에 다시 마르를 바라봤다. 그 여리고 착한 아이가, 언제나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왜 저러는 건지.
그리고 그 착잡함은 분노로 치환되어 마르 옆에 있는 놈에게 향했다.
‘분명 저놈 때문이겠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놈이 얽힌 건 확실하다. 둘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도 그렇고, 자리를 피하려고 하면 붙잡히는 모습도 그렇고.
괘씸하기 짝이 없다. 바렌티의 사위가 될 놈이 마르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문제나 일으키다니.
‘빌어먹을 놈.’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혀를 차고 말았다.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이 저렇게 다른 것도 능력이다.
분명 하나의 귀족으로서, 하나의 관료로서는 만족스러운 놈이다. 반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너무나도 언짢다.
감히 마르를 거절했던 것도, 그래놓고 다시 마르와 만나는 꼴도, 마르와의 결혼을 원하면 공작성에 와 무릎 꿇으라는 말을 무시한 것도. 전부 거슬린다.
‘다른 후보만 있었어도 무시했을 텐데.’
한탄스럽다. 제국은 넓고 귀족은 많거늘, 왜 마르와 어울리는 짝은 저놈뿐인가.
가문의 격이 높고, 나이도 젊고, 능력도 좋고, 성격도 괜찮고, 업적도 출중하며, 마르가 좋아하는 청년. 이게 그리도 어려운 조건인가?
물론 어렵다. 그걸 뚫고 후보가 된 저놈이 이상한 거지.
‘차라리 아무도 없었다면.’
조건을 달성한 놈이 없다면 하나씩 내려놓기라도 했을 거다. 하지만 전부 달성한 놈이 앞에서 얼쩡거리니 외면할 수가 있나.
하여간 빌어먹을 놈이다.
***
오.
‘꿈인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철혈공의 딸이 마종공에게 날을 세우는 것 같은 모습도, 마종공이 아무렇지 않게 받는 모습도. 전부 현실이다.
‘놀랍군.’
정말 상상도 못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저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릴 정도로.
처음에는 마종공이 비를 위한 연회에 왔다는 사실에 기뻤었다. 연회는 참가자의 신분이 드높을수록, 보기 힘든 자가 있을수록 격이 오르는 법이니까.
그리고 연회의 격은 주인공인 비의 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종공의 참가에 의아하면서도 기뻐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비를 위한 참석이 아니라는 거지만, 오히려 안심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마종공이 아무 이유 없이 왔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
잘됐다. 도대체 무슨 일로 왔는지 고민하느라 잠 못 잘뻔했는데.
그리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감찰부장, 또 자네인가.’
보는 눈이 없었다면 진작에 웃었다. 하여간 연극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보는 사람이 절로 유쾌할 정도로.
‘연극도 이렇게 만들면 졸작일 텐데.’
상상도 못한 유쾌함이다. 개연성을 따지자면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설마 그 마종공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마종공이.
‘감찰부장을 마음에 품었─’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까지 생각하면 정말 웃을 것 같기에.
당연히 처음부터 눈치 챈 건 아니다. 감찰부장이 끼어 있길래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만 짐작한 거지. 누가 저것만 보고 사랑 문제로 연결하겠나.
하지만 자세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구경─ 아니, 관찰했다. 두 공작가가 얽힌 일이니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니까.
‘공녀가 공작에게 날을 세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무례를 탓하지 않는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감찰부장이 껴있다.’
도대체 안 끼는 곳이 어디냐.
따로 노는 퍼즐 조각들.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도대체 저게 무슨 일인가 싶을 때,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내가 2황자에게 몰리고 몰리던 1황자 시절. 나에게 청혼한 비에게 물었었다. 도대체 왜 나냐고, 당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 대답이 걸작이었지.
“전하. 이해할 수 없는 일도, 그 어떠한 의문도 사랑이라는 이유가 붙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닥치고 내 청혼이나 받으라는 눈빛. 아무튼 그 말이 떠오르자 저 광경이 다르게 보였다.
공녀가 공작에게 날을 세우는 이유, 그런 무례를 당하고도 공작이 담담한 이유. 그 이유에 사랑을 대입했다.
‘이해되는군.’
놀라울 정도로 이해가 된다. 이제는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저러는 거라면 그게 신기할 정도로.
이 기괴한 사건이 보통 일은 아니다. 마종공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작가의 후계가 걸린 일이니까.
100년이 넘도록 홀로 살아가는 마종공을 보며 부황께서도 걱정이 많으셨다. 혹시 공작가의 대가 끊기는 건 아닌가 하고.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마종공이 노환으로 죽는 것과 제국이 망하는 것 중 뭐가 빠를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걱정 없겠어.’
짝을 찾은 마종공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공작가의 후계 문제도 사라지겠지.
대신 새로운 우환이 생겼다.
‘크라시우스, 바렌티, 카토반.’
감찰부장의 가문, 공녀의 가문, 마종공의 가문.
저 세 가문이 혼인이라는 이름으로 엮이면 대체 어떤 세력이 만들어질까.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제국 정계가 뒤집어지고, 부황께서도 침대에서 일어날 정도의 사건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보통 일이 아닌데…
‘신경 쓸 거 없지.’
오늘의 나는 비를 위한 연회, 그리고 감찰부장의 연애를 위해 즐길 것이다.
일을 하는 건 내일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