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0)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내 수명도 빠르게 소모됐다.
‘지옥이다.’
오늘 깨닫고 말았다. 깊은 지하에서 용암으로 찜질하는 것만이 지옥은 아니라는 걸.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지옥이 있다는 걸.
아마 내가 있는 지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이겠지. 그것도 죄인을 고요하게 말려 죽이는 지옥.
‘죄인 맞나?’
순간 억울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으면 겸허히 받아들이기라도 하지, 영문도 모르고 이런 처지가 된 거 아닌가.
그래, 영문을 모르겠다. 마르게타와 마종공이 기싸움을 하는 이유도, 그 사이에 내가 끼어 있는 이유도.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아까와 달리 아무 말도 없는 침묵 상태. 이 기회를 틈타 최대한 조심스레 눈을 굴렸다. 괜히 고개까지 움직이면 이 소강 상태가 깨질 것 같았으니.
그리고 눈을 굴리자마자 마종공과 눈이 마주쳤을 때, 괜한 짓을 했다는 걸 직감했다.
“아가, 왜 그러니?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마종공.
“칼. 필요한 게 있다면 저한테 말하세요. 파트너잖아요.”
마종공의 말에 바로 반응하는 마르게타. 기분 탓인가. 유독 파트너라는 단어를 말할 때 힘이 들어간 것 같다.
‘망할.’
참담한 심정에 눈을 감고 말았다.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는데, 그 조심한 행동으로도 다시 전쟁이 터졌다.
“아가가 굳이 나를 본 걸 보면 내가 필요한 것 같구나.”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다.
“아니에요. 각하를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제가 해야죠. 제가 파트너니까요.”
언제부터 파트너가 심부름꾼을 지칭하는 말이었지?
애초에 딱히 필요한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 그냥 탈주각을 잡으려다 눈 마주친 거라고.
하지만 그 말은 목 끝에서만 맴돌다가 삼켜졌다. 이번에도 가운데에 낀 나는 순식간에 뒷전이 되었고, 두 공작가의 치열한 대립이 시작됐으니까.
‘신분제가 밉다.’
마음으로 울었다. 나도 백작가가 아니라 공작가였다면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을 텐데.
빙의시킨 당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야박하기 짝이 없다. 이왕 귀족에 빙의시킬 거면 공작이나 후작도 있잖아. 인심 좀 더 쓰지 그랬어.
아, 인심이 아니라 신심인가?
하하, 재밌네.
‘망할’
마음으로 오열했다…
***
오, 또 시작했다.
“전하.”
감찰부장이라는 트로피를 건 2차전이 막 시작됐지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관전은 포기했다.
아무리 유쾌한 광경이라도 비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비. 장인 어른은 어쩌고 벌써 온 거요?”
“전하께서 홀로 계시기에 마음이 아파 왔습니다.”
쿡쿡 웃으며 답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아무리 유쾌한 광경이라도 비를 보는 것보다 즐겁지는 못하다.
“헌데 전하. 무얼 그리도 즐겁게 보시는지요?”
작게 웃던 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겠지. 황태자라는 놈이 다른 귀족들과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2층에서 내려다 보고 있으니.
“독특한 광경이 있어서 말이오.”
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난간 쪽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제일 잘 보이는 곳이다.
“마종공과… 마르게타 공녀군요.”
내 안내를 따라 세상에 둘도 없을 광경을 본 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런, 가장 중요한 걸 보지 못했군.
“감찰부장도 있소.”
“어머나.”
뒤늦게 감찰부장을 발견한 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사를 냈다.
“전혀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비. 이해가 가는 반응이기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감찰부장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다. 검은 머리에다 복장도 검은색을 고집해서 인파에 숨어도 확실히 보이지.
그런 감찰부장이 지금은 두 여인 사이에 끼어서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심지어 딱딱하게 굳어 미동조차 없으니 더욱 그렇고.
“특이한 조합이네요.”
“그렇지. 다른 곳에서는 못 볼 조합이지.”
그 말을 하고 나니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나. 마탑에서 나오지 않는 마종공, 아카데미 학생인 공녀, 본래라면 감찰부에 있을 감찰부장.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모이려고 해도 모일 수 없는 인물들이 모였고, 기적적으로 모인 자리가 비를 위한 연회다.
‘신의 선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된 업무에 고생하는 나를 위한 에넨의 선물, 혹은 에이만카 대제의 가호다.
물론 저 셋이 결합해서 생길 일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내가 처리할 일이지.
‘애초에 당장 일어날 일도 아닐 테고.’
돌아가는 구도를 보니 이제 막 시작된 사랑 싸움이다. 아무리 공작의 사생활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귀족들이라도, 두 공작가가 한 남자를 두고 대립하면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이제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다? 남들 앞에서 보인 적 없는, 이 자리에서 처음 터진 일이라는 것.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수년은 지나야 혼인이 이루어질 거다. 대처법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않나.
“전하?”
갑자기 웃음 소리가 들리자 비는 의아한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비를 앞에 두고 너무 혼자 즐거웠군.
“미안하오. 그래도 재밌는 장면이 아니오?”
“글쎄요. 독특하기는 하지만…”
비는 말을 흐리며 다시 감찰부장 쪽을 쳐다봤자. 그러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우뚱, 다시 왼쪽으로 갸우뚱.
귀여운 모습에 다시 웃을뻔했지만 참았다. 비는 자신이 진지할 때 웃으면 토라지고는 하니까.
“저 셋이 모인 이유가 재밌지.”
그 말에 비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느껴졌다.
정답을 도출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비라면 알아챌 거다. 나도 비의 말 덕분에 눈치 챘으니.
“아.”
그리고 예상대로 비는 스스로 정답을 알아냈다.
“어떻소, 재밌지 않소?”
차오르는 만족감에 비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즐거우면서도 답답했다. 저 세기의 사랑 싸움을 보는 즐거움, 하지만 남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답답함.
하지만 이제 비와 이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어찌 즐겁지 않─
“흐으응.”
“…비?”
비의 콧소리에 몸이 굳고 말았다.
‘왜?’
이건 비가 기분이 상했을 때 내는 소리니까.
비를 끌어안은 손에 비의 손이 얹어졌다.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이 지금만큼은 두려웠다.
“전하.”
“말하시오, 비.”
“즐거우십니까?”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
연회의 격이 격인지라 저녁 식사는 꽤 호화로운 뷔페 형식으로 나왔다.
“칼. 이것도 먹어봐요.”
“고맙습니다…”
“아가. 이게 건강에 좋단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가 식사를 코로 했는지 눈으로 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일단 입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아.
좌 마르게타 우 마종공이라는 든든한 라인업. 내가 먹을 것도 친절하게 접시에 담아주는 따뜻함. 그리고 식사 중에도 대립하는 스릴감.
그리고 체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면 귀신같이 눈 앞에 나타나는 물잔. 물론 두 잔이었다.
‘죽겠다.’
오늘처럼 연회가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은 없었다. 솔직히 중간에 연회 자체를 탈주할까, 하는 욕구도 조금은 들었다.
그런데 황태자비 생일 연회에서 출튀하는 귀족? 뒷감당이 무섭네 그거. 게다가 그런 짓을 하면 전승공하고도 어색해지겠지.
‘돌아가면 바로 자자.’
다행히 내일도 쉬는 날이라 다행이다. 이 멘탈로 다음날 출근했다면 미쳤을지도 몰라.
그래, 피곤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남은 일정도 얼마 없으니까.
에넨은 지독한 외래종 혐오자인 것 같다.
‘미친.’
들린다, 전부 들려. 은은하게 울리는 음악. 음악으로도 가릴 수 없는 웅성거림.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방심했다. 그 티끌 같은 일정이 이런 비수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게 뭐야.’
망연히 눈 앞에 내밀어진 손만 바라봤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목을 겨우 움직여 시선을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렸다. 하얀 손, 가녀린 팔을 거쳐 얼굴을 향해.
그러자 미소를 짓고 있는 마종공, 그런 마종공을 째려보면서도 간절히 나를 바라보는 마르게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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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숙녀를 기다리게 할 거니?”
내가 멀뚱히 서있기만 하자 마종공이 입을 열었다.
“칼…”
마르게타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부를 뿐.
지옥이다. 아까는 지옥이 아니라 그냥 연옥 수준이었어. 이게 진짜 지옥이야.
‘시발.’
가불기에 걸렸다. 마지막 일정에서 제대로 발목이 잡혔다.
연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춤. 주인과 참가자들의 화합과 우애를 기원하는 마지막 일정.
나는 당연히 마르게타와 출 생각이었다. 애초에 마르게타가 파트너고, 마르게타가 아니면 출 사람도 없고.
“아가. 괜찮다면 나하고 같이 추겠니?”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전혀 생각도 못한 사람이.
갑작스러운 마종공의 권유에 연회장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부부끼리 춤을 추려는 귀족들도, 나이가 비슷한 상대를 찾아 추려는 귀족들도, 그저 구경만 하려는 귀족들도. 전부 입을 다물고 이쪽을 쳐다봤다.
…철혈공이 죽일 듯이 쳐다보는 건 애써 못 본 척 했다.
“카, 칼! 저하고, 저하고 추는 건 어때요?”
순간 넋을 놓았던 마르게타가 황급히 달려들었지만, 마종공이 먼저 신청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마르게타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마종공이 먼저 신청하기도 했고, 신분도 높으며, 연장자다. 그런 사람을 단호히 거부하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반대로 마종공을 선택하기도 힘들다. 아무리 마종공이 선수를 쳤다고 해도 파트너는 마르게타 아닌가. 게다가 미래의 부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건… 많이 이상한 일이다.
차라리 정식으로 약혼 관계면 그걸 명분으로 거절할 텐데, 아직 나와 마르게타는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나. 거절 명분으로 쓰기는 부족하다.
‘…혀라도 깨물까?’
아니다, 깨물면 더럽게 아프기만 하지 죽지도 않잖아.
‘손을 자를까?’
이건 괜찮은 생각 같다. 레이디의 손을 잡을 수 없다면,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아름다운 결말이 나온다.
나쁘지 않아. 차라리, 차라리 잠깐만 손을 포기하면─
“다행히 아직 시작하지 않았군.”
그때 황태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부터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던 황태자의 목소리에 나에게 끌렸던 어그로가 전부 황태자에게 쏠렸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상황이 개판이니 사소한 것도 거슬렸다. 저 새끼는 황태자라는 놈이 이상한 곳이나 쏘다니고.
하지만 내 언짢음과 별개로 황태자는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연회는 비를 위한 자리. 이 자리를 빛내준 자네들에게는 고맙지만, 마지막은 비가 장식했으면 좋겠네.”
그 말과 함께 황태자는 황태자비의 손을 잡으며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마지막은 우리가 장식하도록 하지.”
…어?
황태자의 선포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 다들 다음 기회를 노려주게. 신년하례식도 코앞이지 않나.”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슬쩍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뒀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전하…’
저 분이 내 구원자라는 걸.
***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춤을 추는 사이, 비가 작게 속삭였다.
“잘하셨어요, 전하.”
“만족했다니 다행이오, 비.”
“후후. 전하는 언제나 저를 만족시켰는 걸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비를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