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1)
평화로운 휴일, 평화로운 아카데미, 평화로운 숙소.
출근할 필요 없이 숙소에만 지낼 수 있다는 건 매우 행복한 일이다.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으니까.
“칼. 휴일이라도 너무 누워있으면 안돼요.”
“알겠습니다.”
찻잔을 들며 다가오는 마르게타의 충고. 소중한 충고에 바로 몸을 일으키자 마르게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평화롭다. 조곤조곤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더욱 보람찬 휴일을 보내는 것 같다.
“향이 좋아요. 분명 칼도 마음에 들 거예요.”
여전히 미소를 지은 마르게타가 찻잔을 건넸다.
밝은 붉은색을 띠는 차. 내 방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마르게타가 가지고 온 건가?
“고맙습니다, 마르.”
“후후, 별거 아니에요.”
이 역시 평화롭다. 새로운 차의 풍미를 느끼며 보내는 휴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제의 소란이 거짓말 같다. 이렇게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면 피곤도 금방 가시겠지. 내일 출근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다.
그래, 나는 행복하다. 나는 평화롭다. 나는 즐겁… 나?
‘안 즐거워.’
끊임없이 되뇌이던 자기 암시가 무너지고 말았다.
살며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마르게타를 바라봤다. 그러자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하지 않는 당당함이 보였다.
“마음에 드나요?”
“아, 예. 좋습니다.”
내 대답에 마르게타는 양팔을 벌렸다.
무슨 의미인지 뻔하기에 조심스레 다가가 안아주자, 그대로 나를 꽉 껴안았다.
“그럼 이런 상 정도는 받아도 되죠?”
“물론입니다.”
겉으로는 허락을 구하는 말투였지만,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 어떻게 마르게타를 거부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안아 달라는 게 아니라 업어서 아카데미 운동장을 돌아달라고 해도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다.
정성을 다해 등을 쓰다듬자 마르게타는 깊숙이 내 품에 파고 들었다.
“따뜻하네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마르게타.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기 싫을 정도로.”
그 말에 쓰다듬던 손이 멈출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방금 타이밍에 멈췄으면 곧바로 지옥이다. 그 정도는 연애 경험이 부족해도 알 수 있다.
“…칼은 아닌가요?”
‘아.’
묘하게 차가운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지옥은 두 개였나.’
아직 나는 부족하구나.
몇 시간은 더 마르게타를 달래고 나서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정신이 피폐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감수해야 할 일이거늘.
‘마르게타도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그리 생각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 너무 억울해하지 말자.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마르게타만큼 힘들겠나. 홀로 공작과 싸워야 했던 마르게타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반작용인가.’
덕분에 마르게타는 오늘 아침부터 내 숙소에 들이닥쳤다.
내가 부회장실로 간 게 아니다. 마르게타가 내 숙소로 직접 달려왔다. 정말 큰 용무가 아니면 근처에도 오지 않던 그 마르게타가 직접.
“마르?”
“칼. 오늘은 저하고 같이 있어줄 수 있나요?”
그 절박한 눈빛을 보고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일 거다.
“예, 마르. 저도 마르와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짧은 한마디에 마르게타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밝게 웃었다. 아니, 어쩌면 애써 밝은 척을 하는 걸 수도 있지.
설령 연기라도 이해한다. 나도 마르게타와 있는 동안 괜찮은 척 하려고 노력했으니까.
‘미치겠네.’
보는 눈이 없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깨질 것 같은 머리 때문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어젯밤부터 끊임없이 고민했다. 왜, 대체 왜?
‘왜 나를─’
거기까지 생각하니 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불과 이틀 전의 나에게 말해주면 드디어 미쳤냐고 욕이나 먹었을 사건이 터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실이다.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모든 정황이 현실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차마 생각하기 어려웠던 문장이 머리에서 완성되자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지금은 머리를 비워야 조금 진정될 것 같으니까.
물론 순순히 비워지지 않았다. 계속 마종공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 혹시 내 착각이 아닌가 몇 번이나 다시 생각했다. 내 자의식 과잉과 근거 없는 자신감이 호의를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마종공이 나를 좋아한다고?
‘되네.’
놀랍게도 말이 됐다. 아직 마음은 이 결과를 인정하지 못했지만, 이성은 이게 맞다고 외치고 있다.
내가 연애 경험이 적어서 눈치가 없는 편인 건 인정한다. 에리히도 눈치가 없는 걸 보면 이 육체가 선천적으로 지닌 유전자겠지.
‘내가 눈치가 없지, 머리가 없냐.’
그래도 눈치가 없어서 상황 파악이 느린 것과 정보가 있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함은 별개다.
마종공이 연회에서 보였던 모습, 기이할 정도로 마종공과 대립한 마르게타. 당시에는 눈치를 보는데 급급해서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쉬운 문제였다.
“아가. 괜찮다면 나하고 같이 추겠니?”
사실 다른 거 다 필요 없기는 해. 미혼인 마종공이 춤을 신청했다는 것만큼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겠나.
그리고 마종공이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예전에 들었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우리 아가와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인 구애였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구나.”
저 구애가 진짜 구애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당사자도 모르는 구애.’
순간 마종공이 원망스러웠다. 구애 받는 사람도 구애인 줄 모르는 구애가 세상에 어디 있어.
차라리 진작부터 마종공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충격을 받을 일은 없었을 텐데.
‘…다를 건 없나?’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며 끊이지 않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진작 알면 뭐 달라졌겠나. 마종공의 마음을 안다고 ‘까짓것 결혼합시다!’ 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괜히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만 했겠지.
그럴수록 마종공은 인내심을 시험 받았겠고, 결국 언젠가는 터졌을 거다. 사랑… 하는 남자가 자신을 피하는데 태평할 여자는 없으니.
‘얼마 안 남았다.’
긴장감에 손이 떨리고 말았다. 애석하지만 지금도 마종공의 인내심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내가 일찍 알아채든 늦게 알아채든, 마종공이 홀로 짝사랑을 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아쉽구나. 아가와 함께 하고 싶었는데.”
연회에서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의 구원으로 구사일생한 직후, 마종공은 진심으로 아깝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래도 전하의 말씀대로 신년하례식이 있으니, 그날을 기다려야겠구나.”
어느 때보다 밝게 웃은 마종공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어느 때보다 무서웠다.
신년하례식, 새해를 기념하여 모든 작위 귀족들이 모이는 날. 그 기념적인 날은 내 사형 일자가 되어버렸다.
‘망할.’
답답하다. 마종공은 왜 나 같은 걸 좋아하는 건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지내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 시대에, 딱 나를 골랐다.
부족할 거 없는 사람 눈에 내가 제대로 들어오기는 할까? 수명이 다른 존재를 마음에 품으면 비극적인 미래만 기다리지 않을까?
어려운 문제다.
***
오랜만에 과음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으니.
그리고 지금만큼 이 육체가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차라리 거하게 취하고 싶었지만 경지에 오른 육체는 취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식도와 위장을 뜨겁게 태우는 감각으로 화를 식힐 뿐.
“마르야. 괜찮으냐?”
하지만 겨우 가라앉힌 화도 소중한 막내를 보자 다시 치솟았다.
억지로 미소를 짓는 얼굴,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입술.
역시 이 모양이다. 혹시 시간을 주면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하루 사이에 진정하는 건 무리였다.
– 괜찮아요, 아버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해요.
그 말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저게 어딜 봐서 괜찮은 모습이란 말인가.
언제나 이랬다. 마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조금은 어리광 부리고 기대도 좋은데, 언제나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자식을 너무 애지중지하면 철부지로 자란다고 들었거늘. 왜 마르는 반대일까.
‘바렌티의 이름 때문인가.’
마르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안다. 너무나 잘 알기에 두꺼운 갑옷으로 여린 마음을 감싸는 건가?
하지만 같은 바렌티끼리는, 가족끼리는 속을 보여도 되지 않나. 조금은 섭섭할 정도다. 마르가 제 나이 또래처럼 행동한 건 한 번밖에 보지 못했을 정도니.
“흐아아아아앙! 아빠아아아!”
그 한 번을 본 것도 빌어먹을 놈 때문이라는 게 문제지만.
작년, 그놈에게 혼사를 거절당하고 펑펑 눈물을 흘리던 마르를 떠올리니 다시 이가 갈렸다.
‘이번에도 네놈이냐.’
이번에도 네놈 때문에 마르가 슬퍼한다. 아직 결혼을 하기도 전인데 벌써 아내를 힘들게 하다니, 그러고도 남편이라고 할 수 있느냐.
눈 앞에 있다면 당장 지면에 내다 꽂고 싶다. 머리만 남기고 땅에 묻어버리고 싶다. 그놈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어떻게 처신을 했으면.’
마르라는 하늘이 맺어준 짝이 있는 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마종공을 홀렸단 말인가.
평생을 홀로 지낸 마종공이 하필 그놈을 마음에 품었다. 그렇다면 마종공이 문제가 아니라 그놈이 문제라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르야.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그놈도 머리가 있는데 너를 두고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겠느냐?”
움찔거리는 주먹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건 놈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마르를 위로하는 것이니.
“사랑은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다. 누가 상대여도, 너희의 관계에 끼어들 수는 없겠지.”
그 말에 마르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게 정답이었다. 마르는 확신을 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 그놈밖에 없더냐? 놈이 한눈을 팔면 그거밖에 되지 않는 놈이라는 거다. 더 좋은 상대를 찾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정답을 골랐다는 안심감에 너무 사족을 붙이고 말았고─
– …….
마르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노려봤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