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3)
결국 이렇게 돼버렸다.
“태자.”
“예, 부황 폐하.”
부황의 부름에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로 소환했는지 짐작이 가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최대한 엎드려야 하는 일이니.
“태자를 보기 힘들구나. 짐이 부르고 나서야 오다니.”
“황공하옵니다.”
낮은 목소리, 그러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위압감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방금 발언은 아들이 자주 왔으면 한다는 가슴 따뜻한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기가 부르고 나서야 온 나태를 탓하는 발언.
‘그렇게 움직일 줄은.’
인정한다. 이번 일에 대해 너무 느긋하게 반응했다. 감찰부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혈연 세력이 발호하려면 최소 2, 3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다.
물론 2, 3년이 남았으니 구경이나 하자, 같은 미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못해도 이번 주부터는 대처 방안을 마련하고, 부황께도 보고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종공은 다른 의미로 판을 뒤엎었다.
‘설마 전서구를 뿌릴 줄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걸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마종공은 본인의 짝사랑을 황태자비 생일 연회에서 처음 밝혔다. 그랬으니 그 자리에 모인 참석자들이 알음알음 퍼뜨리는 걸 바란다고 생각했지, 설마 본인이 직접 나설 줄 알았겠나.
‘계획한 게 아니라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너무 속단했다. 그 마종공이니 철저하게 계획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아무리 봐도 사랑에 눈이 먼 자의 돌발 행동 아닌가. 만약 이게 계획이면 난 태자 자리를 반납하고 야인으로 돌아가겠다. 이런 계획을 꾸미는 공작 위에 설 자신이 없으니.
아무튼 마종공의 돌발 행동은 제국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아직 혈연 세력 구축은 멀었다. 그러나 마종공의 맹활약으로 사교계는 미래의 혈연 세력을 셈법에 넣기 시작했다.
‘끝났다.’
그렇다면 사실상 발호한 것이니 다름없다. 모두가 상수라고 생각하면 그건 상수가 되는 법이니.
2, 3년은 남았다고? 헛소리, 2일이 지나기도 전에 끝났다.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기도 전에.
“제국의 경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니, 태자는 이 홍복에 부족함 없이 대비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준비하지 못한 황태자는 황제의 말에 그저 따라야 한다. 그래야 황제의 분노가 덮치지 않으니까.
다행히 부황도 다소 언짢은 기색만 내보일 뿐, 심하게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번 사태로 인한 변화에 신경 쓰라는 의례적인 말만 남길 뿐이었다.
그 말 이후로 침묵이 내려 앉았지만, 감히 먼저 나갈 수는 없었다. 황제의 허락 없이 움직이는 건 불경한 일.
“크라시우스는 충신이지.”
“예, 실로 그러하옵니다.”
기다림 끝에 부황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만카 대제께서 천명을 받드신 후로, 크라시우스는 언제나 황가와 함께했다.”
부황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부황께서 이번 사태를 다소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니까.
마종공이 마음에 품은 자가 크라시우스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제국백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지.’
부황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과도한 신중, 솔직하게 말하면 의심병 환자다. 그런 부황도 제국백을 향한 의심은 덜한 편이다.
충신에 대한 믿음? 300년의 신뢰? 그런 물렁하고 따뜻한 이유가 아니다. 황가와 제국백은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 그렇다.
제국백이라는 존재가 처음 생겼을 시기, 즉 에이만카 대제께서 막 제국을 건국했을 당시의 제국 정계는 복잡하고 기괴했다.
‘누더기 국가.’
딱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완전한 하나가 아닌 억지로 뭉친 하나.
형식상 대제의 신하이되 사실상 동맹 관계였던 존재들도 많았지. 지금의 후작이나 백작들이 그랬다. 물론 따로 놀던 세력들을 억지로라도 규합하고 후대에 넘긴 대제의 업적은 실로 찬양할만하지만.
아무튼 그 누더기 속에서 제국백은 황제의 직속 봉신으로서 황가를 수호하고 동맹자들을 견제했다. 그 300년의 정치적 동반 관계는 황가와 제국백 가문을 하나 같은 둘로 만들었고.
“…바렌티와 카토반이 크라시우스와 하나가 된다면, 그 역시 황가와 함께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부황도 저리 말할 수 있는 거다. 적어도 제국백 가문이라면 공작가를 등에 업고 황가를 적대하지 않을 테니.
어쩌면 은근히 안도하셨을 수도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게 아닌 이상, 공작가도 결국 다른 가문과 연을 맺게 된다. 어차피 연이 생긴다면 제3자 보다는 제국백이 낫지 않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부황 폐하.”
오히려 공작가가 사용할 혼인 카드를 제국백으로 봉쇄한 것이니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부황도.
‘고맙네, 감찰부장.’
생각해 보면 감찰부장의 존재로 공작가 둘의 카드를 막을 수 있었다.
이게 충신이 아니면 누가 충신이겠나. 제국백만 아니었으면 승작도 고려했을 일이다.
***
태자가 나가는 것을 보고 도로 몸을 뉘었다. 이제는 조금 서있는 것도 피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태자를 소환해서 꾸짖었어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 크라시우스 가문이 얽히며 사태의 심각성이 줄었지만, 공작가의 혼사가 걸린 일을 방치하다니.
‘미숙하군.’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같이 들었다.
태자가 황태자로 책봉된 것이 겨우 2년 전의 일. 심지어 책봉 이전에는 이름뿐인 황자나 다름 없었다.
압도적인 경험 부족. 심지어 그 경험 부족도 내가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나.
‘재능은 있어 망정이지.’
다행히 부족한 경험은 재능과 노력으로 메꾸고,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다. 아주 흡족스러운 후계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합격선은 된다.
…도르고스에 비하면 누구를 비교해도 합격이겠지만.
‘부덕이로다.’
물론 그 역시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황제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자의 부덕일 뿐.
내 후계는 나와 달리 적자이기를 바랐다. 든든한 외가가 황권을 지지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2황자를, 도르고스를 택했다.
그러나 도르고스는 적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도저히 군주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 황권을 지지해야 할 애실론 가문은 도리어 황권에 도전하고 제국의 안정을 뒤흔들었다.
인내가 한계에 몰리고 몰린 끝에, 그들이 선을 넘고도 넘은 끝에 결국 파국이 도래했다.
‘결국 이리 될 것을.’
후회스럽다. 결단을 빠르게 내리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
차라리 적자 계승을 포기하고 도르고스를 빠르게 죽여야 했다. 아니면 도르고스의 계승을 튼튼히 하기 위해 태자를 죽이거나.
딱히 어려운 선택지는 아니다. 도르고스의 자질을 보면 결국 전자를 택했겠지.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너무나 어렵게 걸었다.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낭비하지 않아도 될 시간을 만들고 말았다.
‘그러니 태자만은.’
그러니 태자가 무너져서는 안된다. 황실의 역량을 소모하며 만들어진 태자가 헛되이 무너지게 하면 안된다.
신하들이 눈치를 보며 충고를 하지 못할 때, 나라도 나서서 해야 한다. 완벽한 군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존귀한 황가와 위대한 제국을 위한 나의 사명. 에이만카 대제로부터 시작된 천명을 지키기 위한 숙명.
‘기둥도 굳건하다.’
그리고 대제께서 보우하시는지, 황태자를 뒷받침 할 인재도 있다. 그것도 아주 젊은 인재가.
감찰부장의 나이가 많았다면 태자가 통제하기 힘들었겠지. 그러나 태자보다 어린 인재다. 태자가 통제하기 용이하며, 수십 년은 제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재.
‘심지어 공작가와 혼인이라.’
실로 천운이다. 이제 감찰부장만 제대로 확보하면 공작가 둘을 같이 움직일 수 있다.
그나마 감찰부장이 젊을 때, 내가 살아있을 때 이런 일이 터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황금공 때는 끔찍했지.’
수십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배로 증식하는 부인들.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황금공은 12명의 부인을 들였고, 그건 황금공과 얽힌 가문이 12개 늘었다는 말이 된다.
…그때 정계가 요동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황금공 세력이 순식간에 제1세력으로 커졌었으니.
‘두 명이면 양호하다.’
그 둘이 공작가라는 게 유감스럽지만, 그래도 고작 둘이다. 열 둘에 비하면 티도 나지 않는 수준.
관심은 가지되,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
***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를 부회장실로 호출했다. 같은 귀족을 이리 와라, 저리 가라 하는 건 꺼려지지만, 이번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됐어요.”
연회 때의 일을 설명하자 두 영애는 할 말을 잃었는지 눈치만 살폈다.
이해한다. 눈 앞에서 칼을 빼앗으려는 모습을 본 나도 두려웠었는데, 그저 전해 듣는 이 둘은 어떨까. 분노보다는 망연함이 더 크겠지.
그래도 이 얘기는 꼭 해야 했다. 우리는 동맹이니까. 같이 칼의 옆에 있기 위한 동맹이니까.
만약 마종공이 칼을 빼앗고 독점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대로 발만 동동 구르며 울 수밖에 없다.
“저기, 선배, 마종, 공, 각하라면… 그으…”
겨우 입을 연 루이제 영애지만, 여전히 당혹스러운지 말을 더듬거렸다.
마치 고장이 난 것 같은 모습. 레이디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지만 이 역시 이해한다. 그나마 공작가인 나와 달리 루이제 영애는 남작가니까. 얼마나 부담이 크겠나.
그나마 고위 귀족에 속하는 이리나 영애도 공작이라는 이름에 눌렸는지 눈가를 떨고 있었다.
“맞아요. 제국의 다섯뿐인 공작이시죠.”
그 말에 루이제 영애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그리고 저도 다섯뿐인 공작가죠.”
하지만 당당히 말하는 내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리나 영애도 내가 이리 당당하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바라봤고.
“사랑에 신분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설령 된다고 해도, 저는 마종공 각하와 같은 공작가예요. 제가 그분보다 부족한 건 없어요.”
부족하다. 공작가의 일원과 공작이 어떻게 같겠나.
그래도 당당하게 말했다. 당당함을, 아무렇지도 않음을 연기했다.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내가 굴복하면 이 둘도 망망대해에 표류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를 존중하여 나에게 허락을 맡았다. 나를 처음으로 인정하고 나중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그 처음이 다른 사람한테 굴복해? 심지어 아량을 베풀지, 독점을 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럴 수는 없다. 그건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를 배신하는 거야.
그리고 내 사랑도. 내 신념도.
‘절대 뺏기지 않아.’
칼은 내 거야. 아무리 공작이 상대여도 물러서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대로 나아가면 돼요.”
손을 뻗으며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경쟁자가 나왔으니, 서두르기는 해야겠죠?”
그 말에 두 영애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반응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연심, 갑자기 나타난 강력한 연적. 이제 이 둘도 칼에게 마음을 보일 거다.
‘이걸로 셋.’
둘도 아닌 셋. 한 손으로 한 명씩 잡아도 한 명이 남는 셋.
아무리 공작이어도, 과연 셋이 둘러싸고 있는 칼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