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5)
오라버니가 딱딱히 굳은 게 보였다. 아마 나도 저렇게 굳었겠지.
몇 달을 홀로 간직하고 있던 말이다. 수십, 수백 번을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꺼내지 못했던 말이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하하, 많이 놀라셨죠?”
숨이 가빠질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 아직도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다. 만약, 만약 여기서 농담이었다고 말하면 없던 걸로 돌릴 수 있다. 그러면 오라버니도 이런 장난치지 말라고 웃어넘길 거다.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머리를 헤집으며 혼낼 거다.
그러면 오라버니의 거부를 피할 수 있어. 오라버니가 정색하거나, 싫어하는 걸 피할 수 있어. 오라버니와 사이가 어색해지는 걸 피할 수 있어.
“그래도 진심이에요, 오라버니.”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겨우 말한 거야.’
정말 극한까지 몰리고 몰려서, 마종공이라는 희대의 변수가 튀어나오고 나서야 마음을 고백했다. 지금까지 우물쭈물거리다가 이제야 첫 걸음을 내딛었다.
심지어 부원들의 배려를 받고 말았다. 나를 미워해도 할 말 없는 아이들이, 나를 배려하고 있다.
‘그렇게 나가면 누가 몰라.’
동시에 다섯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 아무리 둔한 사람이어도 눈치 채지 못하면 그게 이상하다.
그래서 나도 입을 열었다. 용기를 내서 나아갔다.
“그, 래?”
내 진심에 오라버니는 겨우 입을 움직였다.
싫어하기보다는 당황한 기색.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 머리가 꼬인 듯한 모습.
차라리 잘됐다. 만약 오라버니가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면 오히려 내가 입을 열지 못했겠지.
‘전부 말하자.’
오라버니가 아무 말도 못할 때 전부 쏟아붓자. 설령 거절을 당하더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자.
지금이 아니면 다음이 없으니까. 이 상황에서도 말하지 않으면 대체 언제 말해? 오라버니가 다른 여자들과 결혼할 때? 내가 죽기 직전일 때?
그때 가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같은 말을 하는 건 싫다. 비극의 주인공 따위가 되고 싶지는 않아.
당당하게 오라버니를 사랑하고 싶어.
***
나는 카피바라가 아니라 여우를 키우고 있었구나.
아니, 여우는 아니고 토끼라고 해야 하나? 사실 딱히 토끼 같지도 않지만.
‘어지럽다.’
애써 이상한 생각을 하며 정신을 보호했지만, 그럼에도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다. 카피바라든 여우든 토끼든 무슨 상관이야.
살짝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정말 폭풍 같은 동아리 시간이었다.
“오라버니를 사랑해요.”
결연한 눈빛으로 당당히 말하던 루이제. 늘 헤헤거리고 마냥 해맑던 그 아이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쭉 말하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제가 겁쟁이라, 너무 무서웠거든요.”
그렇게 말한 루이제는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었다. 나에게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지금까지 입도 열지 못했다고 했지.
‘겁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돌직구였는데.’
심각한 머리와는 별개로 픽 웃음이 나왔다.
대체 루이제 기준에서 용감한 건 어느 수준일까. 아마 내 멱살을 잡고 당장 사귀자고 소리 치는 정도는 해야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들리는 전설로는 황태자비가 그 정도 수준의 고백을 했다고 한다. 루이제의 롤모델은 황태자비구나.
‘대단하네.’
황태자비를 롤모델로 삼은 영애. 정말 대단하다.
그래, 그리고 루이제가 한 말도 정말 대단했지.
“제가 부족한 건 알아요. 저는 고작 남작가잖아요.”
두 공작가를 의식한 발언.
“오라버니를 안 시간도 짧아요. 아직 오라버니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을 거고요.”
짧은 인연을 의식한 발언.
“그래도 그건 제가 부족한 거지, 사랑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그때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내 얼굴이 다 뜨거워질 정도의 박력이었으니까.
아마 루이제도 뒤늦게 흥분이 가시면 이불을 열심히 걷어차겠지. 그런 미래가 보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끄럽더라도 조금은 덜 부끄러워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저, 혼수도 잘 가져올 수 있어요! 작위도 영지도 전부요!”
그 말에는 순간 흠칫했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루이제는 다른 남매가 없기에 남작위와 영지를 물려받는 입장이다. 그 상태에서 나와 혼인을 한다면 나와 루이제 사이의 자식이 그 작위, 영지를 물려받겠지. 그 전에는 사실상 내가 관리할 테고.
그런데 뭔가, 뭔가 좀 사랑에 눈 먼 매국노 같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어감이 좀 이상해.
아무튼 루이제의 열정적인 고백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정말 예상 못한 고백이기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연애 상대이기에.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도 고백하는데 오래 걸렸으면서, 오라버니만 빠르기를 바라진 않아요.”
다행히 내 심정을 아는지 그렇게 말해줬지만.
“그냥 이것만 알아주세요.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선배하고 공작 각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요.”
그 말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연히 알아야지. 그런 고백을 들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그리고 셋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것도요.”
거기까지 떠올리자 금방 웃음이 가라 앉았지만.
‘돌겠네.’
좌 마르게타, 우 마종공. 이제는 전 루이제까지. 이렇게 셋으로도 너무 과분할 정도다. 양손의 꽃을 초월해버렸다.
그런데 더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러면 최소가 전후좌우로 넷인데?
‘와.’
정신이 아찔하다. 넷이나 되면 전부 결혼하는 것도 문제, 전부 거절하는 것도 문제다.
그렇다고 누구는 받고, 누구를 거절하는 건 더 이상하고.
‘…다음에 생각하자.’
일단 잠이나 자야겠다.
루이제가 나에게 독을 풀었다.
‘망할.’
미치겠다. 이런 심각한 상태 이상에 걸릴 줄은 몰랐다. 루이제,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런 악독한 짓을 하다니.
한숨을 내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상태 이상은 더욱 악화됐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자연스레 살피자 보이는 한 여학생.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
‘…쟤인가?’
그리고 곧바로 들이닥치는 자괴감에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느껴지는 시선, 다시 떠오르는 생각.
‘설마 쟤?’
다시 몰려오는 자괴감.
‘시발.’
절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이성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태 이상.
끔찍하게도 도끼병에 걸려버렸다.
“그리고 셋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것도요.”
어제 들은 말이 떠오르자 조금, 아주 조금 루이제가 원망스러웠다.
루이제, 왜 그런 말을 한 거니. 혹시 그동안 짝사랑했던 것에 대한 복수? 혼자 마음을 졸인 게 억울해서 나도 당해보라고 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미안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가혹한 응징 아니냐.
‘이 나이 먹고 도끼병.’
자괴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가슴을 잠식했다. 스물이 넘은 나이에 도끼병에 걸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 대상은 10대 학생들.
장관이 알면 진짜 애새끼냐고 폭소를 할 거다. 과장들도 공중제비를 돌며 비웃겠지. 못 이룬 학창 시절의 연애를 지금 이루는 거냐고.
나도 미칠 것 같다. 객관적으로 지금 내 상태가 얼마나 추한지 아니까 더 미칠 노릇이다.
‘내 팔자야.’
마음으로 울었지만 어쩔 수 없다. 마종공과 루이제에게 연달아 얻어 맞아서 방어기제가 극에 달했으니까. 아마 당분간은 이런 상태겠지.
그러면 최대한 시선이 없는 곳으로 가자. 아무도 없는 나만의 안식처에 있자. 그냥 동아리실에만 쭉 박혀있는 거야.
‘식사는 쿠키로 때운다.’
점심 시간에도 동아리실에 뿌리 박고 있겠다는 굳은 다짐.
그렇게 전술적 후퇴를 다짐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아, 오빠!”
“이리나?”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사람과 마주쳤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리나를 상대로 도끼병이 발발하지는 않지.
감찰부가 요룬 백작가에 한 짓이 있지 않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미친 새끼다.
***
루이제가 이렇게 빠른 애였나…?
“고백했다고?”
“응!”
헤실헤실 웃는 루이제를 보며 멍하니 입만 벌렸다.
진짜다. 애초에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겠지만, 이건 진짜야.
“지금 안 하면 영원히 못할 테니까.”
부끄러운 듯, 동시에 후련한 듯 말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는 말이다. 공녀님의 지지, 마종공이라는 돌발 상황. 이렇게 고백하라고 등을 떠미는 상황에서도 고백을 하지 못하면 대체 언제 할 수 있을까.
온갖 핑계를 대고 미루고 미루다 그대로 늙어 죽겠지.
‘안돼.’
순간 루이제와 공녀님 사이에서 웃고 있는 오빠를 상상했다. 그 모습을 혼자 뒤에서 지켜보는 내 모습도 상상했다.
끔찍하다. 만약 꿈에서 그 장면이 나오면 울면서 기상할 자신이 있다.
‘이제 내 차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잡았다. 루이제까지 움직였다면 이제 내가 움직여야 한다.
물론 당장은 무리야.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그래, 오빠에게 어떤 말로 고백을 할지, 내 최초이자 최후의 고백을 어떤 장소에서 할─
“아, 오라버니한테 이리나 얘기도 했어.”
“…응?”
마치 ‘잘했지?’ 같은 얼굴로 쳐다보는 루이제. 반짝이는 눈과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칭찬해달라는 것 같았다.
“…….”
“이, 이리나! 아파아아!”
애정 표현을 원하는 것 같길래 꼭 안아줬다.
내가 고마운 만큼, 힘을 담아서.
다행히 루이제가 ‘이리나도 오라버니를 좋아해요!’ 수준의 발언을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오빠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있다는 암시 정도만 남겼을 뿐.
‘더 위험해.’
방심할 수 없다. 나와 루이제, 공녀님 말고도 오빠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카데미에 있을 수도 있다. 감찰부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공포만 극복하면 오빠는 정말 멋진 남자니까.
만약, 만약 공포를 극복한 사람이 있고, 루이제의 말을 들은 오빠가 그 사람을 만난다면…
‘절대 안돼.’
그런 꼴은 억울해서라도 못 본다. 나는 공녀님께 허락도 받고 오빠 근처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애만 태웠는데, 누구는 날로 먹어?
그건 절대 안 되지. 만약 그런 녀석이 나온다면 요룬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빠르게 오빠를 찾아 나섰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 우려했던 사태가 터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으니까.
“아, 오빠!”
“이리나?”
다행히 에넨께서 나를 보살피시는지, 제때 오빠를 찾을 수 있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뛰어 온 것 같은데.”
숨을 헐떡이는 나를 보며 오빠가 걱정스레 물어봤다.
가슴 따뜻해지는 걱정. 하지만 지금은 이 따뜻함에 취할 때가 아니다.
“오빠.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한테?”
갑작스러운 등장에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오빠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공작가도 아니고, 작위도 물려받지 못해요.”
귀족들의 정점인 공작가. 일반 귀족보다 더 높은 취급을 받는 작위 귀족. 난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요룬 백작가는 명문가에요. 크라시우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빠 곁에 있기에 부족하진 않아요.”
내 말에 오빠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덩달아 떨렸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면 갈 곳이 없어.
“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마지막에 위축된 건 어쩔 수 없었다.
***
와.
와아아…
‘3과장 시발아.’
혹시 요룬 백작가에 약이라도 뿌렸었냐?
합리적 의심이다. 가련한 이리나는 사악한 3과장의 생화학 공격에 휘말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하네.’
물론 3과장이 요룬 백작가를 털었을 때, 이리나는 이미 아카데미에 있었다는 건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난 사실 눈치도 없고 머리도 없다.
그냥 그렇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