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6)
어느 현자가 그런 말을 했다. 밑바닥에도 바닥이란 게 있다고.
현자는 괜히 현자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게 무슨 말인지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다.
“신년하례식이 있으니, 그날을 기다려야겠구나.”
이보다 더한 충격이 없을 거라 생각한 마종공의 고백을 시작으로─
“그럼 저도, 오라버니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요?”
다섯이나 되는 주연들을 거절하고 나를 선택한 루이제를 거쳐─
“오빠 곁에 있기에 부족하진 않아요.”
설마, 설마 나를 좋아할 줄은 몰랐던 이리나까지.
‘이게 대체.’
살며시 미간을 짚었다. 요즘 두통이 떠나지를 않는다.
물론 너무나 과분한 사람들의 고백을 밑바닥 취급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내 멘탈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 뿐.
솔직히 이건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고결한 정신 세계를 가진 대마법사나 성직자라도 내 입장이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걸.
‘저게 1주도 안돼서.’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생에 한 번 받아도 두근거릴 고백을 무려 1주 사이에 연달아 받았다. 이게 진정한 삼연벙인가?
그런데 삼연벙은 한 명한테 당한 거지 세 명한테 협공 당한 건 아니지 않나? 이건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
“저도 당장 답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루이제보다 늦었는데 새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홀로 새로운 용어를 고민하려는 찰나, 어색하게 미소 짓는 이리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묘하게 물기 섞인 목소리도.
“그냥, 그냥 오빠가 저를 봐주셨으면 했어요. 미안한 동생이 아니라… 그냥 여자로 봐주셨으면 해요.”
침대에 눕혔던 몸을 겨우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쉬면 복이 나간다고 하지만 상관없다. 더 이상 나갈 복도 없는 것 같으니.
아무튼 이리나는 그 말을 남기고 황급히 도망쳤다. 굳을 대로 굳은 내 몸은 빠르게 사라지는 이리나를 잡지 못했다.
사실 잡을 수 있었어도 그냥 보내줬겠지. 그 상황에서 잡으면 뭐 어쩔 건데.
‘받을 수도 없고.’
이리나 말대로 마종공과 루이제의 고백에 대한 답도 주지 못했으면서 이리나의 고백을 받는 건 이상하다.
‘거절할 수도 없고.’
같은 이유로 이리나의 고백부터 밀어내는 것 역시 이상하다. 다른 고백에 대한 답은 보류했으면서 자기 고백만 빠르게 차단한다? 그건 이리나가 울어도 할 말이 없다. 자기가 그렇게 싫냐고 통곡하겠지.
‘도망갈까.’
순간 진지하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한 1주 정도. 아니, 사흘이라도 좋으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그러면 추가 고백을 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차라리 지금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지금부터 닷새 정도 구금되면 그거보다 좋은 게 없다.
‘다시 류티스를 패면…’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왕족 폭행, 심지어 상습범. 그러면 따로 쌓은 스택이 없어도 바로 구금으로 갈 수 있다. 저번과 달리 닷새가 아니라 최소 개월 단위로.
물론 까딱 잘못하면 구금이 아니라 사형이겠지만, 어차피 인생은 모 아니면 도 아니겠나.
그래, 까짓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아.’
이성을 잃기 직전에 통신구에서 빛이 뿜어졌다.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진짜 눈 뒤집혀서 날뛸 뻔했어.
“감찰부장입니다.”
내 인생을 구한 은인. 그렇게 생각하자 표정이 절로 온화해졌다.
그렇기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생명의 은인에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일 수는 없으니.
– 허, 지낼만하냐? 안색이 생각보다 좋구나.
그리고 장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도로 일그러졌다.
‘시발.’
정신이 없어서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내가 고통받을수록 좋아 죽으려는 양반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장관이 루이제와 이리나의 고백까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마종공 하나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황태자는 마종공 쇼크로 이루어질 정계 격변에 고심하느라 잠잠한 상황. 반면 장관은 정계 따위 관심 밖이다. 은퇴만을 노리는 평범한 백작 입장에서 마종공이 누구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일까.
그런데 그 결혼 상대가 서로 엿을 먹고 먹이는 부하다? 이건 못 참지.
– 흐음, 생각해 보니 공작 각하의 부군이시니 예의를 차려야겠군요.
소름 돋는 존댓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 인간한테 존대를 듣다니, 세상이 망할 징조다.
“헛소리 마십시오! 누가 부군입니까!”
– 당연히 너지. 너 빼고 다 그렇게 생각할 거다.
존댓말은 사라졌지만 기분 나쁜 낄낄거림이 이어졌다.
‘당연히…’
그리고 장관의 말을 듣자마자 맥이 풀리고 말았다.
당연히, 당연히. 짧은 단어지만 그 무게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제3자인 장관의 증언을 들었으니까.
그래, 남들이 보면 내가 마종공의 남편이 되는 건 확정이구나.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아무리 제국백 후계자지만 상대는 공작이다. 감찰부장? 아무리 그래도 마탑주에 비할 바는 아니다. 쌍방의 의지가 아닌 일방적인 간택으로도 결혼을 진행할 수 있는 격차.
사실 황태자비 생일 연회에서 마종공에게 납치를 당했어도 귀족들은 ‘예쁜 사랑하세요.’ 라고 박수를 쳐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을 ‘감찰부장이 고백을 받지 않은 것.’ 이 아니라 ‘마종공이 결혼 준비를 하는 것.’ 으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는 어떻습니까?”
침묵 끝에 겨우 내뱉은 한마디.
– 알고 싶냐?
진심이 담긴 장관의 답변. 그 짧은 말에 침통히 고개만 저었다.
이번 사태로 가장 소란스러울 곳은 정계의 중심인 제도. 그리고 저 인간이 저렇게 진지할 정도면 제도 상황은 난장판이라는 거다.
‘당분간 쳐다보지도 말자.’
괜히 제도에 기웃거리다가는 서로 눈이 마주친 포켓몬 트레이너처럼 강제로 붙들릴 거다. 그건 사양이지.
– 아, 그리고.
신년하례식 전까지는 황태자가 불러도 드러눕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이, 장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었으면서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미간과 작게 들리는 침음성.
‘뭔데.’
불안하게 왜 그래.
– 너. 먼저 맞는 게 좋냐, 나중에 맞는 게 좋냐?
“예?”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인 장관은 심상치 않은 말을 꺼냈다.
“…먼저 맞는 게 낫죠?”
조심스레 답변을 하자 장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 나도 방금 안 건데, 마종공 각하께서 움직이셨다.
본능적으로 손이 떨렸다.
두려운 말이다. 이미 마탑 마법사들을 전서구로 사용한 마종공인데,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제국 전체에 삐라라도 뿌리려는 건가?
– 너네 영지로.
…
예?
***
성이 발칵 뒤집어졌다.
“전부 고급으로 준비하게. 술이든, 차든, 과자든, 식사든. 하나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안되네.”
“예, 마님.”
내 말에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원래 시종장은 직접 현장에서 뛰기보다는 지휘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급한 상황에서는 노련한 시종장의 참여가 절실하다.
“마님, 정원 관리도 전부 끝냈습니다.”
“수고했네, 시녀장.”
시종장이 떠나자마자 다가오는 라우라의 말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라우라가 끝났다고 하면 완벽한 거겠지. 정원은 성의 얼굴이나 마찬가지. 최소한의 체면은 세웠다.
“니아, 이거 아무래도…”
주변을 살피던 라우라가 작게 속삭였다.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는 라우라가 몹시 동요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칼… 때문이겠지.”
“세상에.”
손으로 입을 막은 라우라. 당혹감과 대견함, 뿌듯함과 아찔함이 뒤섞인 표정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복잡한 심정이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공작이 움직이는가. 칼을 원망할 일이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다.
동시에 대견하다. 내 아들이 공작도 홀리는 매력적인 남자라니. 희미한 원망보다는 압도적 대견함, 뿌듯함이 크다.
– 카토반 공작가의 집사장, 데오도르 제다스 오브 시칠라입니다.
하지만 그 대견함으로도 지금의 아찔함은 가릴 수 없었다.
갑자기 걸려온 카토반 공작가의 연락.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카토반 공작가의 집사장, 시칠라 백작.
제도에 있는 마종공을 대신하여 공작령을 관리하고 있으니 사실상 공작령의 2인자나 다름없는 인물. 그런 거물의 연락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짐작 가는 것이 있어서 얼떨떨하게 마주 인사했다.
– 마종공 각하께서는 부인의 현명함과 자애로움을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동안은 연이 없어서 미처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제국의 기둥을 낳은 분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정중함과 별개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거절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을 받을지 말지는 주인의 재량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의 요청, 심지어 무슨 이유로 대면을 원하는지 뻔한 상황인데 거절하기는 어렵다. 예비 시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예비 며느리의 청을 밀어내면 호감이 분노로 돌변할 테니.
‘며느리.’
아찔한 단어에 현기증이 올 것 같다.
‘내가, 시어머니.’
더욱 어지럽다. 물론 듣고 싶은 호칭이기는 했다. 곧 들을 수 있는 호칭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건 마르게타, 그 아이에게 들을 줄 알았다. 두 번이나 공작가와 얽히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그 아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종공이 나타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예상치 못한 시기에.
– 미안하오, 부인. 요즘 의회의 일이 바빠 차마 돌아갈 시간이 없소.
막막함에 급히 제도에 있는 빌리에게 연락을 걸었지만, 빌리는 의회의 일을 들먹이며 돌아오지 않았다.
‘배신자.’
다시 그때 일을 떠올리니 작은 분노가 생겼다. 비겁하게 혼자 발을 빼다니. 당분간 빌리와는 각방이다.
“마, 마님!”
저 멀리 달려오는 집사장을 보자 상념이 깨졌다.
무뚝뚝한 빌리의 영향을 받았는지 침착한 편인 집사장이다. 그런 집사장이 저렇게 당황할 사건.
‘도착했구나.’
예비 며느리, 마종공이 왔다.
‘…어지러워.’
당장 침대에 눕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