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7)
가빠지는 호흡 때문인지 손까지 조금씩 떨렸다. 하지만 긴장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손님을 눈 앞에 두고 떠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최대한 평온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찻잔을 잡았다. 찻잔이 입에 가까워질수록 퍼지는 은은한 향기에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다.
아주 조금만.
‘빌리.’
찻잔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 자리에 없는 빌리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내가 백작부인이지만 작위를 가진 건 빌리다. 작위 귀족인 공작을 맞이할 자격으로는 빌리도 충분, 아니 오히려 빌리가 나서는 게 맞다.
비록 마종공이 나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예비 시어머니나 예비 시아버지나 그게 그거 아니겠나. 마종공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두고 봐요.’
마종공이 온다는 소식에 혼자 발을 뺀 치사함. 절대 잊지 않을 거다. 돌아오면 한동안 식사도 따로, 방도 따로다.
…나한테 그럴 정신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향이 참 좋군요.”
바로 앞에서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백발에 하얀 눈을 가진 여인. 찻잔을 들고 있는 하얀 여인은 반달처럼 휘어진 눈에 따스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마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자 하얀 여인, 마종공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는 부인을 몹시 존경하고 있는데, 높임말을 들으니 부끄럽군요.”
그 말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편히 말씀하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미 마종공에게 존대를 듣는 걸로도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마종공은 황실, 그리고 같은 공작들을 제외하면 전부 아랫사람으로 대한다고 들었다.
실제로 나이, 경력, 작위. 모든 것이 만인의 위이니 이상할 것도 없고.
“과분한 말씀입니다. 각하께서도 저를 존중해주시는데 어찌 제가 편히 말하겠습니까.”
굳어버린 입을 겨우 움직여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좋다. 이거면 문제없는 대답이다. 상대가 나를 존중하니 나도 상대를 존중하겠다, 이만큼 반박할 수 없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후후,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다행히 마종공도 그냥 넘어갔지만…
‘기분 탓인가.’
어째 마종공의 눈빛이 ‘이번은 물러나주겠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애써 기분 탓이라 생각하면서도 본능이 외쳤다. 지금은 사양할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말을 놓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마종공에게 말을 놓는 사람.’
잠잠해졌던 현기증이 다시 도진다.
황제 폐하조차 사석에서는 마종공을 정중히 대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떤 용감한 사람이 반말을 하겠나. 일단 나는 못한다. 절대 못 해.
“프흐─! 이제 한 가족이니 편하게 말해! 나도 아가씨라고 부를까?”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내 인생 최초로 만난 공작, 너무나도 화려했던 만남. 아직도 깔깔거리는 웃음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공작들은 전부 이런 건가? 다른 세 분은 만나지 못했지만 조금은 두려워진다.
“부인, 잔이 비었군요.”
멍하니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자 마종공이 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 각하. 제가 하겠습니다.”
뒤에 있던 라우라가 황급히 마종공을 만류하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방금, 마종공이 직접 내 잔에 차를 따라주려고 한 거야? 시녀장도 있는데 공작이 직접?
‘칼…’
빌리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없는 장남이 떠올랐다.
원망은 아니다. 치사하게 발을 뺀 누구와 달리 그 아이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아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공작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니. 대체 어떻게 홀렸길래…
“고맙습니다, 시녀장.”
라우라가 내 잔과 마종공의 잔에 차를 채우자 마종공은 빙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물론 라우라도 마종공의 존대에 크게 동요하는 건 당연지사.
‘작정했구나.’
그 광경에 무심코 쓴웃음을 지을뻔했다. 칼을 업고 기른 유모인 라우라에게도 존대를 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
정말, 정말 철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칼의 주변인을 전부 포섭하겠다는 다짐이 보였다.
1시간 정도 후, 접견실이 아닌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핏 보기에도 아름답고 싱그러운 곳이더군요. 저도 나름 엘프라 그런지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정원사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칭찬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첫 만남부터 떠나지 않던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 마종공은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전부 눈에 담겠다는 듯이.
아까와 달리 묘하게 올라간 귀, 조금은 상기된 얼굴. 정말 엘프에게는 자연을 좋아하는 피가 있는 건가?
“여기가 아가가 놀던 정원.”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엘프의 피가 아니라 짝사랑의 피였구나.
그리고 칼은 어릴 때부터 정원이 아니라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미숙하고 어미 같지도 않은 어미 때문에.
입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기뻐하는 마종공에게 ‘여기 아닙니다.’ 같은 말을 하기는 조금 부담스러우니.
“저 나무는?”
이리저리 둘러보던 마종공의 시선이 한쪽에 꽂혔다.
마종공의 시선을 따라가니 홀로 동 떨어진 나무 두 그루가 보였다. 나무 앞에 작은 비석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특이할 것도 없는 것들.
하지만 마종공은 기가 막히게 그 나무를 눈에 담았다. 이 정원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누구에게도 듣지 않고 스스로 찾아냈다.
“기념수입니다. 왼쪽 나무는 칼이 태어났을 때, 그 옆은 에리히가 태어났을 때 심었던 것들이죠.”
그 말을 하면서도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빌리가 땅을 파고, 내가 심었던 묘목. 이제 그 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자라 저렇게 커졌구나.
“그 아이들이 제 짝을 찾으면 아이들이 살 저택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아이들의 탄생과 함께한 나무니 앞으로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게 맞다. 이왕이면 손주들의 기념수도 그 옆에 심었으면 좋겠는데.
절로 따뜻해지는 마음에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도 하고 말았다.
***
평범한 나무에 기이할 정도로 시선이 끌렸다.
“기념수입니다. 왼쪽 나무는 칼이 태어났을 때, 그 옆은 에리히가 태어났을 때 심었던 것들이죠.”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시선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아가의 탄생을 기념하는 나무라니,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중한 나무 아닌가.
400년 전에 불탔다는 세계수가 다시 이 땅에 재림한 거다. 앞으로 저 나무는 내 마음 속의 세계수다.
“그 아이들이 제 짝을 찾으면 아이들이 살 저택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부인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면 저 세계수는 내 성에 오겠구나. 시종장에게 말해서 미리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무엇보다 소중한 나무니 최고의 자리를 구하는 게 옳다.
세계수를 심으면 그 주변에 꽃도 심자. 나와 아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수만큼, 아름답고 화려하게.
“정말 아름답군요.”
“제 보물입니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부인은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진심이 가득한 미소. 아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웃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분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 무리한 방문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던 분이 저리 밝게 웃으니 못할 짓을 한 기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가는 아카데미에 꽁꽁 숨어있지 않나. 만약 무작정 아카데미로 가면 아가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겠지.
그래서 이 방법을 택했다. 아가가 아닌 아가의 주변인과의 관계를 택했다.
‘언젠가는.’
지금은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눈치를 보는 관계에서 편안한 관계가 되리라.
차근차근, 꾸준히. 그렇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
“트릭시. 종족의 차이에서 오는 어색함은 어쩔 수 없단다.”
과거,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씀.
“이 엄마도 할머니와 어색했잖니.”
“할머니하고요?”
그 말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와 할머님은 정말 사이가 좋으셨으니까.
“그래. 하지만 자주 만나고 익숙해지면 어색함은 사라진단다. 종족이 달라도 같은 지성체기는 하니까.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내 볼을 콕 찌르며 쿡쿡 웃음을 흘리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엘프가 아닌 인간이다, 라는 마음도 중요하단다. 인간 사회에서 엘프의 생각을 고집하면 민폐잖니? 그럴 거면 엘프 구역에서 살지.”
실제로 훌륭히 인간 사회에 정착한 어머니의 말씀에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그렇구나. 내가 아무리 엘프의 피가 흘러도, 인간처럼 지내면 인간이구나.
“그래서 이 엄마는 엘프 나이를 버렸단다.”
“…네?”
어렸을 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했다.
기본이 수백인 엘프의 나이. 그걸 인간 사회에 가져오면 혼란만 야기한다. 그렇다면 그걸 인간에 맞게 조정하면 그만.
어머니는 나이의 10%만을 택하셨다. 그렇기에 할머니보다 어린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나도.’
비록 순혈 엘프는 아니라 어머니 같이 10%는 부족하지만, 적어도 20%는 되겠지.
그래. 내 인간식 나이는 24세다. 아가보다 3살 많고, 부인보다 훨씬 아래인 24세다.
그렇게 생각하고 부인을 대하자. 그렇다면 부인도 나에 대한 어색함을 지우고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
‘…어머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는구나.
당신 같은 슬픔을 느끼지 말라고 한 유언. 그 유언으로 아가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나는 세상을 함께할 반려를 찾았다.
인간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엘프 나이를 버리라고 한 조언. 그 조언으로 나는 아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각하?”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부인이 의아한 듯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인.”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조금 민망하다. 시어머니가 될 분 앞에서 너무 정신이 팔렸구나.
‘반성하자.’
인간답게 생각하자. 어른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