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08)
마종공이 성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대비했지만, 다행히 저녁이 되자 평범하게 돌아갔다.
그래, 마종공은 마탑의 일로 바쁘겠지. 몇 시간 정도는 몰라도 하루를 통째로 소비하는 건 무리가 있을 거다.
“근래 들어 가장 즐거웠던 시간입니다. 성대한 대접에 감사합니다, 부인.”
떠나기 직전, 정중히 목례를 하는 마종공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일 뻔했다.
너무 과분한 인사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존대는 슬슬 익숙해졌지만, 단순히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존중은 익숙해지지 못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각하.”
접어지려는 허리를 붙들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만약 내가 마법사였다면 조금은 괜찮았을까? 대륙 최고의 마법사와 보내는 시간은 같은 마법사에게 있어 황금보다도 귀한 시간일 터.
까마득한 선배와 마주한다는 건 긴장되겠지만, 냉철한 마법사들이라면 이득에 집중하지 않을까 싶다.
‘쓸데없는 생각을.’
물론 내가 일반인인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지만.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대답에 살포시 미소를 지은 마종공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부인. 제 작은 성의니 부디 받아주시길.”
“감사합니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마종공이 내민 물건을 받아버렸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 공작이 직접 내민 물건이라면 겸양으로도 사양할 수 없지 않나. 쓸데없는 과정은 괜히 공작의 팔만 아프게 할 뿐이다.
심지어 마종공도 내가 순순히 받은 것이 만족스러운지 더욱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거절했다면 서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패?’
뒤늦게 물건을 확인했다. 촉감은 금속, 색은 마종공이 연상되는 깨끗한 백색의 패.
화려하기보다는 밋밋한 외견이지만, 결코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마나.’
밋밋한 외견과 반비례하는 짙은 기운이 패에서 풍겼으니까.
마나에 대해서는 교양 수준으로 접한 나도 알 정도로 강한 마나의 기운. 게다가 아까부터 마나가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다.
…그래서 이게 뭐지?
“각하, 실례지만 이건…”
비범하기는 하다. 기사의 검기나 마법사의 마법이 아닌 이상, 마나를 육안으로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몹시 신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런 물건은 오히려 마탑이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도저히 정체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 그렇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둘도 없을 귀빈께 드리는 성의입니다.”
그러나 마종공은 오히려 질문을 한 것이 기꺼운지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 은인임을 뜻하는 패입니다. 카토반 공작가나 마탑에 그걸 보이면 부인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봐드릴 겁니다.”
문제는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너무나 무거웠다는 것.
패를 잡은 손이 다시 떨렸다. 마종공의 은인이라고? 공작가와 마탑이 최우선으로?
‘세상에.’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르겠을 현기증이 들이닥쳤다. 보물이다. 쓰지 않고 가지고 있기만 해도 어지간한 것들을 누르는 보물이야.
공작가의 최우선적 배려를 받는다면 할 수 있는 일보다 불가능한 일을 찾는 게 더 빠르다. 정계나 사교계에서의 입지가 급격히 넓어지겠지.
그리고 마탑은 제국을 넘어 대륙 마법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그런 마탑의 배려를 받으면 온갖 마도구나 마법사들을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다. 백작령 전체의 홍복이 되기에 충분.
“각하, 너무 과분합니다. 은인이라뇨.”
경악은 잠깐, 판단은 빠르게.
이 작은 패가 지닌 힘을 파악하자마자 신속히 반납을 시도했다. 이건 안된다. 차마 가지고 있기 곤란한 보물이다.
물론 크라시우스 가의 여력은 직접 받은 보물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 패는 은인에게 주는 물건이지 않나. 우리는 마종공에게 그만한 은혜를 주지 못했다.
‘앞으로 은혜를 받겠다는 의미겠지.’
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받은 게 있다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마종공에게 이런 보물을 받는다면, 그에 걸맞는 성의도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 성의는 높은 확률로 칼.
‘안돼.’
초조하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복잡했던 머리는 냉정하게 가라 앉았다.
아무리 어미라고 할 수 없는 어미지만 이건 안된다. 그 아이의 행복을 빌어주지는 못할 망정 앞장서서 팔아버리다니, 절대 있을 수 없다.
만약 마종공이 순수하게 칼을 좋다고 하면 막을 수 없다. 칼이 마종공을 받아들인다면 조금 부담스럽지만 축하할 생각이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안된다. 가문과 영지를 위해 아들을 팔 수는─
“걱정 마십시오, 부인.”
파르르 떨리던 손에 마종공의 손이 겹쳐졌다. 마치 소중한 것을 보듬듯 포근한 손길에 불안함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부인께서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따뜻하게 웃는 마종공. 모든 걸 포용하는 어머니 같은 미소.
“저는 아가를 사려는 게 아닙니다.”
그 말에 몸이 흠칫 떨리고 말았다. 내 생각을 완전히 읽은 말이었기에.
혹여나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언짢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종공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온전한 것. 강압적으로 얻은 것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강압을 원하지 않는다, 온전한 것을 원한다.
즉 칼과 억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만일 저 말이 진심이라면 내가 걱정할 게 없다. 칼이 마종공의 짝사랑을 받아들여야 결혼을 하겠다는 의미니.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나,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마종공이 이런 허술한 거짓말을 할까?
“그리고 이 패는 부인께서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부인께서는 이 세상 무엇보다 귀한 보물을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덧붙인 마종공의 말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무도 없는 침실. 나 홀로 침대에 걸터앉아 백색의 패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바라는 게 있기는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드리기는 조금 큰 물건이지요.”
마지막에 이르러서 마종공이 넌지시 말한 한마디. 그 말에 조금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바싹 조여졌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정말로 원하는 걸 직설적으로 듣는 게 마음이 편하다.
“부인과의 우정을 원합니다.”
오히려 복잡해질 줄은 몰랐지만.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다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쿡쿡 웃음을 흘리는 마종공의 모습에 연신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노골적인 것도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마종공이 남긴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나에게 잘 보이고, 칼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그렇기에 조건 없는 호의를 보이는 것일 터.
‘진심이구나.’
문득 마종공과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마종공은 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원에서 기념수를 언급한 걸 빼고.
하지만 말 하나하나에 담긴 애정, 은근히 비유로 언급되는 칼.
‘진심이야.’
칼을 향한 마음이 유흥이나 잠깐의 타오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강압이 아니라 칼의 동의를 구하여 결혼으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을 알았다.
대체 왜 칼에게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래,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마종공이 칼에게 빠진 이유가 무엇이든, 마종공이 칼을 존중하고 나서면 내가 막을 이유가 없다.
괜히 칼을 위한다고 움직이다가 방해만 될 수도 있다. 만약 칼이 마종공에게 마음을 열려고 할 때, 내가 마종공을 막으면 장애물만 되지 않겠나.
‘미안하구나.’
아카데미에 있을 귀여운 며느리에게 들리지 않을 사과를 했다. 마종공의 등장은 그 아이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터.
며느리로 점찍은 아이기에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 하지만 칼의 연애 문제에 내가 개입할 자격은 없다.
‘…잘하겠지.’
워낙 총명하고 따뜻한 아이니 내 도움이 없어도 잘 이겨낼 거다.
그렇게 믿는다.
– 똑똑
그렇게 슬슬 눈을 감으려고 할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문 밖에서 들리는 빌리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배신자.
‘지금 왔다고?’
얄밉다. 차라리 며칠 후에 왔다면 정말 바빴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당일에 돌아와? 심지어 마종공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바로 각방 선언이다. 한동안 얼굴도 보지 않을 자신이 있다.
“들어오세요.”
분노를 억누르며 입을 열자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부인. 마침 깨어 있었구려.”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은 빌리. 그리고 양손에 잔뜩 들린 꽃다발과 작은 상자.
“그건 뭐죠?”
“돌아오는 길에 눈에 들어와서 가져왔소. 우리가 약혼 시절에 들렸던 꽃집, 아직도 남아있더군.”
꽃다발을 들며 추억을 언급하는 빌리.
“상자는요?”
“당신이 좋아하는 디저트요. 호르펠트 백작이 추천한 카페에서 가져왔지.”
고급스러운 문양의 상자를 보이며 내 취향을 언급하는 빌리.
그 모습에 딱딱하게 굳었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빌리.”
“말하시오, 부인.”
내 변화에 빌리도 다소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헛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나가요.”
내 단호한 각방 의지에 빌리는 침통히 방을 나갔다.
‘정성은 좋네.’
그래도 이 정도 정성이면 조금은 봐주자. 1주 각방에서 3일 각방으로 내리는 거면 충분하겠지.
***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 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
“아, 예. 감사합니다.”
마종공이 타일글레헨 백작령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어머니는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로 연락을 걸었다.
의외다. 에리히에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할 정도로 성화였던 어머니 아닌가. 거기에 마종공도 직접 봐서 극심한 혼란 상태일 줄 알았는데.
–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예…”
이상한 발언이다. 이 시기에 어떤 선택이든 응원하겠다는 말. 심지어 어머니는 마르게타를 점찍었지 않았나.
‘마법인가?’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설마 마종공이 마법으로 어머니를 홀린 건가?
아니, 설마 마종공이 그런 치졸한 방법에 손을 대지는 않겠지만…
‘그럼 어떻게?’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를 우호적 중립으로 끌었다고?
그게 더 무서운데. 차라리 마법이라고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