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1)
선배는 오늘 작정한 듯이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 태자비 손을 빌렸으면서 성과가 없어? 에리, 혹시 빚이 뭔지 모르니?
“아니…”
– 알면서도 그래?
날카롭게 쳐다보는 선배의 눈길에 본능적으로 몸이 쪼그라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통신구 너머의 눈빛이라 느껴지지도 않지만 몸이 기억하고 움츠러든다.
세상 사람들은 속고 있다. 선배의 내숭에 속고 있어.
– 공녀와 공작이 부딪혔어. 이런 상황이면 후작이 참가해도 묻힐 수밖에 없는데, 후작 영애가 이렇게 잠잠하면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줄까?
“아니…”
– 알면서도 그래?
이상하다. 분명 아까 들은 말 같은데 또 듣네.
선배가 조목조목 뼈 아픈 조언─ 을 가장한 폭행을 할 때마다 내 정신은 수확철 곡식처럼 탈탈 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배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일이 이렇게 흐를 줄 알았으면 하늘이 무너져도 선배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만약, 만약 선배에게 손을 빌리지 않았다면 평범한 걱정과 놀림 정도만 듣고 끝났겠지. 하지만 손을 빌리고 말았다.
이제 내 연애 문제는 선배의 자존심 문제다. 태자비가 관여했는데도 성과를 얻지 못한다? 이건 내가 괜찮아도 선배가 용납하지 못하는 단계.
‘거기서 마종공이.’
이 사태의 시발점을 떠올리자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니, 설마 마종공이 난입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원래는 신년하례식 때 부장님이 제도에 오면 그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선배도 내 방식이 신중하고 괜찮은 선택이라며 동의했고.
그런데 마종공의 난입으로 판이 엎어졌다. 제국의 시선은 순식간에 공녀와 공작의 대결, 그리고 120년 만에 나타난 마종공의 반려에 꽂혔다. 후작 영애는 ‘따위’ 취급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 거다.
– 너무 늦어버렸어. 여유 부리다가 시기를 놓친 거지.
그러게 왜 그랬어, 라고 덧붙이는 선배를 보자 울컥할 뻔했다. 분명 내가 신년하례식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을 때는 동의했으면서 이제 와서 모른 척이라니.
– 왜 그렇게 봐?
“아니야…”
물론 선배의 눈빛에 도로 고개를 숙였지만.
그래, 지금은 누구를 원망하고 뭐고 할 시간이 아니다. 선배 말처럼 시기를 놓쳐 버렸으니까.
‘부장님 눈에 들어올까?’
그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이미 마종공에게 공격당한 부장님 입장에서 새로운 여인의 고백은 당혹감보다 황당함을 줄 수도 있다. 어쩌면 놀리는 걸로 알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
– 또 쓸데없는 생각.
이런 내 진지한 고민을 읽었는지, 선배는 퉁명스레 말했다.
– 이미 늦었으면 빨리 움직일 생각을 해야지,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영원히 못 움직여.
맞는 말이지만 무책임한 말이기도 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아나?
너무 늦었으니 그나마 단추라도 제대로 꿰고 싶어서, 더욱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싶지 않아서 신중한 거 아니겠나.
‘전부 자기 같은 줄 알아.’
삐죽 입술이 삐져나왔다. 자기는 가능하다고 너무 편하게 말하는데, 애초에 세상 사람들이 다 선배 같은 행동파면 세상은 이미 무너졌을 거다.
반했다는 이유로 황위 계승은커녕 죽음과 가까웠던 1황자에게 청혼한 사람이니 오죽할까. 정말 본받을 행동력이지만, 따라할 수 없는 광기다.
‘저런 사람이 정숙.’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저 사람이 정숙한 거면 나는 수녀다.
선배는 자신의 본성을 철저하게 감추며 정숙한 숙녀를 연기했다. 그 연기는 너무 잘 먹혀서 선배는 정숙하고 현명한 황태자비라는 인식을 굳혔고.
‘말도 안되는 소리지.’
정말 정숙하고 조용한 사람이면 내가 같이 다녔을까? 난 그런 재미없는 사람은 별로야.
…오히려 나보다 더한 모습도 있는 것 같─
– 에리.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낮게 울리는 선배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다니, 누가 들어도 이상한 생각 중이었다는 거잖아.
“걱정하지 마. 난 부장님하고 오─래 지낸 사이라고. 누구보다 부장님을 먼저 만난 것도 나인 걸?”
선배의 눈이 슬슬 가늘어지자 빠르게 선수를 쳐서 말했다. 나한테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인연이라는 무기가 있다고.
그리고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난 누구보다 먼저 부장님을 만났어. 공녀보다도 먼저, 마종공보다도 먼저.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이미 부장님하고 가깝잖아. 고백만 하면, 내 마음을 보이기만 하면 더 가까워질 수 있어. 부장님도 나를 밀어내지 않을 거야.
– 흐으응.
“…왜 그래?”
애써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지만, 선배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선배는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우는 목소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 부장님은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에에~ 내가 걔네보다 더 먼저 만났는데에에에~
그 말을 듣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네가 한 1년 정도 후에 할 말 같은데. 미리 들으니 어때?
“선배!”
이번에는 진심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시끄러워. 나 귀 멀쩡해.
물론 선배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태자비만 아니면…!’
억울하고 원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진짜 태자비만 아니라면 한대 때렸을 텐데!
…어쩔 수 없다. 이건 2과장을 대신 때리는 수밖에.
***
에리는 씩씩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통신을 끝냈다. 감히 황태자비보다 먼저 자리를 뜬 무례지만, 정신적 충격이 큰 것 같으니 넘어갔다.
‘정신 좀 차려야 돼.’
빛을 잃은 통신구를 조용히 매만졌다. 후배의 애달픈 짝사랑을 놀리는 건 슬프지만, 그래도 필요한 과정이다.
분명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물쭈물 거리는 걸 보면 뻔하다.
‘인연을 믿고 저러는 거지.’
본인이 위기라는 건 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도 안다. 에리는 조금 독특한 아이지, 멍청한 아이가 아니니까.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건 일말의 기대를 품었기 때문. 감찰부장과 오래 지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 그게 부질없는 희망인 줄도 모르고.
‘…멍청한 건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가 사랑 때문에 눈이 멀고 머리가 꽃밭으로 간 건가?
애석한 노릇이다. 사랑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냥 고백하면 되는 걸.’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빠르게 쟁취하면 그만 아닌가. 이해를 못하겠다.
“서, 선배애애애애! 부장님이, 부장님이이이이!”
잠시 미래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상이 떠나가라 통곡하며 질질 짜는 에리의 모습. 결국 감찰부장과 이어지지 못해서 멀찍이 결혼식만 바라보는 에리의 모습.
“내가,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그리고 공허한 눈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에리의 모습.
‘너무 잘 상상되는데.’
어지럽다. 직접 본 것처럼 너무 간단히 상상됐다. 이렇게 쉽게 떠오른다는 건 유력한 미래라는 뜻 아니겠나.
‘어쩔 수 없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한 번이라도 도운 이상 나도 에리의 연애에 관여 중인 거나 마찬가지다.
아니, 만약 돕지 않았더라도 파국이 예정된 후배의 미래를 방치할 수는 없지 않나.
“헤헤, 나도 선배처럼 평생 같이 할 사람 찾으면 좋겠당.”
몇 년 전, 모두가 경악하고 반대했던, 심지어 아버지도 난색을 표하고 가문에서도 다시 생각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던 청혼.
그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게 에리였다. 사실 에리 덕분에 용기를 가지기도 했고.
내 소중한 후배, 받은 게 있으니 돌려주기는 해야지.
‘복 많은 남자네.’
감찰부장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에리가 일반적인 영애와 다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독특한 재미가 있지 않나. 게다가 은근히 심성도 곱고 정도 많은 애다.
부인이 에리 하나여도 복 받은 건데, 공녀에 공작이라. 정말 에넨께서 축복을 내리신 건지.
물론 나와 결혼한 전하보다는 못하겠지만.
– 비?
“전하.”
그리고 통신구를 조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하가 연락을 받으셨다.
“혹시 제가 바쁠 때 연락을 드린 건가요?”
– 아니오, 비. 내가 비와 말할 시간도 없겠소?
작게 미소를 지은 전하에게 마주 미소를 지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슬며시 내리는 게 보였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개인적인 일에 전하를 귀찮게 하는 것 같지만 어쩌겠나. 이건 내 정당한 권리인데.
“비. 비가 이 세상에 나타난 기쁜 날인데 아무것도 준 게 없는 것 같소. 혹시 나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주시오.”
얼마 전 생일 연회에서 전하가 직접 약속했었다. 난 어디까지나 약속을 이행하는 거다.
“전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시오. 내 무엇이든 들어드리리다.”
아버지와 남편도 동원하여 후배 연애를 돕는 선배. 세상에 이런 선배는 없을 거다.
***
이게 드디어 미쳤나.
“전하. 실례지만 잠시 소음이 겹쳐서 전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 저런. 내가 감찰부장이 바쁠 때 연락을 건 것 같군.
하지만 내 복잡한 심정과는 별개로 황태자의 안색은 너무나 평온했다.
– 감찰부장의 노고와 충심은 실로 만인의 귀감이 될 수준이지. 내 그런 충신에게 식사라도 대접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미친 건가.’
본능적으로 욕을 박을 뻔했다.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식사? 나나 이놈이나 그런 거에 신경 쓸 정도로 감수성 넘치고 여유롭지 않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는 것보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게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새끼와 대면을 한다는 건 그만큼 일이 터졌다는 의미니.
그런데 그걸 아는 놈이 식사를 하자고? 내가 소문의 중심에 선 이 타이밍에? 마종공 사건으로 후끈거리는 제도까지 초대해서?
‘의도가 순수한 새끼가 아닌데.’
차라리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생각했을 거다. 정말 식사를 하고 싶고, 우연히 이 시기에 시간이 생길 걸 수도 있다고.
이 새끼는 예외다. 절대 그런 소박한 이유로 부를 놈이 아니다.
“전하, 실례지만.”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업무에 집중하여도 부족한 소신이 제도에 올라가면, 아무래도 귀감을 보이기는커녕 따가운 눈초리를 받지 않겠습니까.”
괜찮게 포장한 거절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지랄은 거기까지다 황태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불가능하지 않나.
파견 중에 제도에 올라가는 것은 꺼려진다는 포장, 실상은 이 타이밍에 제도에 가서 시선을 받고 싶지 않다는 내용물.
“소신은 신년하례식 이전까지 감히 제도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강력하게 말했다. 나 안 가, 개새끼야.
사실 현명공 말 때문에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지만 방금 네 말을 듣고 결정했다. 이건 가면 무슨 일이 생길 거다. 무조건 안 간다.
– 감찰부장의 뜻은 실로 갸륵하니, 뭇 신하들이 본받을 점이로군.
내 처절한 거절에 황태자는 평범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헌데 감찰부장. 내 감찰부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하명하소서.”
– 지키지 못할 다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시발.
그 말에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개소리 말고 오라는 통보.
‘지키지 못할 다짐?’
너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지킬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