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2)
황태자의 십일장생을 기원할 시간이 왔다. 이걸로 시즌 24호 기원이다.
‘제발 유병장수.’
두 손을 모으며 정성스레 기도했다. 제발 잔병이나 많이 걸린 채로 장수해라. 중병이면 일도 못할 테니 딱 잔병치레 정도만.
의자에 앉으면 허리가 아픈 정도로. 가을이 되면 감기 때문에 코가 자주 막히는 정도로. 많이는 안 바라고 딱 그 정도만 원한다.
“…전하. 허면 언제 제도로 올라가면 되겠습니까?”
–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나. 오늘 사람을 보낼 테니 바로 오도록.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니 가지런히 모인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개새끼.’
제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심지어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바로 끌려가게 생겼다.
– 물론 감찰부장의 업무를 방해할 생각은 없네. 일정이 전부 끝나면 보낼 테니 걱정 말게.
당연한 얘기를 ‘내가 그 정도 편의는 봐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던 그 표정. 순간 류티스 사태 이후로 봉인된 프롤레타리아 펀치가 울부짖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진짜 한 대만 팰 수 있게 해주면 2년은 사직서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취한 척하고 한 번만 해볼까?
“망할 놈.”
탄식을 담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부질없는 상상보다 열정적인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제발 유병장수. 만약 허리 통증이나 감기가 무리라면, 적어도 책상 모서리에 발가락 정도라도 찧기를.
그런데 이거 억울하네. 나도 에넨한테 헌금 그럭저럭 냈잖아. 기도 한 번 정도는 들어줄 만하지 않냐?
‘신토불이 새끼.’
토종이 아닌 외래종의 믿음과 헌금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거지. 종교 승리를 찍은 신이라 그런지 아쉬울 게 없나 보다.
외래종도 아껴주는 신을 찾든가 해야지 원.
동아리 시간이 되자 숨이 턱 막혔다. 이 시간이 지나면 제도로 끌려간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옭아매는 기분이다.
“오라버니, 여기요.”
“고맙다…”
그리고 고백을 한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어색함도 한몫했다.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쿠키를 건네는 루이제. 넙죽 받기는 애매하지만, 거절하면 더 이상하기에 결국 떨리는 손으로 쿠키를 잡았다. 사소한 거절도 루이제 입장에서는 차이는 걸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니까.
“이번에는 특별한 재료도 넣었어요!”
쿠키를 한입 물며 슬쩍 루이제를 살피자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맑게 말하는 모습은 고백 이전과도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래?”
“궁금하세요?”
딱히 궁금하지는 않지만 설렘 가득한 눈을 보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뭘 넣었는지 말하고 싶어서 두근거리는 저 눈빛.
누가 봐도 답이 정해진 질문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니, 루이제는 조심스레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 사랑이요.”
‘세상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릴 뻔했다. 저 말을 듣고 버틴 내 인내심이 경이로울 정도다.
‘참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손이 떨렸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대로 통곡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루이제의 얼굴은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만 붉게 물들었다. 본인도 부끄러운 모양이지. 여기서 내가 기겁을 하면 무너질 게 뻔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말이 저거라는 게 유감이지만.
‘연애가 처음이니까.’
살짝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루이제는 어릴 때의 트라우마로 사랑은 많이 받았지만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사람. 덕분에 자신의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입장이다.
그러니 저런 예스러운 애정 표현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 대륙은 대충 중세 유럽풍이다. 그럼 내 기준에서는 옛날이어도 대륙 기준으로는 최신인 건가?
어쩌면 루이제는 자기 나름대로 최신 연애 방법을 공부한 걸지도 모른다. 열심히는 하지만 결과가 이상한 아이…
“귀한 재료네. 잘 먹을게.”
그래서 고민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른으로서 명랑한 학생의 동심은 지켜줘야 마땅하다.
“오라버니라면 언제든지 만들어 드릴게요.”
“고마워.”
내 반응이 무난하자 루이제는 안심한 듯 더욱 밝게 웃었다. 붉어진 얼굴은 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이게 더 무섭네.’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고백을 했음에도, 고백을 들은 사람이 아직 답을 주지 않았음에도 루이제는 마냥 해맑았다. 어떠한 독촉도 눈치도 주지 않았다.
단지 고백을 계기로 그동안 묶인 고삐를 던져 버리기라도 한 건지, 이렇게 툭툭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게 더 치명적이다. 꾸준하게 도트 대미지를 받는 기분이라.
‘당분간은 이래야 하나.’
이 기묘한 현상을 깨기 위해서는 내가 확실한 답변을 줘야 한다. 그게 수용이든, 거절이든.
하지만 성급한 답변은 루이제에게 실례다. 진심을 다한 고백이니 나도 진심을 담아 답변해야 하지 않나.
단순히 당혹스럽다는 이유로 거절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어색해지기 싫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정말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아서 말해야 한다.
…마종공 이후로 멘탈 수습이 힘들어서 그 답을 못 찾고 있는게 문제지.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도 고백하는데 오래 걸렸으면서, 오라버니만 빠르기를 바라진 않아요.”
다행히 루이제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물론 그 말만 듣고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
누군가를 애타게 만드는 건 마르게타로도 충분하지 않나.
“오, 오라버니?”
슬쩍 손을 뻗어 루이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녜, 네혜에…”
예전이라면 평범하게 웃었을 루이제가 지금은 부끄러워하며 녹아내린다.
‘기다리기는 무슨.’
역시 최대한 빠르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루이제를 위해서라도.
그런데 이거 어느 타이밍에 손 떼야 하냐. 막상 올리기는 했는데 끊기가 애매하네.
“누가 동아리실에 얼음 마법 썼냐.”
슬슬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려는 찰나, 옆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파이 하나를 전투적으로 씹는 에리히가 보였다.
“옆구리 시려워서 미치겠네. 남들 있는 곳에서 막 마법 쓰고 그러지 말라고.”
“난 아니다.”
에리히의 말을 라테르가 고개를 저으며 받았다.
그리고 부원들의 너스레에 루이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헛기침을 했다.
“가, 가을도 끝나가서 그런지 조금 춥네?”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여는 루이제.
그래도 아까와 달리 부끄러움은 조금 가신 듯한 얼굴이었다.
‘잘 끊네.’
에리히가 적당한 타이밍에 개입한 덕분에 어색해지려는 분위기가 풀렸다.
서글프다. 저렇게 눈치도 좋은 애가 왜 정작 본인 연애 때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사실 눈치니 뭐니 해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면 난 동생의 첫사랑을 채간 특급 개새끼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되지 않았나.
내가 황태자에게 프롤레타리아 펀치 운운할 게 아니다. 에리히가 나에게 형사취수 펀치를 날려도 겸허히 맞아야 하는 입장.
그럼에도 루이제의 사랑을 응원하고 나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할 수가 없다.
‘언제 날이라도 잡자.’
에리히하고 진지하게 대화라도 해야겠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든, 아니면 에리히의 숨겨진 원망을 듣든 간에.
그게 첫사랑의 연애를 돕는 착한 동생을 위한 도리니까.
“곧 겨울이라 더 추워질 것 같은데.”
“그, 그렇지?”
…아닌가? 돕는 게 아니라 꼬장이었나?
***
선배가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부장님은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에에~ 내가 걔네보다 먼저 만났는데에에에~
그 말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내 뇌를 꺼내서 정성스레 글자를 새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선배가 뭐라고 놀리든 나는 부장님을 처음 만난 사람이다. 공녀보다도, 마종공보다도 먼저 만났다. 헤카테님을 제외하면 누구도 날 이기지 못해.
그리고 그 자신감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괜히 잤어.’
턱선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가가 뜨거운 것이 방심하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감찰부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틈틈히 눈을 붙이는 게 일상.
문제는 선배에게 끔찍한 말을 들은 직후에 자고 말았다는 것이다.
“1과장. 나는 상사고, 너는 부하다.”
“결혼? 내가? 너하고?”
“착각하지 마라. 너는 부하라서 상대하는 거지, 여자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잠깐, 아주 잠깐이었다. 기껏해야 10분은 잤나?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부장님이 꿈에 나왔다. 단순히 부장님 꿈이면 기분 좋은 낮잠이었겠지만, 가슴을 찢어버리는 말을 듣고 말았다.
“아, 아니야!”
그래서 정말 기겁하며 일어났다.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처절하게 깬 이후로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건 꿈이다. 그냥 개꿈이야. 부장님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나는 아직 부장님한테 마음을 보이지도, 거절당하지도 않았어.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 이건 오히려 잘될 징조야.
‘잘될, 거야…’
이게 다 선배 때문이야. 이상한 말을 해서 사람 복잡하게 만들고.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어느새 통신구가 빛을 뿜고 있었으니까.
‘하필 이럴 때.’
도저히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지만 겨우 손을 뻗었다. 업무 연락을 무시하는 건 곤란하다. 그리고 혹시 부장님일 수도 있잖아.
– 에리.
통신구를 잡자 나타나는 선배의 얼굴. 업무도 부장님도 아니었다.
‘끊을까?’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은 선배가 너무 밉다.
그래, 끊자. 솔직히 이번에는 선배가 심했어.
– 울었어?
“안 울었어!”
끊기 직전, 선배의 도발에 반응하고 말았다.
– 그럼 됐고.
아님 말고, 라는 식으로 말하는 선배의 모습에 이가 갈렸다.
진짜 끊을 거야. 후배를 이렇게 막 다루는 선배는 무시 당해도 돼.
– 곧 감찰부장을 볼 텐데 울고 있으면 안되지.
하지만 선배의 말에 통신을 끊으려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 황태자 전하께서 감찰부장과 저녁 식사를 하실 예정이야.
“오늘…?”
– 오늘.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오늘, 부장님이 제도에 온다고?
– 그리고 나는 황태자 전하께서 감찰부장을 초청하기 전, 우연히 친하게 지내는 후작 영애를 초대한 상태고. 그러면 넷이서 식사를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
“어…?”
갑작스러운 사태 변화에 머리가 멍해졌다.
– 뭐해? 당장 안 오고.
그리고 일방적으로 끊긴 통신.
…
“차, 차장님!”
정신이 들자마자 황급히 차장실로 달려갔다.
조퇴, 당장 조퇴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