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3)
문득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하루에 단 세 번밖에 없는 식사 시간. 그중 무려 한 번을 황태자 때문에 낭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타당한 의문.
당연히 옳지 않다. 내 소중한 저녁 시간을 황태자와 보내라고?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행복해야 할 시간이 귀찮고 짜증나는 시간으로 바뀌는 거 아닌가?
‘이건 아니야.’
치가 떨린다. 솔직히 황태자도 나하고 밥 먹을 시간에 황태자비와 단둘이 먹는 걸 더 좋아할 거다.
그럼에도 그 새끼는 나를 소환했다. 그 사랑해 마지않는 황태자비와의 시간을 포기하고 나를 택했다.
‘아니 시발.’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절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감이 이상하잖아 이거.
아무튼 황태자가 나를 부른다는 건, 내 소환을 최우선 순위로 올릴 정도의 일이 터졌다는 거다. 대충 왕족 폭행이나 포로 무단 사살과 동급인 일이.
그런데 딱히 짚이는 게 없다. 내가 불릴 정도의 일이면 당사자인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불릴 이유가 없다.
‘진짜 치하 목적으로 부를 리는 없고.’
총애하는 신하를 위한 식사 대접. 애석하게도 황태자는 그런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행위를 할 놈이 아니다.
게다가 치하를 하면 금색으로 빛나는 물건을 찔러주는 편이기도 하고. 덕분에 2년 동안 받은 게 얼만데. 쓸 시간이 없어서 문제지.
‘가봐야 알겠네.’
결국 돌고 돌아 직접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 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어도 묵묵히 가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설마 마종공 관련으로 부르는 건 아니겠지. 그 새끼가 미친 개새끼는 맞지만, 티배깅 하겠다고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는 십새끼는 아니니까.
…아니겠지?
황태자궁에 도착하자마자 정문을 지키는 기사가 자연스레 길을 열어줬다. 마치 단골을 확인한 식당 알바 같이 평온한 모습.
심지어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막지 않을 테니 알아서 들어가라는 듯한 반응에 괜히 참담한 심정까지 든다.
‘익숙해진 건가.’
슬쩍 그런 기사를 보다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기사가 저러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올해 하반기에만 벌써 세 번째 소환이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놈인데 FM대로 처리하기는 귀찮겠지.
아무래도 네 번째 오는 일은 없게 해야겠다. 이러다가 누워서 반겨주는 광경까지 볼 수 있겠어.
“감찰부장님.”
“아, 집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궁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궁을 관리하는 집사장이 반겨줬다.
그리고 집사장을 보니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한동안 징계 목적으로 방문해서 집사장을 볼 일이 없었지. 이제서야 질책이 아닌 식사 초대로 방문했다는 실감이 났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오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정작 뵙지를 못했군요.”
“하하. 집사장님께서 바쁘시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집사장도 비슷한 심정인지 가볍게 그 일을 언급했다.
손님으로 오는 것보다 사고를 쳐서 오는 경우가 더 많은 신하… 내가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다. 가슴이 옹졸해지네.
그런 내 반응에 집사장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그래도 오늘은 귀한 손님을 둘이나 모시니, 바쁘게 일한 보람이 있습니다.”
“둘이요?”
의외의 말이다. 황태자는 어지간한 공무원보다 업무에 치여 사는 놈인지라 궁까지 사람을 초대한 일이 드물다.
누군가를 초대할 시간에 그냥 통신구를 애용하고, 직접 대면해야 하면 기습적으로 상대의 청사로 찾아간다.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올 악랄함을 지닌 것이 황태자다.
“예, 황태자비 전하께서도 손님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절로 납득이 가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태자가 누군가를 초대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개같이 쪼는 건 쉽게 상상되지만.
“감찰부장님. 그래서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만.”
“편히 말씀하십시오. 황태자 전하의 거처에서 제 양해를 구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조심스레 입을 여는 집사장에게 가볍게 대답했다. 황태자궁에서는 황태자, 황태자비의 의지가 우선적이다. 일개 손님에 불과한 내 의견은 필요하지 않다.
그래도 자연스레 표정이 풀어졌다. 집사장도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 그럼에도 굳이 양해를 구한다는 말을 한 건, 그만큼 집사장이 나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오는 말이 고우니 가는 말도 고와지는 법. 황태자는 보고 배워라, 지 아랫사람보다도 못해.
“감사합니다. 드리기 민망한 말이었는데 용기가 생기는군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집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황태자비 전하의 손님이 아직 궁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꽤 오래 머무르실 것 같은데…”
“식사는 여럿이 하는 것도 즐거운 법이죠.”
“하하, 다시 감사드립니다.”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기에 먼저 대답했다. 손님이 아직도 있다면 뭐, 그 손님이 금식 기도 중인 게 아닌 이상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맞지 않겠나.
차라리 잘됐다. 황태자 이 새끼가 무슨 이유로 소환한 건지 모르는 상황이니 보험은 최대한 든든해야 한다.
황태자비라는 담당 억제기. 게다가 황태자비가 친히 초대한 손님. 아무리 황태자라도 그 라인업이 버티고 있으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운이 좋군.’
흡족하다. 에넨이 나를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헌데 집사장님. 황태자비 전하께서 초대하신 분은 누굽니까?”
황태자에게서 나를 지켜줄 소중한 방패. 적어도 누군지는 미리 알아야 예의다. 적절한 감사 인사와 아부 정도는 준비해야 그 방패도 기분이 좋을 테니.
‘누가 있지?’
일단 홀로 용의자를 추려봤다. 초대에 응하여 왔다는 건 일단 제도에서 생활한다는 거고, 식사까지 같이 할 정도면 황태자비와의 관계도 그럭저럭 친밀.
디소 후작가의 영애인가? 아니면 리푸르 후작가? 어쩌면 요하네스 백작가일 수도 있다.
“아, 감찰부장님도 잘 아는 분입니다.”
내 물음에 온화했던 집사장의 표정이 돌변했다.
뭐지, 괜히 물었나? 내가 먼저 묻는 걸 기다린 것 같은 표정인데.
“마살로 후작가의 에르제베트 영애입니다.”
“…예?”
그 말에 머리가 잠시 멈추고 말았다.
스테이크를 썰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이프를 움직이는 여인이 보였다. 단정하게 빗은 흰색 장발, 평소와 같은 광기나 장난기가 아닌 고요함을 담은 붉은 눈. 게다가 시커먼 감찰부 제복이 아닌 하얀 드레스.
‘저게, 1과장?’
인지부조화가 온다. 1과장인데 1과장 같지가 않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너무 낯설어.
“후후, 우연이네요. 설마 감찰부장도 올 줄이야.”
“그러게나 말이오. 신기한 우연이로군.”
침묵을 깬 황태자비의 말에 황태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우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무심코 황태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황태자는 아무 말 없이 와인을 마셨다.
저 새끼, 본인이 생각해도 개소리라서 찔리나 보지.
‘이게 무슨 우연이야.’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각별한 사이다. 그런 둘이 서로가 누구를 초대했는지 모를 리가 있나. 분명 알면서도 이러는 거지.
우연이 아니라 계획이다. 나와 1과장을 붙이려고 작정한 거야.
‘왜?’
문제는 그거다. 굳이 황태자 부부가 나서면서까지 이런 판을 깐 이유를 모르겠다.
일단 초대에 응하면 왜 부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알기는커녕 더 복잡해졌다.
‘미지에서 오는 공포.’
조용히 눈을 내리 깔고 말았다. 무지와 미지가 이렇게 무섭다…
***
답답하다.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다.
하지만 간간히 느껴지는 선배의 따가운 눈초리에 묵묵히 고기만 썰었다.
‘참자.’
조금이라도 모양새가 흐트러지면 선배가 격노할 거다. 선배는 자기 작품이 망가지는 걸 정말 싫어하니까.
“…복장이 그게 뭐니?”
“이게 왜? 편하고 좋은데.”
차장님에게 조퇴 승인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지만, 선배는 그런 후배에게 어서 오라는 인사 대신 복장으로 핀잔을 줬다.
“남들 웨딩드레스 입을 때 혼자 하객석에 있을 것 같은 복장이야.”
그 말에는 진짜 울 뻔했다. 왜 점점 구체적으로 말하는 거야. 미래라도 보고 온 것 같잖아.
“너, 지금처럼 행동하면 평생 그대로야. 감찰부장한테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치만 난 부장님한테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화병만 쌓이게 했겠지.”
진짜 황태자비만 아니었으면 한 대 때렸을 거다.
아무튼 선배는 익숙함이 아닌 색다름으로 승부해야 한다면서 드레스를 가져왔다. 하늘하늘하고 새하얀 드레스. 조금만 편하게 움직이면 바로 찢어질 것 같은 내구도.
“으, 나 이런 거 싫은데.”
“선배. 그냥 제복 입으면 안될까? 부장님하고 같은 옷이니 더 친밀하지 않을까?”
“사람은 어울리는 옷이라는 게 있는데…”
순순히 입기에는 너무 거북한 옷이라 쉬지 않고 불만을 표했다.
“입으! 라면! 그냥! 입어! 멀쩡한 얼굴 낭비하지 말고!”
“아, 아파!”
결국 열이 오른 선배한테 등짝만 신나게 두들겨 맞았지만.
“얼굴 빼면 장점도 없으면서 왜 안 쓰는 거야!”
“너무해!”
…생각해 보니 정신도 좀 맞은 것 같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입었다. 선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뒤늦게 화장을 위해 들어온 시녀들도 예쁘다고 해줬지만,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옷 좀 바꿔 입는다고 뭐 효과가 있겠어?
‘있어.’
놀랍게도 있었다. 아까부터 은근한 부장님의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아닌 척하면서 은근슬쩍. 애써 외면하는 척하면서 다시 흘끔흘끔.
‘히힛.’
뿌듯했다. 그래, 역시 부장님도 나한테 관심이 있다니까.
조금, 아주 조금 꾸몄는데도 바로 이렇게 쳐다본다. 이건 평소에도 애정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야.
‘고마워, 선배.’
아까까지의 원망은 압도적 감사로 변했다. 그런 눈길로 선배를 보자 선배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모양을 읽는 것 정도는 감찰부의 기본 소양. 뜻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만하지 말고… 바로 고백…?’
선배다운 저돌적 발언에 부장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할 생각이었다. 오늘 꿈은 너무 끔찍했으니까.
부장님도 내 매력에 빠진 것 같고, 선배도 열심히 밀어주고 있으니 지금이 적기다. 지금이면 부장님한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런 다짐과 달리 입만 애처롭게 벙긋거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다. 왜 말이 안 나오지? 지금이 적기잖아. 지금 말하면 전부 끝이잖아.
‘…아직 식사 중이지.’
고민 끝에 이유를 알아냈다. 모양 빠지게 식사 중에 고백하는 건 이상해서 그래.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절대 긴장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나도 후작가 사람인데 기본 예절은 지켜야지, 아무렴.
– 까득
“…비?”
“어머, 죄송합니다. 잠시 손이 미끄러져서.”
나이프가 갈리는 소리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조용히 감찰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시로 에리를 흘끔거리는 걸 보니 색다름으로 충격을 주는 건 성공한 것 같다.
‘통했어.’
당연한 결과다. 내가 직접 계획한 건데 실패할 리가 없지.
물론 감찰부장이 여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난봉꾼 같은 건 아니지만, 가깝게 지내는 이성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 저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에리는 미녀다. 후배라서 좋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확실하다. 비록 성격이나 언행으로 다소 얼굴값을 못하지만, 아무튼 제대로 꾸미면 모두가 감탄할 미녀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일까?’
에리의 꼴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
참아, 내 안의 이성. 지금 화를 내면 전부 물거품이잖아.
‘저 답답한.’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덕분에 나이프로 접시를 그어버렸을 정도.
속이 터질 것 같다. 평소처럼 현란하게 입을 놀리던 애는 어디 가고, 교회에서 기도 중인 것 같은 영애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입도 다물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 내가 색다른 모습을 보이라고는 했다. 저 조용한 모습도 많이 색다르기는 하고. 그런데 그걸 꼭 지금 보여야 했니?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참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평소에는 그렇게 까불거리면서, 이번에는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건지.
이래서는 안된다. 감찰부장의 시선을 끌 정도의 색다른 모습, 평소 에리의 화려한 입담. 그 둘이 합쳐져야 가능성이 보인다. 그저 색다르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당장 말해.’
이제는 간절하기까지 한 염원을 담아 에리를 노려보자, 에리도 시선을 느꼈는지 흠칫 몸을 떨었다.
몸 떨 시간에 입이나 열어. 부케를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다음은 없을 텐데.’
이 정도로 깔린 판에서 실패하면 단순히 기회를 놓치는 수준이 아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암묵적으로 지원하는 장소,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색다름이라는 충격.
이런 무기들이 있는데 입도 열지 못하면, 더 이상 에리가 고백할 수 있는 상황 따위 오지 않는다. 마차를 타고도 도달하지 못한 곳에 잘도 걸어서 갈 수 있겠다.
“감찰부장은 미녀와 인연이 많은 것 같네.”
여차하면 식탁을 엎어서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전하께서 입을 여셨다.
너무 노골적이고 감찰부장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 하지만 지금은 그거라도 감지덕지다. 아니, 오히려 감찰부장을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강조해야 에리가 움직일 테니 적절한 발언이다.
실제로 전하의 말에 에리가 다시 움찔하는 것이 보였으니까.
“…과분한 인연입니다.”
잠시 손이 멈췄던 감찰부장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황했다.’
자세히 보니 감찰부장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말과 달리 속으로는 꽤 동요 중인 모양.
‘미안해요, 감찰부장.’
속으로 짧게 사과를 한 뒤 입을 열었다. 둘이서 공격하는 건 정말 미안하지만, 나도 후배를 위한 거니까.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감찰부장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에리 같이 예쁘고 활기찬 신부를 얻을 기회를 주는 거 아닌가. 분명, 분명 감찰부장을 위한 거다.
“후후, 그렇네요. 마르게타 공녀에 마종공, 게다가 에르제베트 영애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감찰부장의 시선이 에리에게 향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옆에서 에리를 한 번이라도 더 말하고, 감찰부장이 에리를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한다.
둘 다 가만히 있으면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줍은 짝사랑, 운명처럼 이어지는 인연. 그런 건 동화에나 나올 얘기니까. 움직이지 않는데 결과가 나올 리가 있나.
“예, 1과장도 과분한 인연이기는 합니다. 대체 누가 데려갈지 궁금할 정도로요.”
잠시 고민하던 감찰부장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은 에리가 내 손님으로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진심이라기보다는 최대한 좋게 말한 티가 났지만, 상관없다. 아무튼 겉으로는 좋게 말했다는 게 중요하다.
‘지금이야.’
다시 에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이라도 해. 적어도 ‘부장님이 데려가면 되겠네요!’ 같은 말이라도 해!
“헤헤…”
하지만 에리는 얼빠진 웃음 소리만 내며 조용히 와인을 홀짝거렸다.
…
‘죽일까?’
참지 마, 내 안의 이성.
오늘이 에리의 마지막 만찬이다. 내일 두고 보자.
***
갑자기 황태자가 인연 운운할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저 미친 새끼가 기어코 황태자비 앞에서도 티배깅을 하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비도 웃으며 받았고, 몇 마디 정도만 나누다가 금방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티배깅이 아니라 그냥 꺼낸 말이었나 보다.
‘새끼가 사람 놀라게 만들어.’
서럽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나. 개만도 못한 처지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사실 개는 물어서 안 건드리는 거기는 한데, 그렇다고 내가 황태자를 물 수는 없잖아.
아무튼 그 발언 이후로 식사 시간은 무난히 흘러갔다. 적당히 디저트도 먹고, 식후주도 마시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전하.”
그렇게 정말 무난히 끝난 초청 식사. 결국 마지막까지 왜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설마 진짜로, 진짜 순수한 의도로 초대한 건가? 정말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거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네. 앞으로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영광입니다.”
웃는 얼굴로 끔찍한 말을 하는 황태자를 보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정말 용건이 없는 거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갈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기도가 반만 먹혔나.’
분명 유병장수를 원했는데 장수는 어디 가고 유병만 남았냐. 게다가 이렇게 금방 갈 정도의 병을 바란 것도 아니다.
“감찰부장.”
“예, 황태자비 전하.”
홀로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사이, 황태자 옆에 있는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에르제베트 영애를 데려다 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흘끗 1과장을 쳐다봤다. 거하게 취한 상태가 되어 황태자비의 부축을 받고 있는 1과장.
남들이 보면 무엄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모습이지만, 황태자비는 물론 황태자마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무서운 총애다.’
황태자 부부와 친밀한 후작 영애. 이렇게만 들으면 크게 이상한 건 없지만, 그 영애가 감찰부 1과장이다. 신분과 직책이 너무나 안 어울리는 인간.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얘는 사직서 내면 바로 통과될 텐데 뭐가 좋다고 감찰부 생활을 하는 건지.
“물론입니다, 전하.”
일단 황태자비를 받침대로 삼는 이 정신 나간 녀석을 수거했다.
1과장의 팔을 어깨에 두르며 부축하자 알코올 냄새가 훅 올라왔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잘 부탁할게요, 감찰부장.”
말없이 1과장을 보던 황태자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1과장의 저택에는 직접 가본 적도 있어서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지 누군가를 부축하며 가는 게 귀찮을 뿐.
‘취할 정도로 마시면 어쩌자고.’
옆에서 끙끙거리는 짐덩어리를 쳐다봤다. 회식 자리도 아니고 평범한 식사 자리에서 취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식후주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조금 알딸딸한 정도로 마시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시는 건 극히 드물다.
…그런데 황태자비도 1과장이랑 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잘못 봤나?’
잘못 봤겠지. 황태자비가 주당이라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으니까.
아무튼 귀찮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오늘부터 네 집은 여기다.’ 라며 길바닥에 투하하고 싶지만, 하필 드레스까지 차려 입은 상태지 않나.
1과장이 아니라 평범한 영애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껍데기가 중요하기는 하구나.
‘평소 입지도 않던 걸.’
그리고 이렇게 멀쩡히 입을 수 있으면서 그동안은 왜…
평소에도 이러고 다녔으면 진작 결혼했을 거다. 어떤 죄인이 1과장과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정도는 걸리겠지.
“부, 부장니이이임…”
“정신 좀 드냐?”
계속 신음 소리만 내던 1과장이 드디어 사람의 소리를 냈다.
“헤헤… 이제 좀 괜찮네요.”
푹 숙였던 고개를 든 1과장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술에 먹혀서 그런지 빨갛게 변했고, 눈에는 미세하게 눈물도 맺혀있었다. 두통 때문인가, 얼마나 마신 거야.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네 발로 기는 건 걷는 게 아니야.”
“아이, 진짜예요!”
내 말에 빽 소리를 친 1과장은 내 손을 뿌리치고 혼자 걸었다.
당연히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주저 앉았지만.
“손이나 잡아. 누울 거면 침대에서 누워야지.”
처량하게 주저 앉은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드레스를 더럽히지 않게 조심했는데, 정작 주인이 한방에 보내버렸다.
내 고생… 한순간에 쓰레기가 됐구나…
“부장님…”
“어, 왜.”
“부장니이이임…”
하지만 1과장은 잡으라는 손은 안 잡고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곱게 취하지 못하고 사람 귀찮게 하는 주사.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
“그렇게 차려 입고 주정 부리면 결혼도 못한다.”
작은 한숨과 함께 1과장의 어깨를 잡았다. 감찰부 제복을 입고 이러는 거면 상관없다. 감찰부가 보이면 오히려 얽히지 않게 피해가려고 노력하니까.
반면 곱게 차려입은 영애가 이러면 지나가다 누군가 볼 수도 있고, 자연스레 1과장이 땅바닥에서 자유형을 했다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사실 이미 굳게 닫혀가는 혼삿길이니 타격은 없겠지만, 그래도 당당한 모습은 아니니.
“됐어요… 어차피 못할 텐데…”
소름 돋는 자기 객관화에 순간 숨이 막혔다.
아니, 그, 당연히 못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당사자 입으로 들으면 좀.
“네가 뭐가 부족해서 못해? 너만한 애가 어디 있다고.”
그래서 1과장의 자신감을 북돋아줬다. 내 부하는 까도 내가 깐다. 아무리 당사자의 자기 비하여도 내 부하가 까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1과장 정도면 충분히 결혼할 자격이 있다. 얘가 성격 빼고 뭐가 부족하다고 평생 미혼으로 살겠어.
성격 빼고.
“그래요…?”
다행히 내 말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는지 1과장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저… 부장님이 데려갈 수 있어요?”
“뭐?”
난데없는 말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 부장님 좋아하는데, 진짜 많이 좋아하는데…”
그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은 1과장은 히히거리며 말을 이었다.
“부장님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는데… 진짜, 진짜 어어엄-청 좋아해요… 2년 전부터… 좋아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헤카테님보다는 못하겠지마아아안… 그래도,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1과장.”
1과장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제정신이 아니다. 너무 취해서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
이런 건 빨리 끊는 게 예의다. 1과장이 술에 깨고 나면 얼마나 창피하겠나.
“1과장이라고 하지 마세요!”
하지만 1과장은 내 손을 쳐내더니 소리 질렀다. 정말 서럽다는 듯이 울면서.
“저, 저는 에르제베트예요… 에르제베트라고요…! 1과장 같은 이름이 아니라, 에르제베트라고요!”
그 말에 무심코 몸이 굳고 말았다.
“…알아요, 잘 안다고요… 부장님이 직책으로만 부르는 거… 왜 그러는지 알아요…”
한 번 소리를 내지른 1과장은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사랑하는 남자한테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게… 얼마나 슬픈 줄 아세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도 못한 채,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1과장.
달빛에 비친 백발이 오늘따라 애처롭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