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4)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마 흐끅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 멈춘 걸로 생각했겠지.
‘이게 대체.’
미칠 것 같다. 혹시 나도 취한 것이 아닐까, 취해서 귀가 파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저히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어서.
1과장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1과장한테 고백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앞서 내 멘탈을 공격한 셋의 고백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1과장은 그 궤가 다르다.
2년 동안 온갖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덕지덕지 붙은 1과장이다. 이성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가족에 가까운 관계─ 라고 생각했다.
‘나만 그랬구나.’
아무래도 나 홀로 가족 같은 직장이라고 여긴 것 같다. 아니, 1과장도 가족이라고 생각했겠지. 그 가족이 남매가 아닌 부부(예정)이라는 게 문제지만.
본능적으로 한숨을 내쉬려다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한숨을 보이면 1과장의 멘탈을 갈기갈기 찢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찢겼는데.’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나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상대 정신까지 챙길 필요가 있나?
물론 있다. 아무리 웬수같고 괴팍한 녀석이어도 부하 아닌가. 내가 막 부장이 되고 감찰부가 안팎으로 난장판이었을 때, 초반부터 날 지지해준 몇 안되는 녀석이다.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1과장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주륵주륵 흘리며, 울음소리를 참으려고 흐끅거리는 모습. 그저 눈물 젖은 눈으로 나만 올려다 보는 처량한 모습.
오히려 아무 말도 없는 게 더 무섭다. 차라리 아까처럼 소리라도 질렀으면 좋을 텐데.
“저, 저는 에르제베트예요… 에르제베트라고요…! 1과장 같은 이름이 아니라, 에르제베트라고요!”
정말 한이 맺힌 듯한 목소리를 떠올리니 씁쓸했지만, 그래도 1과장이 품은 한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름. 이름 중요하지. 사랑… 하는 남자가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으면 얼마나 서럽고 슬프겠나.
내가 그 사랑하는 남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아무튼 내가 원인을 제공하기는 한 것이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사소한 버릇 하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으로 부를 걸.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 보니 화장도 번지고 아주 난리야.
슬쩍 손을 뻗어 직접 얼굴을 닦아주자 1과장의 눈에 미약한 기대가 감돌았다.
“미안하다.”
이름 하나 때문에 1과장이 2년 동안 품었을 한. 그걸 부하가 술의 힘을 통해 터트리기 전까지 몰랐다는 것에 대한 사과.
하지만 1과장은 내 사과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기대는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했다.
“아… 아아…”
닦아준 것이 무색하게 1과장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부, 부장님…!”
“야, 갑자기 움직이지 마!”
벌벌 떨던 1과장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오래 앉아있어서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했고, 술에도 취했으니 몸을 가누기 어렵겠지.
게다가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라 미처 받아주지도 못했다.
“…괜찮냐?”
땅바닥에 엎어져서 끙끙거리는 1과장을 보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왜 이렇게 짠한 모습만 연타로 보여주는 건데.
하지만 1과장은 내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내 옷자락을 잡더니 간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느닷없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한 1과장은 내 옷자락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이걸 놓치면 내가 영영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빨리 해명해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놓쳤다.
“그, 그동안 까불어서 죄송해요, 말 안 들어, 서 죄송, 해요, 자꾸 이상한… 짓만 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내 침묵에 더욱 공포에 질린 1과장은 듣는 사람의 혼이 나갈 정도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죄송… 해요, 잘, 못했어요, 저, 전 친근하게 대하는 게, 가족, 같은 게, 부장님이 더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 말에 지금까지의 2년이 떠올랐다. 우리끼리는 편하게 지내자는 말을 누구보다 잘 지킨, 너무나도 잘 지켰던 1과장.
“주, 주제 넘게 굴어서 죄송해요, 거슬리게 해서 죄송해요…! 부장님이, 부장님이 너무 좋아서… 그렇게라도 안 하면 부장님이 저를 볼 것 같지 않아서 그랬어요…!”
말하면서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이젠 울음 소리도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1과장이 난동을 부릴수록 더 시선이 가기는 했다. 그게 1과장이 원하는 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모습을 보니, 나는 1과장이 원하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는, 앞으로는 말 잘 들을게요. 까불지도, 주제 넘게 굴지도… 않을게요…!”
1과장의 말이 길어질수록 내 입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이다. 1과장이 이렇게 절박하고 처절한 모습은 처음 본다. 긴장했을 때도 애써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는 게 1과장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히히 웃는 게 1과장이었는데.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옷자락을 잡던 손 중 하나가 애처롭게 올라왔다. 그리고 파르르 펴지는 검지 손가락과 툭 건들면 부서질 것 같은 미소.
“저, 저, 한 번만, 진짜 한 번만 기회 주시면 잘할게요! 말도 잘 듣고, 하라는 대로 하고, 부장님이 조용히 하라, 면, 조용히 하구…”
“1과장.”
열릴 생각을 하지 않던 입이 겨우 열렸지만, 이번에도 2년 동안 입에 붙은 1과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버렸다.
“진짜! 진짜로요! 정말 부장님이 놀라실 정도로! 엄청, 엄청 잘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덕분에 1과장이 애써 지었던 미소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드러난 1과장의 표정은 묘하게 낯익은 표정이었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그래, 빙의 전이었다. 고아원에서 엄마를 찾던 아이의 표정이 딱 저랬지.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애타게 찾는 그 표정.
‘시발.’
그 표정을 왜 여기서 다시 봐야 하는지.
“몇 번째여도 좋으니까… 미안하다고만, 싫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1과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만 들썩거렸다.
뒤이어 들리는 울음 소리. 더 이상 참기도 힘든 것인지 아이 같은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르제베트.”
입고 있던 외투를 1과장의 등에 덮어주며 말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1과장이라고 했으면 누구 하나는 죽었겠지.
그리고 내 부름에 황급히 고개를 드는 1과장.
“잠깐 얘기 좀 할까?”
일단 이상한 오해부터 풀자.
관료를 직책으로만 부르는 버릇. 그게 내 징크스이던 시기가 있기는 했다.
북방에서 그 녀석들을 보내고, 헤카테도 내 곁을 떠난 후로는 관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꺼려졌다. 하필 내가 이름으로 부르고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그 뒤로는 직책만 불렀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친하든 처음 보든, 무조건 직책으로.
그래, 분명 그랬다. 그렇기는 한데─
“이젠 아니야.”
이제는 없다고 해도 무방한 징크스다. 그냥 관성으로 유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이름을 부르면 죽을까봐 부르지 않는 버릇? 내가 저승사자도 아니고 오래 가기에는 힘든 징크스 아닌가.
‘진짜 죽었으면 황태자 이름만 불렀지.’
길버트, 길버트, 길버트, 길버트. 우리 개새끼 길버트. 하루에 30번도 외칠 수 있다.
“그, 그치만, 부장님, 매번 직책으로…”
“그건 그냥 입에 붙은 거고.”
내 멘탈이 생각보다 단단한 건지, 아니면 해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징크스는 빠르게 희미해졌다.
특히 마르게타에게 속을 털어놓은 이후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사람에 따라 평생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2년이면 짧은 거지.
그럼에도 직책을 고수한 건 간단하다. 그냥 그게 익숙하고 편해서.
“애초에 이름으로 부를 사람도 없었잖아.”
종전 직후, 막 감찰부장이 되었을 때. 근처에 이름으로 부를 관료 자체가 없었다.
장관? 못해도 아버지 뻘인 직속 상관을 이름으로 부르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나.
다른 부장급 인사들? 그 사람들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애초에 친근히 이름으로 부를 정도의 사이도 아니고.
다른 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감찰부장이 이름으로 부르면 ‘저 새끼가 왜 날 이름으로 부르지?’ 라고 쫄 수도 있다. 성적표 나오는 날에 부모님에게 이름을 불린 자식처럼.
“그럼, 저희는 왜…”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묻는 1과장의 모습에 머리만 긁적였다. 그것도 별 이유 없다. 그냥 그게 편했다.
에르제베트는 다섯 글자, 라파예트는 네 글자. 반면 1과장, 2과장은 그냥 세 글자. 게다가 상사가 본명으로 부르면 조금 꺼림직하지 않나?
나는 장관이 야, 이 새끼, 개새끼가 아니라 칼이라고 부르면 불안하던데.
“미안해. 진작에 이름으로 부를 걸.”
“…….”
내 진심 가득한 사과에도 1과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심정인지 이해가 되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내 사과를 거절로 착각하고 혼자 오열한 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테니.
하지만 몇 번 입만 달싹거리던 1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그러면, 저 아직 차인 건 아니죠…?”
“그래.”
그 말에 1과장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환장하겠네.
***
두통과 함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어제의 화려한 기억이 폭풍같이 몰아쳤다.
“저, 저는 에르제베트예요… 에르제베트라고요…! 1과장 같은 이름이 아니라, 에르제베트라고요!”
아.
“그래도, 그래도… 사랑하는 남자한테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게… 얼마나 슬픈 줄 아세요?”
아아…
“저, 저, 한 번만, 진짜 한 번만 기회 주시면 잘할게요! 말도 잘 듣고, 하라는 대로 하고, 부장님이 조용히 하라, 면, 조용히 하구…”
아아아아…
“몇 번째여도 좋으니까… 미안하다고만, 싫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아아아아아!
‘미쳤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억에 손발이 바르르 떨리고 몸이 오그라들었다.
미쳤다. 술 때문에 제대로 미쳤다. 해도 되는 말과 평생 참아야 하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쏟아냈다.
“대신 답은 바로 못 줘. 먼저 고백한 사람한테도 답을 못했거든.”
그리고 뒤이어 생각난 부장님의 말에 버둥거리던 몸이 멈췄다.
“네가 말한 것처럼 까불고, 말도 안 듣고, 이상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흐읏…”
“그래도 정도 많이 들었으니까. 진지하게 고민할게.”
그날, 부장님이 토닥여준 어깨를 매만졌다.
‘진지하게…’
히죽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장님이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했다. 내 고백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결과는 뻔하잖아. 부장님이 나처럼 완벽한 여자를 거절할 리가 있겠어?
“몇 번째여도 좋으니까… 미안하다고만, 싫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자신감이 벅차오르려는 찰나, 본능적으로 떠오른 추태에 다시 침대에서 허우적거렸다.
끝났다. 내 여자로서의 자신감과 존엄은 그날 무너졌다. 이제 부장님 앞에서는 철저한 약자로 지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불을 걷어차며 기운찬 아침을 시작하는 사이, 옆에 둔 통신구가 빛을 냈다.
“…누구세요?”
혹시 부장님인가 하는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연락을 받았다.
– 나다.
아쉽게도 부장님이 아니라 선배였지만.
마침 잘됐다. 고백 성공한 거, 선배한테도 알려줘야지.
…눈에 살기가 가득한 건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선배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선배. 마침 나 할 말 있었는데.”
– 유언? 그건 내가 아니라 가족한테 해야지.
“나 부장님한테 고백했어.”
그 말에 선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