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5)
마음의 평화를 얻은 1과장은 무사히 저택에 도착했다. 쟤 술 마셔도 기억이 멀쩡한 타입이던데, 내일 일어나면 혀라도 깨물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리고 1과장이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홀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막판에 1과장의 눈물샘을 또 자극할 뻔했다. 나도 정신이 혼미해서 그런지 치명적인 말실수를 하고 말았으니까.
“그래도 정도 많이 들었으니까. 진지하게 고민할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발언이다. 말이 좋아 진지하게 고민할게지, 어떻게 들으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같은 전형적인 공무원 회피 발언 아닌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정말 심사숙고하며 고민하겠다는 뜻이었는데, 하필 우회적인 거절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1과장은 내 말에 눈물 범벅인 얼굴로 헤실거리더라. 이번에는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지. 이번에도 오해했으면 1과장은 탈수로 죽었을 테니.
‘다행 맞나?’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1과장의 오열을 멈춘 건 다행이지만, 아직 내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마종공, 루이제, 이리나에 이어 1과장까지. 어떻게 시간이 지날수록 고백이 복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거 버그 아니냐.
‘이제 1과장은 어떻게 보나.’
심지어 1과장의 고백은 조금, 아니 솔직히 말해서 많이 애잔하고 서글펐다. 1과장의 바닥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순한 고백이면 그냥 나만 고민하고 말 문제인데, 울며불며 사정하는 꼴을 봤으니 앞으로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 할지 고민이다.
‘…괜찮겠지.’
그래, 그냥 1과장을 믿자. 1과장의 비범한 정신력과 활발함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거다. 그러면 나도 거기에 맞게 행동하면 그만.
그리고 오늘 일을 겪으며 다시 다짐을 했다.
‘당분간 제도는 오지 말자.’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도는 쳐다보지도 않기로.
분명 얼마 전에도 이런 각오를 했다가 개같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이번 다짐은 오래 갈 거라고 믿는다.
제발.
아카데미 복귀를 미루고 잠시 제도를 떠돌았다.
마종공이 버티고 있는 마탑에 방문하는 건 곤란하다. 황태자도 그걸 알기에 황태자궁에 있는 마법사를 통해 복귀하라고 했지만, 언제까지라는 말도 없었으니 잠깐은 다른 짓을 해도 괜찮겠지.
원래라면 바로 복귀하려고 했다. 하지만 1과장이 처절하게 우는 걸 보고 나니 도저히 마음 편히 복귀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상담하고 싶을 정도로.
‘할 사람이 없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땅한 상대가 없다.
장관이나 감찰부한테 하기에는 1과장의 흑역사를 떠벌리는 것 같아 찝찝하고, 마르게타나 제과 동아리한테 말하는 건 많이 미친 짓이다.
황태자? 그 새끼한테 말하면 ‘감찰부장의 자식은 어머니가 많아 좋겠군.’ 같은 소리나 하며 비웃겠지. 황태자비는 친한 후배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마냥 기쁘겠고.
내 인간 관계가 이렇게 좁았구나. 나는 친구가 없어…
“그래서 너희한테 왔다.”
비석을 쓰다듬으며 픽 웃음을 흘렸다.
웃긴 일이지. 상담할 사람을 찾아 떠돈 결과가 결국 여기라니.
그래도 어쩌겠나. 나한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건 너희 뿐이고, 너희한테 말하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갈 일도 없잖아.
“보야르 와인은 못 구했다. 내년에 가져 올 테니 이걸로 참아.”
오는 길에 적당히 사 온 술을 비석에 부었다. 빈손으로 상담을 부탁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헤카테의 비석 앞에서는 잠시 몸이 굳었지만, 그래도 마저 부었다.
‘전 부인 앞에서 연애 얘기.’
정신 나간 상황에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를 두고 떠나버린 건 너인데. 네가 떠나지만 않았다면 내 연애는, 내 부인은 너뿐이었을 텐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네가 원망스럽다. 아니, 사실은 많이. 네가 나를 두고 가지만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미운 마음까지 든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하는 원망이다.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하지 않나. 나는 평생 너한테 지겠지.
“네 남편, 지금 부인 후보만 다섯이다.”
슬며시 헤카테의 비석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헤카테와 이어지는 기분이니까. 비록 비석 아래에는 유품 정도밖에 없더라도.
“웃기지? 난 한 명만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어.”
내가 한 말에 내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한 명만 생각했지. 2년 전까지는 너, 얼마 전부터는 마르게타만.
그런데 거짓말 같이 다섯으로 늘어버렸다. 이거 에넨이 외래종 번식을 위해 수를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누군지 알면 너도 놀랄 거다.”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철혈공의 막내딸, 현직 공작, 남작가 영애, 백작가 영애.
게다가 우리가 팀장으로 구를 때도 감찰부에 있던 일개 팀원. 너도 기억 날 거다. 후작가 영애면서 감찰부에 제 발로 들어온 그 괴짜. 지금은 과장이야.
그렇게 낄낄거리다가 술병을 입에 물었다. 맨 정신으로는 제대로 상담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내 것도 샀다.
“야. 난 한 명한테 잡혀 살 팔자라며.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한참이나 술을 들이키다 올리버의 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저 녀석이 허당인 건 알았지만, 설마 당당히 말한 것도 화려하게 틀릴 줄은 몰랐다.
“내가 앞길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쌓인 경험이 있지 않나.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보다 보니 이제는 얼굴만 봐도 짐작이 간다.”
“그런 사람이 왜 본인 미래는 몰라?”
“그르게. 거울만 봐도 알아야지.”
그 말에 화낸 걸 보면 본인도 찔리기는 한 것 같다. 그때 믿을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렇게 술을 마저 마시다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잡혀 사는 게 부인이 아니라 상사를 말한 거냐?”
그렇게 생각하면 상당히 그럴 듯 하다. 사실 나를 쥐잡듯이 볶는 건 황태자니까. 장관도 위에서 까라는 대로 구르는 입장에 가깝지.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허당 같던 조언이 소름 돋는 예언으로 변했다. 미안하다 올리버. 내가 잘못 해석하고 괜히 원망했어.
‘이왕이면 이렇게 될 것도 알려주지.’
의미 없는 투정임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는 경험을 토대로 추리한 것이지, 타니안처럼 사람의 앞길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터.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전부 죽고 너만 남는다. 부인은 여럿이 될 수도 있고.’ 같은 말을 어떻게 하겠나. 그런 말을 했다가는 린치를 당했을 거다.
“어렵네.”
어느새 비어버린 병을 땅에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어렵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렵다.
과분할 정도의 고백 연타에 머리가 어지럽다. 이 고백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헤카테에 대한 예의도, 당사자들을 향한 예의도 아닐 거다.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망설여진다. 어색해질까봐? 그런 것도 있다. 헤카테에 대한 마음? 그것도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글쎄, 과연 헤카테에 대한 마음만으로 이러는 걸까.
‘핑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없는 헤카테를 들먹이며 밀어내는 건 헤카테를 팔아먹는 짓이 아닌가, 하고. 내 마음에 솔직할 용기가 없으니 방패를 내미는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 진심으로 고백을 받으면 헤카테는 원망하지 않을 거다. 그런 녀석이니까.
반면 내 진심을 속이고, 헤카테와의 의리를 지킨답시고 전부 쳐내면 헤카테는 오히려 화를 낼 거다. 지금 죽은 자기 때문에 산 사람 인생을 버리는 거냐고.
‘너무 내 위주 생각인가.’
물론 헤카테가 정말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 내 추측이니.
그리고 이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뻔하다.
‘이미 흔들렸구나.’
실소가 흘러 나왔다. 술에 취하고 취해서, 이렇게 이 녀석들 묘비에서 진상을 부리고 나서야 진심이 보인 것 같다.
난 고백이 썩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향한 마음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날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어쩌면 내 생에 처음으로 얻는 가족일 수도 있으니까.
‘내 가족…’
물론 지금도 크라시우스 가문이라는 가족이 있기는 하지만, 온전히 내 가족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는 엄밀히 보면 이 몸을 뺏은 도둑이지 않나.
빙의 전도 마찬가지였다. 고아 새끼한테 가족이 어디 있겠어. 그냥 같은 고아원 애들끼리, 원장 선생님을 애써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이 육체의 인연이 아닌 내가 얻은 인연. 내가 한 행동으로 생긴 인연. 그런 나를 보고 좋다는 인연.
오직, 오직 내 능력으로 만든 가족.
‘좋네.’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 웃음이 흘러 나왔다.
가족은 많을수록 좋지. 한 명도 감지덕지인데 다섯이나 되면 내가 절하면서 감사해야 할 정도다.
…그런데 다섯으로 될까? 이미 여섯이나 되는 친구, 예비 가족을 잃은 사람이 다섯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미친놈.”
내가 생각해도 정신 나간 발상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만족하지. 다섯이 아니라 마르게타 하나로도 과분한데.
애초에 만족하지 못하면 뭐, 누가 더 고백이라도 하겠나. 이제 더 고백할 사람도 없겠다.
‘이미 아는 여자는 다 고백했으니.’
그렇게 한참이나 홀로 웃었다.
낯선 하늘이다.
“가, 감찰부장님.”
“아.”
그리고 낯선 목소리다.
오랜만에 노숙을 해서 그런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술병, 아직도 젖어있는 것 같은 비석, 흙이 잔뜩 묻은 옷, 마지막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국립묘지 관리인.
…아.
“실례했다.”
잠깐만 누워있는다는 게 그대로 자고 말았다. 심지어 관리인이 순찰을 돌 시간까지.
‘시발.’
얼굴이 뜨겁다. 기껏 1과장을 길바닥이 아니라 저택까지 데려다줬는데, 정작 내가 노숙자로 퇴화했다.
심지어 술에 제대로 취한 상태로. 절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제, 제가 치우겠습니다!”
새벽의 추태를 상징하는 듯한 병들을 하나 둘 줍기 시작하자 관리인이 황급히 달려왔다.
“아니, 내가 가져왔으니 내가 치워야지.”
“괜찮습니다! 청결을 유지하는 건 제 업무입니다!”
결국 관리인의 기세에 몰려 빈손으로 나가고 말았다.
‘시발.’
진짜 신년하례식 전에는 제도에 오지 말아야겠다.
그 전에 오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