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6)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개 삼은 걸 국립묘지 관리인에게 들킨 이후, 정말 뛰듯이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지나가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기절시키겠다는 각오까지 한 채.
사실 몇 분 전에 일어난 일이 벌써 퍼졌을 리는 없지만, 그 화려한 추태를 남들이 모르더라도 나는 알기에 도저히 얼굴을 들 자신이 없었다. 안녕하냐는 평범한 아침 인사도 ‘노숙했는데 안녕하니?’ 로 해석할 자신이 있다.
그래서 황태자궁 정문에서 황태자비를 발견했을 때는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
‘기절, 시켜야 하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기절시키겠다는 굳은 다짐. 그 다짐이 떠오르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황태자비를 만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비, 그것도 전승공의 딸을 기절시키는 건 무리인데.
“감찰부장.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정신 나간 고민을 하는 사이, 정문 앞을 서성이던 황태자비는 보는 사람 마음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반겨줬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죄송합니다, 황태자비 전하. 이 역신이 감히 해서는 안될 생각을 했습니다.
“예, 전하. 전하를 뵐 수 있었으니 실로 좋은 아침입니다.”
“후후, 그런가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작게 웃는 황태자비. 덕분에 마음 속 자괴감이 조금은 가라 앉았다.
“헌데 전하, 바람도 찬데 어찌 나와 계십니까?”
숙였던 고개를 도로 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침 산책을 나왔다고 하기에는 날씨가 썩 좋지 않다. 아무래도 겨울이 가까워지는 시기다 보니 아침에는 제법 쌀쌀하니까.
“감찰부장을 기다렸습니다. 분명 궁에 들려야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아직 오지 않았다고 들어서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네가 안 와서 나와있었다, 라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망할.’
치가 떨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담이고 뭐고 그냥 순순히 돌아갈 걸.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높으신 분을 기다리게 했다.
다행히 황태자비는 딱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는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막 나와서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감히 전하를 기다리게 했다는 건─”
“정말 괜찮습니다. 오히려 감찰부장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면 서운했을 겁니다.”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감사 인사라니, 나한테? 내가 황태자비한테 감사를 들을 일이 있나?
대체 무슨 말이냐고 입을 열기도 전에, 내 의문을 읽은 황태자비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에르제베트 영애는 저에게 정말 소중한 후배입니다.”
‘아.’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안도했다. 1과장이 혀를 깨물고 쓰러지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역시 정신력이 비범한 애야.
“저도, 황태자 전하도 에르제베트 영애에게 위안을 얻은 적이 있었죠. 저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 거의 유일한 아이였습니다.”
“좋은 후배로군요.”
“예, 정말 좋은 후배지요.”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지 황태자비의 입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제 그 후배가 본인의 길을 찾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요.”
그리 말한 황태자비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기쁨이 담겨있었다. 누가 들어도 1과장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목소리.
정말 매번 새롭고 놀랍다. 이렇게 정숙한 황태자비와 1과장이 친한 선후배인 게 말이 되나. 도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지? 1과장한테 세뇌 어플이라도 있는 건가?
‘어쩐지 정보를 잘 빼더라.’
세뇌 어플로 심문을 하면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긴 하지.
“물론 에르제베트 영애의 길은 혼자가 아닌 같이 만들어 가는 길입니다.”
나긋한 목소리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긍정을 하기도, 부정을 하기도 애매한 말이지 않나.
긍정하면 1과장의 고백을 받았다는 꼴이 되고, 부정하면 거절했다는 꼴이 되고…
“그리고 같이 만들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요.”
그런 내 고민을 알았는지, 황태자비도 다시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저 에르제베트 영애… 에리, 그 아이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그 아이를 온전히 보겠다고 약속해 준 것.”
그것만으로도 전 감찰부장에게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 덧붙인 황태자비의 얼굴은 곧 성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전하, 마음 고생이 많으셨구나.
황태자비의 배웅을 받으며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황태자는 업무 중이라 못 봤다. 아침부터 그 새끼 봤으면 하루가 우울했을 텐데 다행이지.
‘개판이네.’
그리고 갑자기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희미했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 냄새가 나한테 풍긴다는 건 유감이지만.
밤새 마신 술 냄새와 땅바닥을 구르며 획득한 야생의 냄새. 학업의 중심인 아카데미에서 풍기기는 너무 모욕적인 향취다.
‘망할.’
숙취가 아닌 다른 이유로 머리가 아팠다. 술에 취해서 국립묘지에서 노숙한 감찰부장. 당분간 사교계를 달구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흑역사다. 내 손으로 만든 내 흑역사.
그래도 목격자가 없는 흑역사인 게 어디냐. 실시간으로 주정 부리는 걸 들켰다면 정말 사직서 내고 잠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나마 상황이 낫다.
‘…하필 술.’
그렇게 애써 자기 위안을 했지만, 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그 자기 위안마저 위태롭게 흔들렸다.
다른 거면 상관없다. 다른 걸 먹고 난동을 부렸으면 이렇게 쪽팔리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시바, 하필 술이냐.
– 조오오오─카아아아아!
꿈에 나올까 시끄러운 목소리가 떠오르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술이면 무조건 현명공과 엮인다. ‘외숙모가 현명공이라 감찰부장도…’ 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다.
‘시발.’
이제 내 평판이 박살나는 건 막을 수 없다. 신경 끄고 씻기나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지…
─라는 계획마저 시작하기도 전에 처참히 무너졌다.
– 오, 부장님. 허리는 괜찮으십니까? 노숙은 오랜만이실 텐데.
“닥쳐.”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2과장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 연락을 받자마자 훅 들어오는 흑역사 공격.
제도 소식을 발굴하고 다니는 놈이니 금방 알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내 예상보다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걸 수도 있다.
– 에이, 왜 그러십니까. 부하의 진심 어린 걱정이니 웃는 얼굴로 받아주십쇼.
낄낄거리는 2과장을 보니 통신구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법의 발전이 절실하다. 통신구 너머의 상대를 팰 수 있는 마법이 필요해. 마종공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한참이나 웃던 2과장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도 1과장 소문은 최대한 억누르고 있습니다. 아예 막는 건 힘들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죠.
“…잘했어.”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잠시 반응이 늦고 말았다.
확실히 노숙 사건에 정신이 팔려서 그렇지, 1과장이 대성통곡을 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다.
아무리 늦은 밤, 인적이 드문 거리였다고 하지만 제도는 제도다. 언제 어디에 행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불야성. 목격자 정도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오해하기 딱 좋지.’
감찰부장 앞에서 오열하는 1과장. 이건 자칫하면 감찰부 내부에 분열이 생긴 거 아니냐는 유언비어가 나돌 수도 있다.
울던 여자가 1과장이라는 걸 모르더라도 문제다. 아니, 오히려 더 큰 문제지. 마종공의 고백을 받은 감찰부장이 야밤에 레이디를 울리고 다녔다. 이게 감찰부 분열보다 더 웃음벨인 소문 아닌가.
– 뭐, 그래도 생각보다는 쉬웠습니다. 부장님이 더 큰일을 만들어주셔서 그쪽에 시선이 쏠렸거든요.
“그러냐…”
기분이 이상하다. 다행인 것 같은데 개 같고, 개 같은데 다행이야.
– 게다가 1과장이 평범하게 입고 있었잖습니까. 누군가 운 건 아는데, 1과장이라는 건 거의 모릅니다.
“다행이네.”
– 오죽하면 백발이니 마종공이 아니냐는 말도 있던데요.
“미친 것들이네.”
그 말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거기서 마종공이 왜 나오냐.
순간 마종공이 내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을 상상하려고 했지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만큼 말도 안되는 상황이기에.
그건 2과장도 마찬가지인지 잠시 진지했던 표정이 금방 무너지고 다시 낄낄거렸다.
– 여하튼 부인 셋 축하드립니다.
“뭐?”
– 아닙니까? 1과장 방금 막 출근했는데, 아주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웃어대는 2과장을 보니 입이 근질거렸다.
‘다섯이야 새끼야.’
라고 목 끝까지 치솟은 말은 겨우 삼켰다. 뭔가 이 새끼한테 말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제국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 같았다.
“내 부인 신경 쓰지 말고 네 부인이나 챙겨.”
내 반격에 2과장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저 새끼만 내 약점을 아는 게 아니다. 나도 저 새끼한테 제대로 먹힐 치명타 정도는 안다.
“나보다 네가 먼저 결혼할 것 같던데.”
비웃음을 담아 말하자 2과장의 시선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흐뭇했다.
2과장이 장관의 처조카와 열렬히 교제 중인 건 알고 있다. 애초에 게르하르트의 연구실에 방문하면 늘 보는 얼굴이기도 하고, 당사자인 크리스티나 입으로 듣기도 했고.
설마 그것보다 더한 소식을 들은 줄은 몰랐지만.
– 장관 각하께서 2과장을 호출하셨습니다. 나이도 찬 것들이니 당장 결혼하라고 하시더군요. 만약 꾸물거리면 그 아이를 가지고 노는 걸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차장의 평온한 보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내용.
그 말을 듣고 한참이나 웃었었다. 이리저리 떠돌던 2과장이지만, 결국 사람 하나 잘못 건드려서 그대로 정착하게 생겼으니.
“연애 경험은 많이 했으니 이제 결혼 경험도 해야지.”
– 아니, 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말을 하십니까?
징그럽다는 듯 말하는 2과장을 보니 2과장의 부친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아마 2과장은 부친의 속을 태우는 불효자였겠지…
‘내 속도 태웠으니.’
직장에서는 상사 속을 태우는 부하, 가정에서는 아버지 속을 태우는 아들.
정말 놀라운 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