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7)
‘님 부인 셋’이라는 도발, ‘님 곧 결혼’이라는 역공. 서로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인 논검을 날린 끝에 상처뿐인 침묵만이 남았다.
내 부인이 셋이라고 놀려봤자 2과장은 나보다 먼저 부인을 얻을 상황이다. 2과장이 곧 결혼을 한다고 놀려봤자 나는 그 결혼을 여러 번 할지도 모른다.
결국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면 자신도 타격을 입어야 하는 기적의 공식. 오직 패자만 남는 말싸움이라는 걸 자연스레 깨닫고 말았다.
– 그만할까요?
“그래.”
서글픈 침묵을 깬 건 2과장의 정전 협정 제안이었다. 장관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결혼식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2과장의 표정에는 짙은 수심이 가득했다.
먼저 도발을 날린 놈이 저렇게 추락한 걸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내 표정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도로 나빠졌다.
우리는 대체 무얼 위한 싸움을 한 건가.
“야, 그래도 크리스티나 양이면 너한테 과분한 부인 아니냐.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말고.”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예비 신랑의 기분이 저렇게 바닥을 기면 곤란하지 않나. 정확히 언제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장관 성격을 생각하면 늦어도 내년 초겠지.
내가 낸 상처를 내가 핥아주는 기괴한 상황. 그래도 위로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
“신진 귀족이 바로 사교계에 편입되려면 혼인만한 것도 없지. 애초에 너도 좋아서 사귄 거 아니냐?”
2과장의 가문인 바론 가문은 막 작위를 받은 뉴비 귀족이다. 애석하게도 귀족들은 뉴비에 환장하는 타입이 아니라, 고인물이 넘치는 사교계에 뉴비가 입성하는 건 다소 어렵다.
그런데 그 뉴비가 현 재무성 장관과 다리 건너 이어졌다? 그러면 눈이 뒤집혀서 바론 가문에 손을 뻗을 귀족들이 우르르 튀어 나올 거다.
하지만 내 소중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2과장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 저 이미 인기 많습니다. 제도에 저 모르는 아가씨가 없을 텐데.
“자랑이다, 미친놈아.”
괜히 걱정해줬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 장관 걱정과 과장 걱정인데, 그걸 까먹었네.
‘…왜 허락한 거지?’
그리고 2과장의 말을 듣고 나니 뒤늦게 혼란스러웠다. 본인 말대로 저 새끼는 화려한 연애 경력을 자랑한다. 장관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 새끼를 처조카하고 이어준다고?
물론 둘이 이어진 건 장관의 영향이 아닌 자율 의지였지만, 결혼으로 못 박은 건 장관이지 않나. 나라면 이런 놈이 내 친척과 이어진다고 하면 당장 헤어지라고 할 텐데.
가능성은 두 가지다. 장관이 처조카를 너무 미워하거나, 처조카가 2과장에게 너무 빠졌거나.
물론 애처가인 장관이 처조카를 홀대할 리는 없으니 자동으로 후자.
–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잠시 2과장을 훑어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특이 취향이구나.’
그냥 처조카가 평범하지 않은 취향을 가진 거라고.
하긴. 가문도 좋으면서 스스로 비주류 학문 대학원생을 선택한 사람이다.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예쁜 사랑해라.”
비범한 신랑과 비범한 신부. 거기다 비범한 하객. 천생연분도 이런 천생연분이 없다.
– 부장님도 힘내십쇼. 엮인 여자가 여럿이면 줄 타는 것도 힘듭니다.
“경험담?”
– 경험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2과장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발언은 꼭 기억했다가 처조카나 장관한테 전해야지.
연락을 끝냈지만 씻지도 못하고 통신구만 매만졌다. 2과장이 막판에 터뜨린 폭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공녀님도 마음 고생이 심할 텐데, 데이트는 좀 하십니까?
“어?”
– 반응 보니까 생각도 안 하셨네.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2과장의 모습에 울컥했지만, 하필 마르게타와 관련된 얘기라 잠자코 들었다.
– 부장님만큼 심란한 사람은 공녀님밖에 없습니다. 남편을 공유해야 하는 여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평온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아차 싶었다. 확실히 내 멘탈도 간당간당해서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절대 평온하지 못할 거다. 아무리 일부다처가 일상인 세계라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닌가. 그 감정마저 완벽하게 조절한 황금공이 미친 거지.
물론 철혈공부터가 부인이 여럿인 만큼 마르게타도 일부다처에 익숙할 거다. 루이제와 이리나도 마르게타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고.
하지만 마종공의 고백은 마르게타의 허락과 무관한 일이다. 본인의 각오를 벗어난 일이 터졌으니 마르게타도 혼란스러울 테지.
– 정실이 질투에 미치면 바로 칼부림 나는 겁니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애정으로 돌보십쇼.
단어는 과격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경험자 조언이니 설득력이 미쳐 날뛰는데.”
– 아이고, 전 누구와 달리 들킨 적은 없었습니다.
그 말만 안 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개새끼.
아무튼 2과장의 조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번 고백 복사 버그로 인해 나만큼 정신이 혼미할 마르게타. 그럼에도 어떠한 불평을 토하지 않는 마르게타.
어쩌면 2과장 말처럼 나도 모르게 마르게타를 잡은 고기라고 생각한 걸 수도 있다. 마르게타라면 이해해주겠지, 마르게타라면 괜찮아─ 라고.
개새끼라고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소중한 사람이면 더 잘해줘야지, 감히 허술하게 대했다는 거 아닌가.
‘마침 적당한 시기기는 하네.’
슬쩍 탁자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곧 11월 말에 돌입하는 시기.
그리고 마르게타의 생일도 11월 말이다. 내가 아무리 개새끼여도 그건 기억한다.
‘…뭘 해야 하지?’
하지만 생일을 기억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 진짜 중요한 것은 생일에 무엇을 할지다.
데이트는 나나 마르게타나 아카데미에 박혀 있기에 활동 범위가 제한적이다. 오히려 그 제한 덕분에 적당히 아카데미를 둘러싼 도시에 나가도 마르게타는 좋아하겠지.
문제는 선물이다.
‘감이 안 잡히네.’
계속 머리를 굴려도 답이 안 나온다. 애석하게도 생일 선물은 준 적도, 받은 적도 없다.
빙의 전에는 내가 태어난 날 같은 건 몰랐고, 그냥 고아원 앞에 버려진 날을 생일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딱히 축하할 날도 아닌 데다 고아원 사정도 넉넉지 않으니 선물을 받은 기억도 없고, 받지를 않으니 누구에게 준 적도 없었다.
‘지금도 다를 건 없구나.’
생일이 무의미한 건 빙의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육체의 생일은 내 생일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뭔가 주려고 하면 적당히 거절하거나 창고에 박아뒀다. 사실 지금까지 뭘 받았는지도 기억이 안 나.
‘첫 선물인가.’
복잡한 머리와 별개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의 생일에 선물을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처음이 마르게타가 될 줄은 몰랐지.
그래,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더 진지하게 고민하자. 여차하면 다른 사람한테 조언이라도 구하고.
‘다른 사람.’
마르게타 나이대의 귀족 영애가 좋아할 선물. 사실 루이제에게 물어보면 편하지만─
“오라버니. 죄송하지만 3분 정도만 숨을 참아주실 수 있나요? 5분이면 더 좋고요.”
정색하는 루이제의 표정이 떠올라서 바로 폐기했다. 고백한 사람한테 다른 여자에게 줄 선물을 묻는다? 아무리 사람 좋은 루이제여도 화를 낼 일이다. 이리나도 같은 이유로 제외.
성별을 포기하고 그냥 같은 또래에 주목하면 에리히가 있기는 하다. 게다가 에리히는 나와 달리 사교계에도 나름 얼굴을 비추는 타입이니 선물 경험도 많겠지.
“형. 미쳤어?”
물론 에리히한테 묻는 것도 제정신은 아니다. 안 그래도 형사취수 펀치가 눈 앞에 아른거릴 에리히에게 연애 상담을 한다? 당장 소가주 계승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상담조차 제대로 못한다. 내 인간관계가 이렇게 좁았구─
“아.”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
라우라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닦았다.
“그만 울어. 그러다 쓰러지겠다.”
그렇게 말한 라우라의 눈도 붉은 것이 남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자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는 게 확실했다. 자기도 울고 있었으면서.
물론 우는 게 당연한 일이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라우라도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칼…’
다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아침에 갑자기 들려온 소식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으니까.
– 부인. 부인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평소 연락을 주고 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백작부인의 연락.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라 의아했지만, 그래도 알맹이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편하게 말하라고 했다. 게다가 나와 달리 제도에 머무는 사람이니 중요한 정보를 말하려는 걸 수도 있고.
– 감찰부장이…
하지만 정작 듣는 내가 편하지 못했다.
“정말, 인가요?”
– 저도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인 것 같아요.
그리고 머뭇거리면서도 확신에 찬 말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백작부인이나 되는 사람이 사실인 것 같다, 라고 말할 정도면 이미 사교계에서는 정설이라는 말이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소식을 들어버렸다.
칼이, 그 아이가 국립묘지에서 잠들었다는 소식. 그것도 과거의 전우들이 묻힌 곳에서, 술에 취한 채로 잠들었다는 소식.
– 이런 소식을 전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부인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고마워요, 부인.”
마치 자기가 죄인인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백작부인에게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슬픈 소식이지만─ 오히려 슬픈 소식이기에 알아야 했다. 그 아이의 슬픔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멀쩡한 표정을 유지했다. 딱 연락을 끊을 때까지만. 통신구를 내려놓자마자 눈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연락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조심스런 라우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받을 수… 있을까?”
그 말에 라우라도 입을 다물었다.
어릴 때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칼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오히려 차가운 면모도 가진 아이다.
그런 아이가 술에 몸을 맡기고, 모든 걸 내려놓고 무덤 앞에서 잠들었다. 지금 내가 연락을 하든 받을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아이를 자극하는 게 아닐까?
“지금은, 지금은 기다리자.”
결국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 밉다. 만약 내가 정상적인 어미였다면 바로 칼에게 연락을 할 용기가 있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칼이 나한테 마음을 보였을지도 모르는데.
‘아직 멀었구나.’
칼과의 사이가 회복되어 간다고 좋아했지만, 아직 멀었다.
통신구가 빛을 뿜었다.
– 아, 어머니.
연락을 건 것이 칼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흐를 뻔했지만─
– 갑자기 죄송하지만, 레이디에게 줄 선물은 뭐가 좋겠습니까?
그 말에 나오려던 눈물이 도로 들어갔다.
슬쩍 통신구 뒤에 서있는 라우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우라.
‘연애 상담.’
찢어질 것 같던 가슴이 칼의 한마디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참 간사하지. 아들이 의지한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쉽게 기분이 풀리다니.
“공녀에게 줄 선물이니?”
– …예.
하지만 머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칼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칼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는 않았구나, 싶어서.
정말 간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