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8)
생일 선물로 무엇이 좋은가.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경험자 조언이 최고지.’
어머니. 어머니가 있었다. 이미 가주와 결혼도 했고,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유지 중인 산증인.
그 시간 동안 주고 받은 선물이 한둘이겠나. 아무리 무뚝뚝하고 엄격 근엄 진지한 가주라도 부인에게 선물 정도는 줬을 거다.
어머니가 뭘 받았는지 참고하면 선물을 고르는 건 간단하다. 이렇게 쉬운 문제를 왜 그리 고민했는지 모르겠네.
– 선물…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불안감이 몰려왔다.
설마 하나도 안 준 건가? 진짜로? 부인을 홀대하면 부인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가주가 그런 실수를 했다고?
‘괜히 물었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괜한 질문을 해서 20년 넘게 선물 하나 못 받은 자의 한을 자극한 게 아닌가 싶다.
– 공녀는 무얼 받든지 좋아할 거란다. 나도 빌리에게 받은 거면 전부 좋았으니.
“그렇습니까?”
다행히 몹시 양호한 대답이 나와서 한시름 놓았다. 받은 게 없어서 고민한 게 아니라 고르기 어려워서 고민한 거였구나.
– 그래. 빌리에게 받은 건 정말 많았지만,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했단다.
살며시 미소를 짓는 어머니를 보니 조금은 의아했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꽤나 받은 것 같은데, 가주가 그 정도로 선물 공세를 했다는 게 놀랍다.
상상이 안 된다. 어디 광산에서 원석 하나 가져오고 ‘오다 주웠다.’를 시전 했나 싶을 정도로.
“그래도 인상 깊은 건 있지 않겠습니까?”
– 흐음.
애써 가주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좋아한다, 그런 뻔한 조언을 원해서 연락한 게 아니다. 당연히 마르게타면 뭘 받아도 좋아하겠지. 작년에 줬던 부채도 아직까지 가지고 다니는 사람인데.
그래도 첫 생일 선물인만큼 정말 인상적인,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고 싶다.
– 있기는 하구나.
자연스레 몸이 통신구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역시 있었다. 아무리 전부 마음에 든다고 해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것 정도는 있는 법이지.
– 결혼 1주년 때, 갑자기 빌리가 어디로 데려갔었지.
그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어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띤 것이 썩 괜찮은 추억이었나 보다.
– 작은 동산,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꽃들로 가득한 동산을 선물로 줬단다.
“예?”
뭐야 시발. 내가 뭘 들은 거지?
– 결혼을 하고 다섯 번째로 맞은 생일 때도 굉장했지. 제법 유명한 디자이너가 제도에 새로 차린 가게가 있었는데, 그걸 통째로 사서 줬었으니.
“아, 예…”
이번에도 믿기 힘든 말이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전부’ 같은 건 들어봤는데, 가게 자체를 산 건 처음 들었다.
아니, 그럼 그 디자이너는 개업과 동시에 폐업한 건가?
– 디자이너도 크라시우스 가문과 종신 계약했단다. 지금도 나와 빌리의 의복을 담당해주고 있으니 오래 남은 선물이지.
그건 다행이네…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연신 추억을 쏟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더 있다고?’
이상하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가주의 이미지가 점점 기괴해지는 것 같다.
칼에 찔려도 피 대신 쇳물이 나올 것 같은 양반이었는데, 정작 00년대 드라마에도 안 나올 기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 부인.
– 아.
어머니의 말이 길어질수록 혼미해지는 정신. 다행히 시녀장이 어머니를 제지하여 끝나지 않는 추억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뒤늦게 말을 멈춘 어머니는 아들 앞에서 끈끈한 부부 관계를 과시한 게 부끄러운지 작게 헛기침을 했지만, 솔직히 들은 것 중에 절반은 기억 나지 않는다.
“…많이 기쁘셨겠군요.”
아주 잠깐의 침묵. 그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나였다. 폭주한 건 어머니지만, 계기를 제공한 건 나였으니.
그리고 내 말에 어머니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 부끄러웠단다.
“예?”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 갑자기?
– 당시에는 정말 부끄러웠지. 조용히 꽃다발을 줘도 만족할 수 있는데, 갑자기 동산이니 가게니 거창한 게 나왔으니까.
하지만 부끄럽다는 말과 달리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 하지만 받는 나도 부끄러웠는데, 주는 빌리는 어땠겠니. 칼, 너는 빌리가 살가운 사람으로 보이니?
“아니요.”
내 단호한 대답에 어머니는 씁쓸한 듯 미소를 지으셨지만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런 빌리가 나를 위해서 고민하고, 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준 선물. 나는 빌리에게 물질만 받은 게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받은 거란다.
“…….”
물질을 받은 게 아니라 시간과 정성.
다르게 말하면 상대가 자신을 위해 고심한 것을 알기에 기쁘게 받았다는 의미.
– 조금은 도움이 됐니?
“물론입니다.”
내가 말이 없자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솔직히 크게 도움이 된 조언은 아니다. 결국 ‘네가 열심히 골랐다면 무엇이든 좋아할 거다.’ 라는 말과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래도 갑자기 연락을 한 아들에게 성심껏 해준 조언이다. 그런 조언을 받고 쓸모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애초에 어머니도 다른 것보다 가주의 정성에 기뻐한 것 같고.
“저도 정성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 그래. 분명 기뻐할 거란다.
그랬으면 좋겠네.
연락을 마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결국 돌고 돌아 원점이다. 선물은 내가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그래도 아까와 달리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선물이 꼭 특별하고 인상 깊어야 한다는 집착을 버렸으니까.
‘나도 동산이라도 살까?’
순간 미친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났다. 아무래도 가주의 기행 열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본능적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내 자산 현황.
‘…몇 개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수입은 늘어나지만 지출은 줄어드는 기적의 공무원 생활. 덕분에 내 재산은 새끼를 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늘어났다.
아직 소가주라 진짜배기 자산인 백작령은 건드릴 수 없지만, 감찰부장으로서 얻은 돈도 만만치 않으니.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쳐 지나간 발상이다. 아카데미에 있는 마르게타한테 동산을 선물로 줘봤자 졸업 이후에야 보지 않겠나.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이미 산 몇 개 가지고 있겠지.’
나보다 마르게타가 더 부자일 거라는 서글픈 현실.
아무리 공무원 봉급이 높아도 공작가보다 많이 벌겠나. 심지어 마르게타는 계승 순위와 별개로 공작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다. 어릴 때는 금화로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르게타 앞에서 동산? 아마 귀여운 선물을 줬다고 기뻐하겠지. 그러면 나는 수치스러워서 죽을 거다.
‘기둥서방.’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떠올랐다. 돈 많은 부인, 그보다 못한 남편.
그래. 사실 나는 기둥서방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던 거다. 어쩐지 감찰부장이라는 직책이 부담되고 무겁고 막 그렇더라고. 타고난 운명대로 살지 않고 과분한 직책을 짊어져서 그런 거지.
…그런 거지?
‘시발.’
다시 머리가 아팠다. 받는 사람이 부족할 거 없이 자란 사람이라 주는 것도 힘들다.
그냥 내가 선물이라고 할까? 하루 동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칼 자유 이용권이라도 줄까?
“제가 칼을 가질 수 있는 건 하루뿐인가요? 오늘이 지나면 저를 떠나는 건가요?”
아니다. 오히려 역효과다.
그러면 간단하게, 원하는 건 전부 해주겠다는 백지 수표?
“저는 꽃 한 송이라도 칼의 진심을 받고 싶었는데… 너무 욕심이었나요…?”
망할, 이것도 아니네.
미치겠다. 최선의 결과는 보이지 않으면서 최악의 미래는 바로 보인다.
아니, 그래도 다행인가? 터지기 전에 짐작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 정실이 질투에 미치면 바로 칼부림 나는 겁니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애정으로 돌보십쇼.
그러다 문득 2과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이 고민이 시작된 근원적인 조언.
정실, 질투, 애정…
‘아.’
제법 괜찮은 선물이 떠올랐다.
마르게타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
괜히 어렵게 생각해서 삽질만 했구나.
***
갑자기 넷째 언니가 연락을 줬을 때는 의아하면서도 반가웠다. 넷째 언니는 연애에 대해 여러 조언을 줬으니까. 실제로도 언니 덕을 많이 보기도 했고.
물론 나와 칼은 그런 조언 없이도 끈끈하지만, 이왕이면 더 깊은 관계인 게 좋잖아?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연락을 받은 걸 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 마르. 괜찮니?
걱정스레 묻는 넷째 언니. 하지만 제때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통신구만 바라봤다.
내가 들은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니가 질 나쁜 농담이라도 한 거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잠깐 투정만 부리고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라는 걸, 언니가 그런 농담을 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거겠지.
“언니…”
– 응, 마르. 말하렴.
겨우겨우 입을 열자 언니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죠?”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칼이 제도에 갔다는 것도 몰랐다. 사실 그 정도는 상관없다. 업무 문제니 비밀로, 금방 끝낼 수 있으니 아무 말 없이 간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제도에서 일어난 일, 그건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묘지, 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언니가 허둥거리는 게 보였지만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칼이 묘지에 갔다면 누구를 만났을지는 뻔하다. 예전에 떠나 보냈다던 친구들, 그리고 연인이겠지.
질투─ 는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첫사랑이 아니라는 건 아쉽지만, 이미 없는 사람에게 질투를 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질투를 하면, 묘지에 가지 말라고 막기라도 할 건가? 그런 건 오히려 칼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단지 칼이 묘지 앞에서 쓰러졌다는 게, 술을 즐기지 않는 칼이 술에 취할 정도였다는 게 마음 아팠다.
‘누구보다 혼란스러웠을 텐데.’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황태자비 전하의 생신 기념 연회 이후, 극심하게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급히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의 등을 밀었고.
그리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칼을 조금, 아주 조금은 원망했다. 진작에 칼과 약혼이라도 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가슴 졸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기적이야.’
끔찍하게도 이기적인 생각이다. 한동안 칼이 아무렇지 않게 웃어서, 나를 껴안아주고 사랑해줘서 잊고 말았다. 칼은 마음 속 응어리를 털어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아직 그 속에 과거의 기억이, 과거의 인연이 남아있다. 아직 상처를 회복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칼을 원망했다. 나를 봐주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데, 더욱 큰 걸 바라고 말았다.
누구보다 혼란스러울 칼을 보듬지는 못할망정,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원망이나… 하고…’
난 대체 왜 이리 생각이 짧을까.
그리고 그날, 칼은 부회장실에 오지 않았다.
나도 그날 밤, 침대에서 홀로 숨죽여 울었다.
슬픈 날이다. 오늘보다 슬픈 날은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