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19)
만족스러운 선물을 샀다. 더 고민했더라도 이거보다 좋은 선물을 구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다. 평생 동안 딱 한 번만 주는 선물도 아니고, 첫 생일 선물이면 적당한 게 있지 않나.
‘이거밖에 없다.’
손에 쥐고 있는 케이스. 정확히는 케이스에 소중히 보관된 반지를 내려다 봤다.
사실 마르게타의 머리색과 같은 루비로 할지, 아니면 눈동자와 같은 에메랄드로 할지 잠깐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무난하게 다이아몬드로 했다. 이 세계에서도 다이아몬드는 최고의 보석으로 취급되니까.
물론 마르게타라면 다이아몬드로 공기 놀이도 했겠지만, 반지는 가격이 아닌 상징성이 더 큰 선물이다. 내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남에게 받아야 그 가치가 있는 물건.
‘완벽해.’
안도감과 뿌듯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샘솟았다. 마르게타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
정말 완벽하다. 이건 신년하례식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마르게타도 진심으로 기뻐하겠지.
“착용자에 맞게 크기가 조절되는 반지입니다.”
“오.”
게다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사이즈. 마르게타와 손을 잡은 적은 많으니 감으로 때려 맞춰야 하나 고민했지만, 마법의 힘은 위대했다. 어떤 물건을 사든 알아서 조절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왔다는 걸 비밀로 하는 입막음비 외에 팁도 조금 얹어서 줬다. 손님을 흡족하게 하는 상인은 많이 벌어야지, 아무렴.
‘사흘 후.’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잊을까 봐 빨간색으로 몇 번이나 강조한 날.
딱 사흘 후면 마르게타의 생일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숨기고 숨기다가 당일에 선물하면 된다. 그걸 위해 오늘은 부회장실도 가지 않았다. 괜히 갔다가 표정 관리를 못해서 들키면 곤란하니.
오늘 못 간다─ 라는 언질조차 못한 건 마음에 걸리지만, 연락도 못할 정도로 바빴다고 하자. 선물 고르느라 머리가 복잡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고.
다음날, 부회장실에 찾아가니 늘 있던 주인이 없었다.
‘뭐지.’
혹시 외출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결석이라고?”
“예. 아침에 연락이 왔습니다. 감기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회장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빠르게 나왔다. 마르게타가 없다면 학생회실에 있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학생회 업무에 방해만 하겠지.
그래도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다. 오늘 못 볼 줄 알았다면 그냥 어제 올 걸. 하다못해 연락이라도 할 걸.
‘감기라.’
그리고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회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마르게타를 잘 알기에 믿지 못하겠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르게타가 결석까지 할 정도다. 정말 기침 몇 번 하는 수준의 감기면 아무렇지도 않게 왔겠지.
분명 가벼운 감기는 아닐 거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독감이라도 걸린 건가.
‘병은 마법도 안 먹히는데.’
애석하게도 이 대륙의 치료법은 상처 치료에 올인한 타입이다. 사지가 날아가고 장기자랑을 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고칠 수 있지만, 정작 감기나 두통 같은 소소한 질환에는 약하다.
다행히 ‘두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머리! 파괴한다!’ 수준으로 약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하루만에 뿅하고 나을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애초에 빙의 전 세계에서도 그건 불가능했지.
‘하필 오늘.’
침대에 누워 골골거릴 마르게타를 상상하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다른 날에 이랬어도 마음이 아팠겠지만, 하필 서프라이즈랍시고 마르게타를 바람 맞힌 다음날에 이런 일이 터졌다. 혹시 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감기를 지배하는 역병신도 아니니 자의식 과잉이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연락부터 해야지.’
한숨을 참으며 통신구를 꺼냈다. 먼저 괜찮은지 안부 좀 묻고, 마르게타가 괜찮다고 하면 병문안도 가야겠다.
여자 기숙사에 가는 건 조금 눈치 보이지만 마르게타가 아프다는데 눈치가 대수냐. 필요하면 여장을 해서라도 가는 게 맞다.
…그리고 내 연락이 마르게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이런 망할.’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이거 감기 맞아? 기절하거나 한 건 아니고?
***
오늘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었다. 힘없이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 봤다.
‘일어나야 하는데…’
이러면 안된다. 나는 바렌티 공작가의 일원, 유서 깊은 제국 아카데미 학생회의 부회장.
어깨에 짊어진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언제나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데 보여야 할 모습이니.
하지만 머리와 달리 몸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난이네.’
쓴웃음이 나왔다. 혼자 울고, 혼자 무기력해지고, 혼자 누워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아직 칼의 마음 속에 상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울었다. 칼에게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알면서도, 칼을 누구보다 먼저 보듬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심하다. 이러고 있으면 칼의 상처가 가라 앉을까? 이러고 있으면 내 욕심이 없던 일이 될까?
‘오히려 걱정만 하겠지.’
칼은 그런 사람이다. 본인의 가슴을 찢은 상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하고, 남의 상처에는 치명상이라도 되는 듯 호들갑인 사람.
내가 이럴수록 더 힘들어 할 사람. 안다, 너무 잘 안다.
…아니, 나는 칼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른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잘 알았다면 칼이 무덤까지 찾아갈 정도로 방치했을 리 없다.
그러면서 칼을 잘 안다고, 칼과 나는 운명적인 관계라고 우쭐거리고 있었다.
‘운명…’
지금은 그 운명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옥죄었다.
그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막내를 너무나 아끼는 아버님 덕분에 내 신랑감 조건은 나날이 높아졌고, 결혼도 조금은 늦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혜성 같이 등장한 것이 칼. 아버님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고, 내 마음에도 쏙 들었던 운명적인 남자.
그렇기에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내 운명, 이 만남도 우리의 운명.
‘운명일 리 없잖아.’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면, 칼이 첫사랑을 잃은 것도 운명인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도 운명인가?
운명이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칼의 슬픔이 나를 만나기 위한 운명이었다면, 내가 행복하기 위해 칼이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거니까.
그런 운명은 감당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운명이라고 좋아한 나 자신이 너무 끔찍하고 원망스럽다.
“미안해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사과였지만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당신의 아픔을 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내가 힘든 것만 생각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당신의 죽음이 운명이라고 생각해서 죄송해요.
당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아픔을 보듬지 못해서 죄송─
– 똑똑
칼을 향한, 칼이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향한 사과.
하지만 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소리가 상념을 끊고 말았다.
한심해. 나는 사과도 못하는 사람이구나.
“어…?”
슬쩍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난 곳을 보자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문이 아니라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칼?’
손을 흔드는 칼을 보자 머리가 굳었다.
여자 기숙사에 왜 칼이 있지? 게다가 왔다면 안에 있지, 왜 밖에?
아니, 애초에 내 방은 3층인데?
…귀신?
***
2황자파가 실각한 직후, 다르게 말하면 아직 본인들이 개같이 망한 걸 인정하지 않고 버티던 때.
그때는 감찰부가 정당한 집행을 시도해도 저택 문을 잠그며 버티던 놈들이 있었다. 그럴수록 죄목만 늘어나는데 미친 것들이지.
아무튼 버티는 사이에 감찰 대상들이 중요 서류를 소각할 수도 있는 노릇. 보편적이지 않은 빠른 침입이 필요했다.
“…너 뭐하냐?”
“물 위 걷는 연습. 가라앉기 전에 다른 발을 내딛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때 떠오른 것이 발터. 이 미숙한 친구를 위해 무덤에 있는 놈이 도움을 줬다.
나는 그놈이 물 위를 걷겠다고 하던 삽질, 그리고 기어코 걷는 것에 성공한 기행 열전을 실시간으로 봤다. 덕분에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도 알고 있었지.
그걸 응용해서 벽을 타고 다녔다. 아무튼 발이 벽에만 닿으면 몇 층이든 올라갈 수 있더라.
그래서 창문 깨고 침투했지. 씹새끼들, 그때 표정이 아주 볼만했어.
“그러니 귀신 같은 거 아닙니다. 애초에 대낮부터 돌아다니는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곱게 자란 공녀님이 보기에는 기겁할 모습이었나 보다.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친 마르게타는 순식간에 안색이 파래지더니 침대에서 구르듯 떨어졌었으니.
“미, 미안해요. 전 혹시, 칼이… 극단적인…”
거기까지 말한 마르게타는 입술을 꾹 깨물며 히끅거렸다.
터무니 없는 오해다. 난 오래 살 거다. 존나게 존나 오래 살 거다. 장관보다 먼저 죽는 건 억울하고, 언젠가는 퇴직해서 평온한 백수 생활도 누려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마르게타가 이런 오해를 하는 이유를 알기에 조용히 토닥여줬다.
‘어디까지 퍼진 거야.’
하필 노숙 사건이 마르게타 귀에도 들어가 버렸다. 언젠가는 들어갈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혹시 2과장 이 새끼, 1과장 소문 덮는답시고 내 소문을 고의로 퍼뜨리는 건가.
“걱정마세요, 마르. 제가 마르를 두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그 말에 마르게타는 더욱 서러운 듯이 눈물을 흘렸다. 곤란하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통했는데.
어제 얼굴을 안 보여서 그런가? 확실히 술에 취해 빌빌거리던 놈이 얼굴도 안 보였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내 위로도 억지 위로라고 생각하겠지.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선물 사는 건 조금 미룰 걸. 어차피 생일날 줄 선물인데 미리 살 필요도 없었잖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예?”
난데없는 사과에 마땅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분위기면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다.
하지만 마르게타는 내 품에 안겨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차라리 어제 왜 안 왔냐는 투정이라도 부린다면 이해가 됐을 텐데.
“미안해요, 전, 전 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는 건 앞으로 알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목 끝에서 멈췄다. 고개를 든 마르게타의 표정은 너무 처참했으니.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반응해도 마르게타가 용납하지 않을 거다.
“옆에서 으스대기만 하고, 질투하기만 하고…”
마르게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지만, 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으스댔다고? 질투?
‘그랬나?’
일단 마르게타의 기준과 내 기준이 많이 다르다는 건 알겠다.
“칼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면서, 정말 기다리기만 했어요. 조금이라도 도왔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기다려달라고 했으니 기다린 게 뭐 그리 잘못이겠나.
오히려 마르게타가 적극적으로 멘탈 케어를 해줬으면 민망했을 거다. 내 개인적 사정으로 밀어낸 사람이, 그 개인적 사정마저 보듬어주는 거니까.
“칼… 늦었지만, 정말 늦었지만… 제가 칼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머리가 어지럽다. 이미 마르게타는 내 옆에 있는 걸로도 큰 도움이 되는데.
그리고 품 속에 있는 반지케이스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이틀 남았는데.’
생일까지 고작 이틀.
그 이틀 사이에 생일 주인공을 울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