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20)
아무래도 나는 저주받은 반지를 산 것 같다. 마법 반지가 아니라 저주 반지였네 이거.
괜히 이상한 걸 사서 마르게타를 울린 게 아닐까─ 라는 합리적 의심마저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마르게타가 오열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도움이라니.’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말이었다.
이미 마르게타가 내 옆에 있는 걸로도, 내 옆에서 기다려주는 걸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도움이 되고 싶다니, 대체 어떻게?
머리가 복잡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침묵은 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마르게타의 상태만 악화시키겠지.
“마르. 이미 마르는 저에게 누구보다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거짓말.”
진심을 담아 꺼낸 말에 마르게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울먹이는 건 여전했지만 말은 끊기지 않았다.
“그러면 왜, 왜 저한테 말도 없이 제도에 갔던 거죠? 왜 혼자 묘지에 있던 거죠?”
떨리는 눈으로 말을 잇는 마르게타의 모습에 탄식이 절로 나올 뻔했다.
제도에 갔던 이유? 그냥 황태자가 밥이나 먹자고 불러서 간 거다. 당연히 당일에 돌아올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었다.
물론 묘지에서 네 발로 기어 다닌 건 예상 외의 사태였다. 설마 1과장한테 고백을 받을 줄 상상이나 했겠나.
‘그걸 어떻게 말해.’
공무원 생활 4년. 뻔뻔해져야 할 때는 얼굴에 철판 정도는 가볍게 깔 수 있는 경지에 올랐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미 마종공 때문에 혼란스러울 마르게타에게 ‘부하 직원이 고백해서요.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올게용.’ 같은 말을 어떻게 꺼내겠나.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닌 이상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
게다가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 줄도 몰랐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생각하기도 전에 들켜버렸어.
“제가… 칼에게 의지가 되지 못해서 그런 건가요?”
고개를 떨구며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올 뻔했다.
의지를 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마르게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나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부끄러운 얘기라는 것도 한몫했고.
그 선택이 오히려 마르게타에게 독이 될 줄은 몰랐다.
“저도 칼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칼의 상처를, 아픔을 온전히 보고 싶어요.”
“마르.”
한없이 우울해하는 마르게타를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마르게타는 내 목소리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죠?”
조심스레 고개를 든 마르게타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칼이 말하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는 건데, 기다리겠다고 한 건 전데 이제 와서…”
그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저걸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냥…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알 것 같으니까. 아주 작은 계기가 쌓이고 쌓여서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방학 때 마르게타에게 속을 털어놓은 것. 사실 그것도 털어놓았다고 하기 민망하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에는 너무 암울하고 무거운 얘기여서 최대한 간략하게 말했었다.
그때의 선택이 흐르고 흘러 지금까지 이어졌다. 나는 전부 말하지 않았기에 마르게타를 배려했고, 마르게타는 전부 듣지 못했기에 불안해했다.
“제가… 칼에게 의지가 되지 못해서 그런 건가요?”
‘망할.’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그것도 나 자신에게 여러 번.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을 때.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홀로 감당하려고 할 때.
나도 헤카테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지 않나. 헤카테가 나를 의지하지 못하고 떠난 것 같아 원망스러웠지 않나.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겉으로 보면 이번 사건은 1과장의 고백과 묘지 노숙 때문에 터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나와 마르게타 사이의 묘한 간극. 그 간극 때문에 터진 문제나 다름없다.
그리고 내 한숨 때문에 눈치를 보기 시작한 마르게타를 조용히 안아들었다.
“카, 칼?”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갔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무겁고 재미없는 이야기니까. 적어도 몸은 편하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마르.”
“아, 네, 네.”
“사실 많이 아프기는 합니다.”
그나저나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래, 대토벌 전쟁부터 천천히 말해야겠다.
아무래도 고아원 얘기를 하려면 그때부터 들어야 할 것 같으니.
조금은 색다른 기분이다. 그때의 일들을 이렇게 생생히 말한 적이 있었나.
그나마 게르하르트에게 살아있는 교과서 노릇을 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건, 인물 중심의 정보 전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시야에서, 내 심정이 가득 담긴 한탄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한탄.
“썩 좋은 얘기는 아니죠?”
어떻게 보면 추하고 부끄러운 행동이다. 21살 어른이가 18살에게 ‘세상 엿같더라.’ 같은 푸념을 하는 거니까.
그래도 지금은 해야 할 때다. 21살 칼과 18살 마르게타의 대화가 아니라, 서로 마음을 터놓고 평생을 함께할 사람들의 대화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그 헤카테라는 분은…”
내 말이 길어질수록 표정이 새하얘졌던 마르게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 분이라는 존칭 때문인지 살짝 웃음이 나왔다. 헤카테, 공녀님이 너한테 분이라고 하신다.
“예. 역천자와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라… 제 곁을 떠난 것 같습니다.”
“그, 그렇군요.”
마르게타는 자기가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그 사건과 관련된 죄인은 원흉인 카간과 헤카테를 지키지 못한 나밖에 없다.
카간은 죽었으니 결국 나만 죄인이지. 절대 마르게타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다.
“저기, 칼.”
“네, 마르. 편하게 말하세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쭈뼛거리는 마르게타에게 부드러이 말했다.
아무리 필요한 대화이고 받아야 할 충격이지만, 그렇다고 충격이 약해지는 건 아니다. 혼란스러울 마르게타를 보듬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
게다가 지금 마르게타를 잘 보듬어야 앞으로 나도 마르게타에게 신세지지 않겠나.
“칼도… 아직 상처가 있나요?”
“아.”
그 말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카간과의 전투가 치열했다는 것, 카간에게 입은 상처는 영구적으로 남는다는 것. 그 말을 들은 마르게타 입장에서는 내 상태에 대해서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있습니다. 아주 지독한 놈이라 그런지 오래 가더군요.”
“보여주세요.”
“예?”
이건 조금 의외인 요구였다.
“전부, 전부 알고 싶어요. 칼의 상처를 전부요.”
물기 가득한 눈으로도 다부지게 말하는 모습. 저렇게 부탁하면 거절하기 어려운데.
‘어차피 보여줬을 테니…’
고민은 짧았다. 마르게타와 결혼도 생각 중인 이상 평생 숨길 수 있는 상처도 아니다.
오히려 숨기고 숨겼다가 첫날밤에 보여주면 펑펑 우는 마르게타를 달래다가 밤이 지나가지 않겠나.
그렇기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외투를, 와이셔츠를 벗었다. 남 앞에서 옷을 벗는 건 조금 부끄럽지만 애써 태연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
그리고 상처가 드러나자 나지막한 탄식이 울려 퍼졌다.
“흉하죠?”
솔직히 내가 봐도 흉하다. 살만 겨우 붙인 상처라 아직도 베인 흔적이 여과 없이 보이니까. 카간 씹새끼, 죽을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골반 부근까지 이어진 검흔. 딱히 등의 상처를 검사의 수치로 여기는 것도 아닌데 너무 거창하게 난 상처다. 나도 가끔 흠칫하는데 마르게타는 오죽할까.
“아니요.”
하지만 마르게타는 내 상처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전혀, 전혀 흉하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빈말이라도 고마운 말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네, 존나 흉해요.’ 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아무튼 내 상처를 쓰다듬던 마르게타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르가 이렇게 울보인 줄은 몰랐습니다.”
“미,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내 놀림에 마르게타가 황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이미 흐르기 시작한 건 쉽게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마음이 좋지 않다. 마르게타가 충격을 받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그걸 각오하고 말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 아픈 게 두려워서 앞으로도 비밀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
그래도 예상한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다. 나 때문에 누군가 운다고 생각하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나.
“…전, 많이 부족했네요.”
살며시 끌어안자 품으로 파고든 마르게타. 잠시 동안이나 품에 안겼던 마르게타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칼을 안다고 자만했고, 정작 알고 나서도 혼자 감당할 수 없고.”
“감당하는 게 아닙니다. 같이 이고 가는 거죠.”
너무 일방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마르게타의 죄라면 그냥 몰랐다는 죄밖에 없다.
“그러면 지금까지 같이 이지도 않은 거네요?”
아니, 그게 그렇게 되네?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만 돼서 미안해요…”
“마르…”
안타깝다. 마르게타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처박히고 말았다.
‘너무 연달아 말했나.’
조금씩 나눠서 말해야 했나, 라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 정도로 마르게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헤카테를 떠나 보낸 충격을 말했다. 마르게타는 그 충격과 상처를 메꾸지 못한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1과장에게 고백을 받아서 묘지에 갔다고 말했다. 마르게타는 의지가 되지 못한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꼈다.
‘지금 줘야 한다.’
본능이 경고했다. 이틀 후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마르게타를 달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게 느껴졌다.
생일 당일에 줘야 의미가 있다고? 지금 생일 당사자가 없어지게 생겼는데 무슨 의미야.
“마르. 실례하겠습니다.”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반지케이스를 꺼내고, 마르게타의 왼손을 잡고, 바로 넷째 손가락에 끼웠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었다.
“마르는 짐이 아닙니다. 제 인생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
순식간에 끼워진 반지. 너무 순식간이라 마르게타마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이럴 때 줘서 죄송합니다. 사실 마르의 생일에, 마르가 가장 행복할 때 주고 싶었습니다.”
낭만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마르가 스스로를 짐이라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낭만을 챙길 여유가 없지 않나.
“그러니 마르. 이상한 말은 하지 마십시오. 마르는 제 동반자고, 첫 부인이 될 사람 아닙니까?”
신년하례식이 끝나면 철혈공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미 마르게타와 그러겠다고 약속도 했다.
철혈공에게 대가리 박고, 결혼 허락도 받고, 약혼까지 할 생각이었다. 마종공이 고백을 했어도 결코 변하지 않은 다짐.
그 다짐을 담아 마르게타에게 말했다. 내 첫 부인은 누가 뭐래도 당신이라고.
“…아니에요. 이건 아니에요, 칼.”
하지만 반지를 눈물 어린 눈으로 보던 마르게타는 조용히 반지를 뺐다.
…뭐지, 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