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21)
칼이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줬을 때, 세상이 내 손에 들어온 것 같았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말았다.
한심하다. 칼의 상처도 보지 않은 사람이, 봐야 할 것을 이제서야 본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기쁨을 누리는 걸까.
내 죄책감은 고작 반지 하나에 사라질 정도로 가볍고 가벼웠구나.
‘고작은 아니지만.’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 고작은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칼이 주는 반지. 절대 고작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기쁘게 받을 때가 아니다.
“…아니에요. 이건 아니에요, 칼.”
망설임 끝에 반지를 빼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다.
어느 때보다 바랐던, 만약 어제 받았다면 뛸 듯이 기뻐했을 반지. 지금은 나를 꾸짖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걸 수도 있다. 혼자 의미 없는 죄책감에 잡아 먹혀 용기를 낸 칼에게 상처를 주는 걸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 받겠나. 나에게 염치라는 게 있으면 이걸 어떻게 받아.
“저는, 저는 자격이 없어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칼에게 건넸다. 칼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멍한 눈빛이었다.
“전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냥, 그냥 그런 사람에 불과해요.”
운이 좋은 사람. 칼의 얘기를 들을수록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끔찍하게 첫사랑을 보낸 칼. 그런 칼은 누구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고, 누구도 다가갈 수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나는 다가갔다. 어떻게? 아버님의 힘으로. 아무리 칼이라도 아버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
공작의 힘으로 상처 받은 칼에게 다가갔다. 칼은 그럼에도 나를 정중히 밀어냈다. 나는 사정도 모르고 남자에게 차였다고, 감히 나를 밀어냈다고 울었다.
‘한심해.’
울며 불며 통곡했던 과거. 이미 부끄러운 사건이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부끄러웠다. 한 남자의 상처를 자극해놓고 내가 아픈 것만 신경 썼다.
그 후, 칼과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는 더욱 가관이었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역시 나와 칼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좋아했다. 칼이 품은 상처도 모르고.
운명이라 생각하고 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마치 내가 칼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데.
‘이기적인 년.’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험한 말. 아마 지금의 나에게 하기 위해 남겨둔 거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칼에게 다가갔다. 모른다는 걸 방패 삼아서 상냥한 칼을 난도질했다.
‘다 아는 것처럼…’
방학 때 칼의 마음을 들었을 때. 그때는 정말 칼의 모든 걸 들은 것 같았다. 칼이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줄 알았다.
그래서 자만했다. 나는 언제든 칼을 기다릴 수 있다고. 칼이 나에게 다가오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실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칼이 첫사랑을 잃었다는 것만 들었지,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보냈는지도 몰랐음에도.
알면 그럴 수 없다. 옆에서 나야말로 첫 번째라 으스대고, 다른 여자가 칼에게 오는 걸 질투했을 리 없다.
“저는, 저는 칼의 상냥함에 기대서 억지를 부린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온 멍청한 사람이… 제가 처음이라, 그냥 운이 좋아서, 그래서 칼 옆에 있을 수 있었어요…”
비참하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내 입으로 내 추악함을 말하니 미칠 것 같았다.
더 미치겠는 건 내가 울 자격도 없다는 거다. 칼은 내가 얼마나 우습고 역겨웠을까. 부인이 되겠다고 붙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에는 관심 없고 첫 번째라는 거에만 신경을 썼으니.
“전 칼을 사랑해요. 세상이 무너져도 이건 변하지 않아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자격이 없는 것과 별개로 칼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다.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칼을 사랑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칼의 첫 번째를 차지할 자격은 없어요…”
칼을 사랑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루이제 영애, 이리나 영애, 마종공, 게다가 칼에게 고백했다는 부하까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사람들을 제치고 처음일 자격이 있을까? 그 사람들보다 나은 게 있을까?
신분?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마종공이 첫 번째여야 한다.
함께 지낸 시간? 그러면 부하를 이길 사람은 없겠지.
아, 하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칼의 마음을 찢어버린 거. 그건 내가 제일이지.
“그러니… 저보다 더 나은 사람한테 주세요. 칼은 상냥하니까, 제가 너무 징징거려서, 불쌍해서 주는 거예요. 그 마음을 착각하면 안돼요.”
그래. 칼은 마음을 찢은 나도 불쌍히 여겨 안아주는 거다. 추하고 추하게 들러붙어서, 이제 칼이 아니면 시집을 갈 상대도 없어서 구제해주는 거다.
“…그렇습니까?”
내 말에 칼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바닥 위에 있던 반지를 가져갔다.
울지 마. 네가 자초한 거잖아. 이게 맞아. 나처럼 꽃밭에 살던 이기적인 년보다는 진짜 칼을 이해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게 맞아.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칼은 오른손을 들더니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흐얏!”
반지를 끼워줬을 때처럼 순식간에 날아온 충격. 갑자기 몸이 뒤로 밀려나는 감각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이상한 말만 하길래 잠시 실례했습니다.”
“이, 이상한 말…”
그래도 나름 용기 내서 한 말인데. 그걸 그냥 이상한 말로 취급해버리면…
“자격이 있니 없니, 그걸 왜 마르가 정하는 겁니까?”
그래도 험악한 칼의 표정을 보자 제대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칼이 화를 내는 건 처음 봤으니까.
“마르가 마음대로 말했으니 저도 마음대로 말하겠습니다.”
우물쭈물거리는 내 모습에 칼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실 마르. 이상하기는 합니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내 입으로 이기적인 년이니 뭐니 했지만, 막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상하다는 말을 들으니 버틸 수 없었다.
“당당한 척하면서 사실 허술하고, 마음은 은근 여려서 혼자 끙끙 앓고. 게다가 쓸데없는 걱정도 많죠. 가끔 혼자 앓다가 혼자 발끈하기도 하고.”
칼의 입이 열릴수록 고개가 점점 내려갔다. 칼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어째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더 서글펐다.
“그래도 그런 마르를 좋아하는 건 접니다.”
숙여진 머리가 갑자기 위로 향했다. 칼이 내 뺨을 잡고 강제로 시선을 마주쳤다.
“제가 본 모든 것을. 제가 아는 모든 점을. 전부 좋아하는 겁니다.”
“카, 칼…”
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아 슬쩍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칼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지 뺨을 꽉 잡았다.
“자격이요? 제가 마르를 좋아하는 거 말고 다른 자격이 필요합니까?”
“그, 그건 칼이 착각을…”
“아닙니다.”
이상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칼이 좋다고 말해주니 심장이 두근거린다.
“저는 아직 철이 덜 들었습니다. 그래서 좋고 싫은 티를 너무 잘 냅니다.”
아까보다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칼.
“그래서 싫은 건 아무리 유용해도 쳐냅니다. 근처에 있는 것도 소름이 끼치거든요.”
대신 좋은 건 도망을 치려고 해도 잡아둡니다.
나지막히 덧붙여진 말에 몸 전체가 떨렸다.
“그러니 아까 마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한참이나 내 눈을 보던 칼은 살며시 멀어지더니 반지를 들어 올렸다.
“사실. 이거 커플링입니다.”
그렇게 말한 칼이 손톱으로 반지를 긋자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독특하죠? 둘이 아닌 하나로 이루어진 커플링. 이게 더 하나가 된 것 같고 좋지 않습니까?”
작게 웃음을 터뜨린 칼은 내 손에 다시 반지를 끼워줬다.
…이번에는 뺄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르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온 게 아닙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게 아닙니다.”
그리고 반대쪽 손은 서서히 내 이마를 향해 다가왔다.
“오히려 마르가 저를 좋다고 해줘서, 속으로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기댈 수 없는 무능력한 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칼의 손을 따라 올라가는 앞머리.
“만약 마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다면,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는 누구보다 마르만큼 자격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마에 닿는 입술의 감촉.
“아시겠습니까?”
나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
고개를 끄덕이던 마르게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뒤로 쓰러졌다.
기절했다. 안 그래도 혼자 마음 고생을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말로 처맞고 난데없이 이마 키스까지 당하니 정신줄이 끊긴 것 같았다.
…그래도 표정을 보니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기는 하다.
‘잘 넘어갔다.’
새근거리는 마르게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오늘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면 우리 사이는 파국이었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처참한 나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조심스레 마르게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상상 이상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급발진이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마르게타 입장도 이해가 된다. 마종공의 난입으로 불안한 입지, 첫 사랑의 묘비에 찾아간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정작 본인에게는 오지 않는 야속한 사람.
하나만 터져도 골치 아픈 사건이 연이어 터지니 마르게타의 멘탈도 같이 터졌겠지. 무엇보다 자신이 연인의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는 느낌. 그 느낌을 받은 순간 마르게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으니.’
그거보다 서러운 감정이 없더라. 그걸 아는 놈이 같은 짓을 했다는 게 민망하네.
미안한 마음에 더욱 정성을 담아 마르게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여자가 자기는 자격이 없다, 부디 나 말고 괜찮은 여자를 찾아라, 같은 말을 꺼내려면 대체 얼마나 몰린 상황이어야 가능할까.
마르게타가 당당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여린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내 잘못이지.’
아니, 다른 곳에 원인을 돌리지 말자. 속을 털겠다고 해놓고 반 정도만 턴 내 잘못이니.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다 내 손에 끼워진 반쪽 반지를 쳐다봤다.
‘도로 붙여야 하나?’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지에서 반/지가 되어버린 불쌍한 아이.
하나로 이루어진 커플링?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냐. 이거 그냥 하나다.
‘커플링을 샀어야 했는데.’
요즘 머리를 안 써서 그런지 지능이 퇴화했다. 커플링이 아니라 그냥 반지를 사고 말았다.
뒤늦게 그걸 깨달아서 냅다 쪼개 버렸지. 혹시 마법 반지라 버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마나를 손톱에 두르니 어떻게 갈라지기는 하더라.
‘…좋아하니 다행이지.’
그래도 두 번째로 끼워줬을 때, 분명 마르게타의 표정은 감동과 행복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래, 이건 사실 하나로 이루어진 커플링이다.
오늘부터 그렇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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