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22)
마르게타의 멘탈을 성공적으로 인양한 후, 정말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미래에 터질 사고까지 끌어모은 위기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은근히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생일. 그 생일마저 평범하고 무난하게 지나갔다.
“전 이미 소중한 걸 받았는 걸요.”
왼손, 정확히는 반/지… 아니 반지를 쓰다듬으며 헤실헤실 웃는 마르게타를 보니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저게 원래는 하나였다는 건 죽을 때까지 가져갈 비밀이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사실 그거 부서진 겁니다.’ 같은 말을 하면 마르게타의 멘탈도 다시 부서질 테니.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드리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상적인 반지로 교체하기 위한 복선을 까는 것뿐.
“후후, 이거보다 좋은 건 없을 거예요. 첫 반지니까요.”
그마저도 실패했지만.
큰일 났네 이거. 계속 쪼개진 반지를 끼게 해야 되나?
‘…기회는 오겠지.’
약혼 반지, 결혼 반지. 이래저래 명분은 많다. 언젠가는 반지 정도야 갈아 끼울 수 있지 않겠나.
“저기, 칼.”
“예, 마르.”
“잠시 손 좀 줄 수 있어요?”
몇 번째인지 모를 부탁에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마주 왼손을 내미는 마르게타.
“정말 하나네요.”
흥얼거리듯 말하는 마르게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내가 낀 반과 마르게타가 낀 지. 서로 왼손을 겹치자 하나의 반지로 완성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원래 하나였으니…’
차마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이건 몇 번을 다짐해도 부족하다. 절대, 절대 밝혀져서는 안될 비밀이다.
덕분에 며칠 전, 반지를 판 상인에게 금화를 넉넉히 쥐여줬다. 아카데미가 아니라 제도에서 장사하라고. 이걸로 마르게타에게 들킬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무 뜬금없는 조치지만, 상인도 제도 진출에 기뻐했으니 모두가 행복한 결과 아닐까? 난 그렇게 믿는다.
“…다시는 빼지 않을게요.”
살며시 손을 잡으며 말하는 마르게타.
정말 세상이 무너져도 평생 끼고 다닐 것 같은 기세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돌아다닐 때마다 무수한 시선이 꽂혔다.
“정말이에요.”
“하나로 합쳐지는 반지라니, 멋지네요.”
멀리서 속닥거리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언제부터 시선에도 물리력이 생긴 거지?
‘묘하게 익숙한데.’
사파리의 맹수가 된 것 같은 이 상황. 너무 익숙하다. 마종공 사건 때도 이랬었다.
마종공이 감찰부장에게 고백했다는 1파, 그럼에도 철혈공의 딸과 반지를 맞췄다는 2파. 시선이 집중되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물론 그때와 달리 제국 전체에 퍼진 건 아니지만, 시간 문제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카데미만큼 소문 퍼지기 좋은 곳도 없지.’
온갖 귀족 자제들이 모인 사교의 장. 심지어 간혹 외국인도 입학하는 교육 기관.
그런 곳에서 소문 하나가 제대로 퍼지면 순식간에 제국, 대륙을 달구는 거다. 그것이 통제할 이유가 없는 소문이면 더더욱.
“칼.”
“아, 마르.”
애초에 아카데미를 수시로 배회하는 마르게타 덕분에 통제하려야 통제할 수 없기도 했고.
“우연이네요. 여기서 칼을 보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왼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는 마르게타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우연은 아닌 것 같지만 우연이라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아무튼 원래는 학생회 업무 때문에 부회장실에만 머물던 마르게타. 하지만 반지를 받은 이후에는 엄청난 열정으로 아카데미를 돌아다니고 있다.
왜 그러는지 알기에 귀여우면서도 무서웠다. 만약, 만약 내가 그날 반지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터졌을까…
‘난리 났겠지.’
차마 자세한 상상을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냥 난리로 퉁치자.
“마침 점심 시간이네요. 괜찮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빠른 대답에 만족스러운지 마르게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위한 손.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동작이다.
‘왼손…’
마르게타가 원래 오른손잡이라는 것만 빼면.
원래 입가를 가릴 때도, 부채를 들 때도, 손을 잡을 때도 오른손을 쓰던 마르게타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반지를 받은 이후로는 입가를 가릴 때도 왼손으로, 부채를 들 때도 왼손을 쓴다. 왼손에서 찬란히 빛나는 반지를 과시하기 위해.
“칼?”
“아, 미안합니다. 가시죠.”
수군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마르게타의 손을 잡았다.
그래, 시선이나 소문이 무슨 상관이냐. 마르게타가 기뻐하면 그만이지.
그냥 마르게타가 과시할 정도로 기뻐한다는 거에 뿌듯해 하면 충분하다. 내 선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니.
반지를 반/지로 만들든, 커플링을 맞추든 내가 제과 동아리 고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수시로 내 왼손을 흘끔거리는 루이제,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동아리실에 눌러 앉아 동참하는 이리나, 제과 동아리라는 컨셉을 버린 건지 블랙잭을 하는 다른 부원들.
그 사이에서 고문 역할을 수행하는 건 생각보다 벅찬 일이었다.
그래도 일이 벅찰수록 퇴근할 때의 기쁨은 더욱 큰 법.
– 조오오카아아아─! 조카조까조카!
“저 귀 멀쩡합니다. 한 번만 말하십쇼.”
하지만 그 기쁨이 무너지면 절망도 크다.
침대에 눕자마자 빛을 뿜는 통신구. 혹시 소문을 들은 어머니나 장관인가 싶어 받았지만, 놀랍게도 현명공이었다.
‘환장하겠네.’
오늘도 어김없이 술에 먹혀서 히히힝거리는 현명공. 마음 같아서는 바로 끊어버리고 싶지만, 공작의 연락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 아아아니이이이! 죠카한테 열락하-눈대 이유가 피료해!?
당연히 필요하지. 공작이 감찰부장한테 직통 연락을 하는 건데.
물론 그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아무리 취한 상태여도 공작은 공작.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가 기분이 상하면 골치만 아프다.
게다가 보통 술에 취한 사람이 깨어나면 취했을 때의 기억을 못한다고 하지만, 현명공은 매일 취한 상태라 그런지 기억이 멀쩡하다. 내가 볼 때 저 양반은 종족이 다른 것 같아.
“공사가 다망하신 각─”
– 외숙모.
왜 이럴 때는 발음이 정확하냐.
“…외숙모님께서 연락하실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서…”
– 프흐흐, 그건 그러치이이이~
다시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키는 현명공의 모습에 조용히 뒷목을 주물렀다.
– 으잉? 죠카, 요즘 피고내?
네. 너 때문에요.
“별거 아닙니다. 그냥 잠을 잘못 자서 그런지 목이 찌뿌둥합니다.”
– 퍄하하! 우리 쟈기~ 도 그러덩데! 가죡키리는 닮나 봐!
그 말에 몇 번 보지 못한 외숙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아주 가끔 대화하는 나도 뒷목을 잡는데 평생 같이 사는 당신은 어떨까. 갑자기 존경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 그으─ 치이이이~?
그렇게 계속 웃다가 마시다가 웃던 현명공은 병이 비고 나서야 용건을 꺼냈다.
– 히히, 사실 조카한테~ 묻고 시픈게 이써서~
“예, 말씀하십시오.”
내 대답에 현명공은 잠시 숨을 몰아쉬며 연붉은 연기를 내뱉었다.
불안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 주당이 취기까지 몰아내는 건가.
– 조카. 내가 했던 말 잊은 거 아니지?
“예?”
공무원의 본능을 자극하는 말에 저절로 몸이 굳어버렸다. ‘너 내가 하라는 거 했냐?’ 와 동급의 문장.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현명공이 나한테 한 말? 뭐가 있지? 주정, 푸념, 땡깡, 광기를 빼면 딱히 남는 게 없─
– 조카. 마종공한테 끌려가는 거 같으면 먼저 찔러봐. 그럼 좋아서 자지러질 거야.
‘아.’
이거다. 이거밖에 없다.
– 안 잊었지~?
“예, 물론입니다.”
– 그런데 왜 그랬어.
히죽거리던 표정이 빠르게 돌변했다.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
그리고 손수건 하나를 꺼내더니 눈가를 닦으며 우는 시늉을 했다.
– 다 들었어. 이 외숙모는 너무 슬퍼. 우리 조카 앞날이 너무 어두운 걸.
“그으…”
– 혹시 조카가 여러 조각이 나면, 하나는 꼭 챙겨서 크라시우스로 보낼게!
이 시발. 내가 박혁거세도 아니고 왜 조각이 나는데.
절로 굳어버린 내 표정에 현명공은 다시 깔깔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 조카. 나는 우리 조카의 결혼을 축하할 수 있어. 철혈공의 막내라며? 예전에 보니 귀엽고 똑똑하더라!
그런데 다른 사람도 축하할 수 있을까?
그렇게 덧붙인 말에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 부끄러워서 허둥거리는 마종공~ 신년하례식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랑하는 예비 여보가 다른 여자한테 반지를 줬다고 하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 아, 야속한 사람! 나는 이렇게 애태우고 있는데 누구는 한가롭게 연애나 하고!
그 말은 조금 억울했다. 한가하다니, 마르게타에게 반지를 주던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심각했는데.
그래도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직은 아카데미에만 머무는 소문? 마종공 때와 달리 전서구가 없어서 늦게 퍼져?
‘아카데미에도 마법사 있잖아.’
방심했다. 마종공의 눈으로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너무 방심했어. 아니, 진짜 지능이 떨어졌나? 왜 그걸 생각 못했지?
떨리는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자 현명공은 씨익 웃더니 결정타를 날렸다.
– 텔레포트, 필요하지?
“…부탁드립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현명공.
헛웃음이 나왔다. 급한 불, 아니 폭탄 심지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스스로 제도로 가야 하는 이 상황.
참담하다. 분명 신년하례식 전까지는 제도에 가지도, 보지도 않을 생각이었는데.
– 지키지 못할 다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멍하니 통신구를 보는 사이, 황태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태자, 네가 맞았어. 나한테 제도를 외면하는 건 지키지 못할 다짐이었어…
‘그 전에 오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새끼다.’
그리고 국립묘지에서 황급히 나오며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시발.’
사실 나는 짐승 새끼다. 북방에서 짐승들과 싸우다 보니 나도 짐승이 됐다.
그냥 그런 걸로 치기로 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나름대로의 준비를 마치고 마탑에 들어갔지만, 바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로비에 발을 디디니 근처에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히더라.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저 계단 위에서부터 부탑주가 달려왔다.
“감찰부장!”
심지어 나를 애타게 부르면서.
두렵다. 마종공에 비하면 어리지만, 인간 기준으로는 충분히 베테랑 노년 마법사인 부탑주다. 나이에 걸맞는 품위와 조용함이 특징인 부탑주. 그런 부탑주가 남들 보는 앞에서 황급히 뛰어왔다.
‘망했네.’
그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마탑의 2인자가 체면을 버릴 정도의 긴급 상황.
당연히 영원불멸의 1인자가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거겠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탑주.”
“예, 오랜만입니다. 자, 일단 가면서 얘기하시죠.”
내 인사에도 불구하고 부탑주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히 길을 안내했다.
그럴수록 내 본능은 더욱 크게 외쳤다. 마종공의 상태가 정말 정상은 아닐 거라고.
“…각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매도 알고 맞아야 그나마 덜 아픈 법. 조심스레 마종공의 상태를 묻자 부탑주는 너 말 잘했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억울하다. 나는 자괴감에 잡아먹힌 레이디를 달랜 죄밖에 없는데.
“요즘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와서 그런지, 각하께서도 영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십니다.”
애써 포장을 하려다 실패한 답변이 들려왔다. 그렇구나, 업무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구나.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평온하고 마이페이스인 마종공이 업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분노 상태라면, 대체 얼마나 뜨거운 지옥불을 가슴에 품고 있겠는가.
“각하의 심기가 어지러워진 것 같아 안타깝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현명공이 말했을 때 바로 제도로 갈 걸 그랬다. 괜히 미루고 미루다가 존버 중인 마종공만 자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마르게타에게 반지를 준 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순서만 적절했다면 지금 같은 일은 터지지 않았을 거다.
‘이럴 필요 없기는 한데.’
사실 고백도 마종공이 일방적으로 했고, 나를 좋아하는 이유도 모르는 상황이다. 마종공도 본인 입으로 신년하례식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니 내가 눈치를 볼 건 없기는 하다.
그래도 마종공에게 이래저래 배려를 받은 것도 많지 않나. 비록 고백 사태 이후로 어색하고 곤란한 건 맞지만, 그동안 받은 호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공작이 비뚤어지면 어떻게 될지 무섭기도 하고.
“감찰부장의 걱정만큼 심각하신 건 아닙니다.”
그렇게 흑화한 마종공을 상상하려는 찰나,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걱정만큼은 아니라고?’
그런데 업무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그런 내 눈빛에 부탑주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요즘 탑주께서 멍하니 계시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걷다가 벽에 부딪치시고, 서류도 종종 잃어버리십니다.”
“예?”
뭐야 그거. 듣기만 하면 별거 아닌 증상인데.
“가끔은 잉크병을 쏟기도 하시고, 마법을 영창까지 하시며 발동하기도 하셨죠.”
“그렇습니까…”
“예. 사소한 일들이지만, 그래도 탑주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는 부탑주의 모습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찮아.’
너무 하찮다. 난 마탑 전체에 냉기가 불거나, 분노한 마종공이 모든 걸 뒤엎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데 부탑주의 증언을 들으니 정말 걱정만큼 심각한 건 아니다. 애초에 분노보다는 시무룩에 가까운 느낌이 강하다. 마탑이 어수선한 것도 분노한 상사에 대한 움츠림보다는 색다른 모습을 보이는 상사에 대한 혼란.
‘생각보다 괜찮다.’
그래도 덕분에 활로가 보였다. 마종공이 분노 상태가 아니라 그냥 기가 죽은 상황이면 대처하는 건 간단하다. 시무룩한 마종공을 달래주고 어울리면 그만이니까.
– 조카. 마종공한테 끌려가는 거 같으면 먼저 찔러봐. 그럼 좋아서 자지러질 거야.
그리고 예전에 현명공이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이미 늦었다는 건 인정한다. 조언은 들었을 때 하는 게 가장 빠른 법이니.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은 건 아니다. 100%의 효과는 아니겠지만 60, 70% 정도는 발휘할 거다.
‘먼저 찌르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보였다. 그 방법이야 말로 유일하고도 최선인 방법이라고.
신분과 연륜으로 압도하는 마종공.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내가 이래저래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지금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겠지만 마종공은 나를 마음에 품은 상황. 반면 나는 마종공에게 딱히 답변을 준 적이 없다.
지금의 신분적 상하 관계를 뒤집을 수 있는 무기가 내 손에 들려있다는 것.
…사랑을 이용하는 게 많이 개새끼 같지만, 그래도 공작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 이점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탑주께서 다른 사람들을 전부 물리셨습니다.”
어느새 탑주실 앞에 도착하자 부탑주는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돌아갔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 피 보기 싫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니 슬쩍 불안감이 솟았다.
‘괜찮은 거 맞지?’
분명 부탑주는 걱정만큼 심각한 건 아니라고 했다. 부탑주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저렇게 피하는 걸 보니 괜히 불안해진다.
아니, 부탑주를 믿자. 설마 마탑 2인자 정도 되는 양반이 한참이나 어린 놈한테 거짓말을 했을까.
‘찌르기.’
심호흡을 하고 탑주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내가 먼저, 내가 먼저 찌른다. 마종공을 압도해서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그 일환으로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사실 찌른다는 게 무슨 행동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혀보자.
이래 봬도 나는 현명공과 족보로 얽힌 관계가 아닌가. 그 현명의 편린이 나에게도 있을 거다.
현명공, 나에게 힘을!
피가 이어진 건 아니지만 제발!
***
요즘 들어 무기력하고 머리도 멍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겪는 일이다.
이유는 알고 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으니.
‘반지.’
무심코 왼손을 쳐다보고 말았다. 물론 그런다고 없던 것이 생기지는 않는다.
아무 장신구도 없는 손. 밋밋하고 특별할 것 없는 손.
‘…반지.’
계속 머리를 맴도는 단어. 처음 그 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단어.
‘부럽구나.’
그저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부럽다. 마르게타 공녀가 이 세상 누구보다 부럽다.
아가에게 반지를 받다니, 대체 무슨 기분일까.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텐데.
너무 부럽다. 당장 아가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고 싶다. 나에게도 끼워달라고 근처를 맴돌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니.’
슬쩍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그래, 내 넘치는 사랑과 달리 나와 아가는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다.
아직 아가에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나도 아가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신년하례식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니, 답을 독촉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아가에게 반지를 받을 자격이 없다.
‘괜히 기다린다고 했나.’
아가에게 마음을 보였던 그날, 계속 밀어붙였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방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털어냈다. 아니다, 그 방법은 아니야. 그랬다면 아가가 혼란스럽기만 했을 거다.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 분명 그랬을 거다. 그러니 내가 시간을 가지고, 여유를 두고 아가와 떨어진 건 옳은 선택이야.
‘아가를 위한 선택이었어.’
애써 그렇게 자기 위안을 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아가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그래도 서글픈 심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아가를 보지 못하는 것도 슬픈데, 아가가 다른 여인에게 반지까지 줬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그랬다.
적어도 아가를 볼 수 있다면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랠─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텐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갑자기 열리는 문, 뒤이은 인사.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눈만 깜빡였다.
혼란스럽다. 저 문이 내 허락 없이 열린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
눈으로 본 것을 머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그 혼란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제가 방해했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나가─”
“아니, 아니란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방해라니, 아가라면 언제 와도 좋다. 바쁠 때 오더라도 아가를 보고 힘을 낼 수 있으니 문제없다.
“다행입니다. 기껏 시간을 내서 왔는데 각하께서 바쁘시면 서운했을 테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아가를 보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가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애가 탔는데.
그래도 내 마음을 알고 아가가 직접 와줬으니 행복감이 더욱 컸다.
“저도 각하와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자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뒤이은 말에 머리가 굳고 말았다.
“사랑은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멍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가가 나타난 이후로 일방적으로 아가에게 밀리고 있다.
“부탑주도 각하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요즘 피로에 시달리시는 것 같다고요. 저도 각하께서 잘못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평소와 달리 주도적으로 주제를 꺼내는 아가.
“각하께는 쓸모가 없겠지만, 그래도 제 부족한 성의입니다.”
하얀 빗을 꺼내며 선물이라고 건네는 아가.
“사양은 말아주십시오. 저희 사이에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아가라면 절대 꺼낼 리가 없는 능글맞은 말.
혼란스럽다. 하나만 겪어도 당황스러울 텐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연달아 겪고 있다.
아까부터 입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그저 아가의 말에 대답하는 것이 고작,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 내가 그럴 때마다 아가는 그 틈을 파고들어 더욱 달콤한, 더욱 부끄러운 말을 했다.
어떻게 보면 공작을 능멸하는 것이다. 공작을 우롱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오히려 좋아.’
이런 아가의 모습에 더욱 두근거렸다. 공작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모습이 공작의 반려처럼 느껴졌기에.
계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기 위해 혼심을 다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해도 가슴이 거부했다. 괜히 이 상황을 엎어버렸다가 다시는 이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봐.
“인사드리러 오기를 잘했군요. 신년하례식까지 기다렸다면 그동안 각하를 뵙지 못해 쓸쓸했을 것 같습니다.”
“그, 그러니?”
미소를 짓는 아가를 보자 결국 내 입꼬리도 올라가고 말았다.
***
오늘부터 현명공과 나는 둘이되 하나인 존재다. 역시 현명공의 안타까운 주량은 현명함을 억누르기 위한 에넨의 디버프가 분명하다.
탑주실에 비장한 각오로 발을 들인지 어언 1시간. 아무런 문제도 없이 대화를 주도할 수 있었다.
– 조카. 마종공한테 끌려가는 거 같으면 먼저 찔러봐. 그럼 좋아서 자지러질 거야.
‘진짜였네.’
내가 하고 있는 게 찌르는 게 맞는지 헷갈리지만, 효과가 있는 걸 보면 맞을 거다.
마종공은 아까부터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누가 이 사람을 지혜의 상징인 마종공이라 생각하겠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만족스러운 성과를 확인했으니 슬슬 판을 접자. 언제까지 제도에만 있을 수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벌써 시간이…”
쉴 새 없이 파닥이던 마종공의 귀가 힘없이 내려갔다.
“그럼 조만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각하의 시간에 비하면 제 시간은 짧으니, 최대한 많이 봐야지요.”
그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마종공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마종공의 고백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마종공의 페이스에 말려 허우적거릴 일은 없다고.
그러면 마종공을 보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오히려 자주 보면서 정을 쌓고, 그러다 보면 내 선택에 더욱 도움이 되겠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가의 시간도 나와 같아질 테니.”
내 말에 다시 귀가 올라간 마종공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하고 같아지다니?
‘…혼혈은 수명이 짧나?’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하고 마종공의 시간이 같을 리가 없지 않나.
“아가도 40년만 지나면 수백 년을 살아갈 수 있을 거란다.”
…?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마종공.
하지만 내 머리는 마종공의 얼굴과 달리 급속도로 식어갔다.
“각하.”
입을 열고도 흠칫했다. 내가 들어도 목소리가 너무 가라 앉았기에.
그래도 멈출 수 없다. 이건 확인해야 할 일이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수백 년을 살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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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했던 분위기, 두근거렸던 가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미소를 머금었던 아가는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나를 쳐다봤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어째서 아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분명 아까까지는 좋았는데,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각하.”
당혹감에 대답을 못하고 있자 아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 하지만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는 것처럼.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수백 년을 살다니요.”
이번에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가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잠깐의 짜증이나 억울함이 아닌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
“포션.”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며 한 단어를 내뱉었다.
물론 이걸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내뱉은 말에 불과하니까. 이 말조차 안하고 입을 다물었다면 아가는 즉시 등을 돌렸을 테니.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아가는 등을 다시 소파에 뉘였다. 다행이다. 일단 당장 돌아가는 건 막았다.
“아가에게 줬던 포션, 기억나니?”
“예, 기억합니다.”
“그 포션이 수명을 늘리는 역할을 한단다.”
아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 당장 효과가 있는 건 아니고, 40년을 꾸준히 섭취해야 효과가 나온단다. 지금은 단순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정도야.”
본능적으로 덧붙이자 일그러졌던 표정이 조금은 진정됐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가는 수명이 길어지는 것을 꺼려 한다는 걸. 단순히 미지에 대한 어색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걸.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건, 장수종과 같은 수명을 얻는 건 모든 인간들의 염원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나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장수종처럼 만들기 위해 인생을 쏟아부으셨다.
단순히 부모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수명을 가진 연인이기에 수명에 집착한 것이 아니다.
‘분명, 분명 전부.’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가며 본 인간들. 내가 본 인간들은 전부 장생을 갈망했다. 전대 황제도, 전전대의 황제도, 황제가 아닌 수많은 귀족들도. 심지어 신의 뜻을 따른다는 성직자마저.
그들은 나를 보면 은근한 부러움을 표하고는 했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나를 애타는 눈으로 보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기에, 누릴 것이 많기에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이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하기에 지금의 영화를 누리고자 했다.
‘전부, 그랬는데…’
심지어 황족, 귀족이 아닌 평범한 평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것이 부족한 평민들도, 어쩌면 행복보다 절망이 더 많을 계층의 인간들도 장수를 원했다.
죽음이 두려우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 세상을 두고 미지를 접하는 것이 두려우니까.
‘당연히 아가도…’
아가는 부족한 것이 없다. 부, 명예, 권력, 개인의 힘까지. 그렇기에 당연히 장생을 원할 거라 생각했다. 아가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나.
나와 함께 수백 년의 시간을 살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영화, 아니 지금보다 더욱 화려할 영화를 누리며 수백 년을 산다. 아가도 인간이기에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낯설기는 하겠지. 당혹스럽기도 할 거다. 갑자기 수명이 배 이상으로 늘었는데 태평할 사람은 없다.
그래도, 그래도 결국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각하.”
잠시 말이 없던 아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한마디에는 아가의 감정이 농축되어 있었다.
자제하고 자제하여,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꾹 참은 것이 느껴지는 말.
“아가도 장생을 원할 거라─”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끊기고 말았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 공작으로서 겪을 리가 없는 상황.
물론 아가에게는 공작이 아닌 하나의 여인으로 보여지고 싶기에 화가 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가가 나를 공작이 아닌 그저 베아트릭스로 보는 것 같아 기꺼운 일이다.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을 원한 건 아니다. 아가가 내가 공작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분노하기를 원한 게 아니다.
“그걸 왜 각하께서 판단하신 겁니까?”
어느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는 새하얘져서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가가 당연히 장생을 원할 거라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여 진행한 일이다. 하지만 아가가 장생을 거부한다? 그러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각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아가는 다소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 녀석들을 먼저 보내고 힘들어 한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누그러들었다기보다는 허탈한 목소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아가의 목소리에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다. 아가가 대토벌 전쟁 직후,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때 처음 봤으니까.’
아가를 처음 만난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그저 비정상적인 회복력을 가진 아이가 있다고 하여, 역천자를 토벌하고 생환한 유일한 아이라고 하여 관심을 가진 거였다.
하지만 실험을 목적으로 만날수록 아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소중한 인연을 떠나보낸 아이, 마치 과거 부모님을 잃은 나와 같던 아이.
‘나하고는 달랐지.’
그럼에도 아가는 묵묵히 나아갔다.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나아가고자 했다. 부모님을 잃은 내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것과 달리.
심지어 나는 인간인 아버지를 먼저 보낼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혼란스러워했는데, 아무런 각오도 되지 않았을 아가가 홀로 버티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아가를 실험 대상이 아닌 사람으로서 보고, 괜히 한 번이라도 더 흘끔거린 것이. 홀로 사랑을 쌓아온 것이.
‘그래서 그런 거였는데.’
아가를 마음에 품게 됐다. 그래서 아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행복한 아가와 영원히 살아가고 싶었다.
소중한 인연을 떠나보낸 고통, 그 고통이 그저 지나간 기억이 될 정도로 애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아가가 죽음의 공포를 겪지 않게, 겪더라도 먼 훗날로 미루고 싶었다.
인연을 떠나보낸 슬픔은 언젠가 자신도 죽을 거라는 공포로 오니까. 갑작스러운 타인의 죽음은 자신도 허무히 죽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니까.
‘그래서, 였는데…’
아가의 고통을 알아서 그런 것이지만, 내 선택이 오히려 아가에게는 쓸데없는 간섭이 되고 말았다.
“각하.”
“으, 응. 말하렴.”
아가의 목소리에 내려가던 시선을 황급히 들었다.
그리고 아가의 얼굴을 보자마자 몸이 굳고 말았다.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할 생각이십니까?”
무표정, 혹은 울고 있는 것 같은 표정. 이상한 말이다. 무표정에서 어떻게 울음을 본단 말인가.
“제가 수백 년을 살면, 대체 얼마나 더 잃어야 하는 겁니까?”
하지만 분명 아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표정이 일그러지지도 않았지만 분명 울고 있었다.
“…각하가 보기에는 그저 스쳐가는 찰나의 인연이겠지만, 저에게는 인생을 함께할 인연이 많습니다.”
그 말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하얘졌다.
“저는 그 인연들을 몇 번이나 잃어야 하는 겁니까?”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아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왜 이렇게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무리 아가의 수명이 늘어나더라도, 결국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나에게 부모님을 제외한 모든 인연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아무리 장수하는 사람이어도 내 수명에 비하면 일부였으니까.
이미 없는 부모님을 제외하면, 그리고 사랑하는 아가를 제외하면 모든 인연이 그저 잊고 넘어갈 인연.
‘아가에게는 아닐 텐데.’
멍청했다. 아가를 나의 시선으로만 생각했다. 아가 입장에서는 평생의 인연인 사람들을 그저 찰나라고 생각했다.
아가의 수명이 늘어나면 평생의 인연이 찰나의 인연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 함께할 것이라 생각한 인연이 자신보다 빠르게, 너무나 빠르게 떠나는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각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뒤늦게 몰려오는 자괴감에 멍하니 아가를 바라보자 아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였다.
“각하께서 그러셨다면 뜻이 있는 거겠지요. 제가 감히 각하를 추궁했습니다.”
정중한, 그리고 그만큼 선을 긋는 것이 명확한 발언.
불과 몇 분 전까지 아가와 웃으며 대화했던 것이 떠올랐다. 소름이 끼치는 간극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 아가. 난, 나는…”
안된다. 이렇게 대화를 끝내면 안된다.
내 무지로, 내 고집으로 아가를 상처 입혔다. 사과해야 한다, 당장 사과해야…
“앞으로 감히 각하께 얼굴을 비추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아가를 향해 뻗었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나를 흘겨본 아가는 미련 없이 탑주실을 나갔다.
당연히 잡아야 한다. 잘못했다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과도한 충격이 연달아 몰려오자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앞으로 감히 각하께 얼굴을 비추지 않겠습니다.”
무례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지만, 실상은 다시는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
무엇보다도 끔찍하고 두려운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아까까지의 행복이 거짓말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행복이 절망으로 변하는 지금, 탁자 위에 놓인 빗이 보였다. 깨끗한 순백, 고급스러운 디자인.
“각하께는 쓸모가 없겠지만, 그래도 제 부족한 성의입니다. 사양은 말아주십시오. 저희 사이에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안돼.’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빗을 끌어안았다. 당장 잡지 않으면 이 선물마저 내 곁을 떠날 것 같았다.
‘안돼…’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아가에게 받은 첫 선물, 공작령을 팔아서도 얻지 못할 보물.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선물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소중해야 할 보물이 나와 아가의 파국을 상징하는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안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끝내면 안된다. 아가가 나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평생 원망하더라도 사과해야 한다. 아가에게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존재로 남더라도, 적어도 염치는 아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달렸다. 공녀의 체면, 공작의 체면을 위해 뛴 적이 없었지만, 지금 그런 체면 따위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타, 탑주님!”
“아니, 대체 무슨─”
내가 달릴수록, 점점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없다. 내 권위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아가.’
달리면서도 아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가가 지닌 마나, 그 마나를 찾으면 바로 텔레포트로 날아가면 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마법은 사용자의 심상에 큰 영향을 받는 기술. 내가 혼란스럽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마법이라고 멀쩡할까.
‘아가…!’
그러니 그저 달렸다.
체면도 권위도 마법도 남지 않은 나는 그거밖에 할 수 없으니까.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마종공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적절한 행동은 아니다. 공적으로는 감찰부장이 공작에게 무례를 범한 것이고, 사적으로도 나를 사랑하는 여인을 무시한 것이니까.
그래도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 자리에 오래 있어봤자 감정에 먹혀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다. 그러면 온갖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겠지. 나도 감당할 수 없는 말을 무지성으로 뱉었을 것이다.
“앞으로 감히 각하께 얼굴을 비추지 않겠습니다.”
실제로 아슬아슬한 발언을 하고 오지 않았나. 조심하기 위해, 발언을 자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에도 이미 내 입은 폭주 상태였다.
앞으로 얼굴을 비추지 않겠다니, 저렇게 말하고 만날 일이 생기면 어색해서 어떻게 하려고.
‘진정하자.’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화가 나지 않았다면 감정이 없는 거겠지. 그만큼 마종공의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완전한 파국을 선언하지 않고 도망쳐 나온 것은 내 머리에 아주 미약하게 남은 이성 덕분이었다.
‘악의는 없었으니.’
그래, 마종공이 나에게 실수를 한 건 사실이다. 심지어 의도치 않은 행동이 아니라 고의이기도 했고.
하지만 분명 악의는 없었다. 나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무언가 수를 쓰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차분히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게 맞다.
“아, 아가. 난, 나는…”
“시발.”
애처롭게 나를 부르던 마종공의 모습이 떠오르자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성? 악의가 없다? 헛소리다. 나 자신한테 하는 핑계다. 그냥 마종공이 떠는 모습을 보니,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환장할 노릇이다. 눈 앞의 상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안타깝다. 동정이 가면서도 이해하기 싫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일단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마종공과 대화를 이어가면 절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진작 말이라도 하지.’
한숨이 나왔다. 만약, 만약 마종공이 포션을 주기 전에 말이라도 했다면 난감했어도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다. 적어도 내 의지를 존중하는 거니까. 선택권을 나에게 주는 거니 화를 낼 이유가 있겠나.
문제는 마종공은 아무 말도 없이 포션을 줬다. 다행히 효과를 발휘하려면 멀었지만, 마종공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인간을 초월했을 거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가의 시간도 나와 같아질 테니. 아가도 40년만 지나면 수백 년을 살아갈 수 있을 거란다.”
그리고 자랑스럽다는 듯,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하던 마종공이 떠올랐다.
복잡하다. 처음부터 나에게 숨기지 말았어야지, 하다못해 숨겼다면 영원히 입을 다물었어야지.
‘종족의 차이인가.’
만약 마종공이 나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 철저히 숨겼을 터.
수명을 늘리는 건 마종공 입장에서는 선의였을 거다. 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기에 그랬을 거다.
…물론 아무리 선의였어도 순순히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고민이 더 필요한 문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주인님?”
“오랜만이야, 집사.”
제도에 위치한 내 저택.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밖에 없다. 지금 상태에서 아카데미로 복귀해봤자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만 끼칠 테고, 감찰부 집무실로 가면 과장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저택이다. 방에 처박혀서 눈이라도 잠깐 붙이면 머리도 식겠지. 마침 저녁이라 아카데미에는 내일 아침에 복귀해도 문제 없다.
“오늘은 기쁜 날이로군요. 연말은 돼야 주인님을 모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주인의 등장에 놀랐던 집사는 금방 표정을 정리하며 반겨줬다.
“바로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 됐어. 간단하게 먹고 왔어.”
사실 공복이지만 지금은 뭘 먹을 기분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던 집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먹이는 건 집사의 도리가 아니니.
그렇게 허리를 숙이는 집사를 뒤로 하고 방으로 가려는 찰나, 혹시 몰라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나 찾는 손님 있으면 거절하고. 어차피 금방 복귀해야 하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의 대답을 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 좀 붙였다가 어떻게 할지 결정하자.
─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이제 자야 돼.”
방으로 가는 길에 만난 유리스가 의외의 복병이었다. 늘 같이 다니던 소피아는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보이지 않더라.
아무튼 창문을 먼지털이로 털어대던 유리스는 나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조잘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로 왔느냐, 오늘 계란에 노른자가 두 개나 나왔는데 주인님이 올 징조였다, 오기 전에 말했으면 케이크라도 준비했다 등등.
어지간하면 대꾸도 해주며 조금 놀아줬을 텐데, 지금은 피곤해서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보통 이러면 유리스도 알아서 물러났다. 유리스가 어리기는 해도 눈치도 빠르고 싹싹한 애인지라.
“그치만 옷도 안 갈아입으셨잖아요.”
그런데 오늘따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뭐지.’
슬쩍 유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리스. 겉으로는 평소하고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행동이 달랐다. 혹시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왜, 부탁할 거라도 있어?”
살며시 유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녀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은 주인일 거다. 아무리 내가 고용인을 괴롭히는 놈은 아니라지만, 신분적 차이는 그 자체로 위압감을 주지 않나.
그럼에도 이리 근처를 맴도는 걸 보면 부탁할 게 있는 거겠지. 어려운 부탁만 아니면 까짓 못 들어줄 것도 없다.
“주인님. 혹시 고민 있으세요?”
“응?”
오히려 역질문을 들은 줄은 몰랐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하는 유리스는 단순히 떠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것 같았다. 애초에 얘가 나를 떠볼 이유가 있겠냐만은.
아무튼 난데없는 질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티 났어?”
“엄청요.”
단호한 대답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어린 애가 보기에도 영 상태가 안 좋았구나 싶어서.
얘가 알 정도면 집사도 진작 눈치챘겠지. 단지 내가 스스로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만, 유리스는 아직 애라 그런지 보이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계속 유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라고 넘어갈지 아니면 간단하게라도 말할지.
‘이미 호기심이 생긴 것 같은데.’
내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머리가 흔들리면서도 유리스는 내 입을 빤히 바라봤다. 어린 아이가 무언가에 꽂히면 오래 가는 법. 여기서 얼버무려도 별 효과가 없겠지.
“나한테 실수를 한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지.”
결국 적당히 말하기로 했다. 상세하게 말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고, 솔직히 나도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기도 했고.
게다가 평범한 하녀에게 말한다면 어디 이상한 곳으로 내용이 샐 것 같지도 않았다.
“큰 실수였나요?”
“꽤 크지.”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렇더라고.”
“너무하네요.”
“그렇지?”
유리스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무하기도 하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 그랬다는 것이 참.
“그런데 고민 중이시라는 건, 주인님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그 말에 쓰다듬던 손이 잠시 멈췄다. 아주 잠시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쓰다듬었지만.
사실 조금 찔리기도 했다. 제정신이 아니니 진정하고 결정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마종공과의 관계를 허무히 날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니.
정말 화가 났다면, 진심으로 마종공을 증오했다면 진정이고 나발이고 그 자리에서 엎어버렸겠지.
“그렇게 생각해?”
“주인님이 그러셨잖아요.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사정이 있었으면,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면 용서 못할 일은 없다고요.”
“…내가?”
“네!”
해맑게 외치는 유리스를 보니 진짜 그런 것 같다.
뭐지. 내가 아직 성인도 못된 애를 앉혀놓고 그런 말을 했다고? 아니,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혼란에 가득 찬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리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주인님이 저하고 소피아를 데려오셨을 때요…”
“아.”
이제야 생각났다.
“다, 당장 내놔… 요! 안 그러면 이, 이걸로 찌를 거예요!”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후 복구 지역을 훑어보다가 유리스를 만났었다.
쫄쫄 굶고 있던 상황에서, 심지어 소피아는 아사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빵을 든 내가 골목길에 출현했다. 그 모습을 본 유리스는 웬 뗀석기 주먹도끼 같은 걸 들고 약탈을 시도했었지.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 아주 잠깐 암살 시도인가 싶었지만, 주먹도끼… 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짱돌을 든 여자애. 아무리 봐도 암살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뒤는 뭐, 불쌍한 아이 살리는 셈치고 약탈을 당해줬다. 그 와중에 소피아를 먼저 먹이는 걸 보고 마음으로 울었지. 저런 착한 아이가 약탈을 시도할 정도로 전쟁의 피해가 심하구나, 하고.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미쳤나 봐요! 소피아는 아무 죄도 없어요!”
그리고 배를 채우고 나니 정신이 든 유리스는 울며 불며 난리가 났었다.
“반성하고 있으니 됐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그때 유리스를 달래면서 그렇게 말했다. 사과했으니 별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저한테는 인생이 바뀐 말이었는 걸요.”
히히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조금은 머쓱해졌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다. 그때 유리스와 소피아의 상태는 정말 애잔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조언 고맙다.”
잠시 생각하다가 유리스의 머리를 토닥여줬다.
그래, 용서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 염두에 두기는 하자.
물론 당장 용서하기는 무리지만. 지금은 화를 억누르는 게 겨우다.
***
주인님께서 식사는 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혹시 밤에 간단한 요기거리를 찾으실 수 있으니 미리 주방에 일러두었다. 가볍게 먹을 것 정도는 바로 만들 수 있게 하라고.
그 외에도 주인님의 방에서 보이는 정원을 다시 점검했고, 다른 편의시설에 이상은 없는지 살폈다. 주인님이 내일 아카데미로 복귀하시는 건 고려 사항이 아니다. 그저 주인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고용인의 의무.
그렇게 저택을 점검하는 사이,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서 믿기 힘든 보고가 올라왔다.
“누가 왔다고?”
“마종공께서 오셨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다. 애초에 이 저택은 주인님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아서 손님이 드문 곳이다. 비록 오늘은 주인님이 머물고 계시지만, 설마 하루 머무는 걸 눈치채고 올 손님이 어디 있겠나.
심지어 그 손님이 마종공. 근래들어 제도를 뜨겁게 달군 주인공. 주인님을 마음에 품은 여인.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거절하셨으니, 정중히 돌려보내게.”
본능적으로 어떻게 대접할지 고민했지만 이미 주인님은 손님 사절을 명하셨다. 그렇다면 돌려보내는 수밖에.
“저기, 집사님.”
하지만 내 말에도 경비병은 머뭇거렸다.
“죄송하지만… 집사님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절로 불안감이 생겼다.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경비병이 왜 그리 당황스러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제정신으로 보고를 하러 온 것도 대단했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하얀 여인. 점점 선명해질수록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여인.
“지, 집사님!”
내가 다가오는 것을 봤는지 정문에 남아있던 경비병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경비병의 시선을 따라 나를 쳐다보는 여인, 마종공.
그리고 마종공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절로 눈을 감을 뻔했다.
‘이게 무슨.’
마종공의 상태는 처참했다. 붉게 물든 눈가,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찬바람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게다가 바닥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온갖 흙과 먼지가 묻어 더러워졌고, 옷은 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상태가 좋지 못했다.
‘…맨발.’
그 와중에 맨발이다. 신발은 넘어지면서 잃어버린 건가?
처참하다. 마종공이 왔다는 보고를 듣지 않았다면 절대 마종공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집, 사…?”
“예.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윌레스라고 합니다.”
심하게 떨리는 마종공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자 마종공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물건이 보였다.
온몸이 더럽혀졌어도 홀로 깨끗한, 마치 이것만큼은 더럽힐 수 없다는 듯 끌어안은 빗을.
“집사…”
“예, 각하.”
“아가는, 아가는 여기 있니…?”
그 처량한 모습에 차마 손님 사절을 외칠 수 없었다.
주인님,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오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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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가는 대로 정신없이 달렸다. 체면도 권위도 전부 던져버리고 달렸다.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영영 아가를 잡지 못할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가를 놓칠 것 같아서.
아가가 없다면 지금 가진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아가가 없는 세상에서 공작이니 탑주니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아가, 가장 중요한 아가가 없는데.
‘어디 있는 거니, 아가…’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아가는 보이지 않고, 숨이 가빠지며 달리는 것도 힘들어질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구나. 아가는 나를 이렇게 무능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구나.
다시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눈 앞이 뿌예졌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아가를 무시했다. 아가의 고통을 외면하고, 아가의 의견을 듣지 않고, 당연히 좋아할 거라 생각하며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아가, 아가…”
자괴감에 몸이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아니, 홀로 자책할 시간도 사치다.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 용서를 받지 못하더라도 사과는 해야 한다. 나와 아가의 마지막 기억을 내 추악함으로 장식할 수는 없으니.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지고,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났다. 혹시 아가를 본 사람이 없나 싶어 행인들을 붙잡아가며 아가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경악에 찬 시선을 받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남성이라면 아까 저 방향으로 갔습니다. 감찰부장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성과는 있었다. 어느 상점주의 답변 덕분에 아가가 향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달린 끝에 도착한 저택. 아가 소유의 저택.
‘있었어.’
진심으로 안도했다. 혹시 아가가 제도를 벗어났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 아가는 제도에 있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늦지 않았다는 희망. 그 희망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릎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다리를 절뚝이며 정문에 다가가자, 정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막아섰다.
“머, 멈춰주십시오. 이 앞은 제국 감찰부장이신 칼 크라시우스님의─”
“마종공이, 세르베트 공작이 왔다고 전해주렴.”
그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경비병 중 하나가 저택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성과 함께 나왔다.
혹시 아가인가 하는 기대도 했지만, 당연히 아니었다. 아가는 나를 보기 싫어할 테니까.
아가를 대신하여 나온 남성,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그리고 그 집사에게 물었다. 아가가 여기 있느냐고, 아가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맞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집사의 말에 바로 주저 앉고 말았다.
“그래도 주인님께서도 마종공께서 오신 것을 알면 환영하실 겁니다.”
“아니, 괜찮단다…”
내 모습에 당황한 집사가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잡고 말았다.
이미 손님을 거절한 아가다. 그럼에도 집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전하면, 아가는 내가 이번에도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거다.
안된다. 이 이상 아가의 미움을 살 수는 없어.
“아가는, 언제까지 있는 거니?”
“아마, 내일 아침이면 아카데미로 복귀하실 겁니다.”
“그렇구나…”
내일 아침에 복귀. 그렇다면 그때는 아가도 저택에서 나온다는 것.
그렇다면 기다리자. 아침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돼.
아가를 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
눈을 붙이자마자 도로 뜨고 말았다. 제발 잠 좀 자게 해줘.
하지만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가 적힌 것 같은 집사의 난입, 마종공이 방문했다는 급보는 잠을 포기하기에 충분했다.
‘분명 거절한다고 했는데.’
유리스의 조언 덕분에 아주 조금은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맞은 곳을 또 맞은 것 같은 불쾌감은 덤이었다.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무례도 감수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거다. 그런데 감정이 가라앉지도 않은 상황에서 만나봤자 뭐 좋은 결과가 나오겠나.
그래서 미리 손님을 거절하겠다고 한 것인데, 이리 마종공을 보게 생겼다.
“집사. 손님은 거절하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꼭 보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무시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직접 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당황한 모습은 보기 드무니까. 집사가 저러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정문을 향해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마종공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 게 적당할까 하고.
얼굴을 비추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리 보게 되어 죄송하다고 할까? 아니야, 이건 너무 비꼬는 거잖아.
무슨 염치로 찾아왔냐고 따질까? 아니, 이것도 별로다. 아직 용서를 할 생각은 없지만, 더 싸울 생각도 없다.
간단하게 손님을 맞을 여유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할까? 차라리 그게 가장 양호한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다.
“아, 아가…”
아까까지 했던 시뮬레이션이 전부 날아갔다. 모든 계획이 쓰레기로 변했다.
마종공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찬란한 백발은 산발이 된 채 더러워졌고, 옷도 여기저기 찢어지는 등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처량하게 맨발이 되어 주저앉은 모습. 경비병들은 차마 고귀하고 고귀한 공작을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한 채 근처만 배회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당황스러웠다. 마종공이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정이 있기에 복잡한 감정이었다.
마종공이 후회하고 사과하는 것을 바라기는 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진정되고 나면 마종공의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난 반성을 보고 싶은 거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각하.”
그리고 내 말에 겁먹은 듯 움츠러드는 사람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한숨이 나왔다. 지금은 한숨조차 마종공을 위협할 수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망할.’
이제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날씨다. 해도 저문 시간대다. 그런 때에 맨발로 다녔으니 발이 멀쩡하겠나. 더러운 건 둘째치고, 여기저기 긁히고 까지며 난리가 났다.
게다가 옷, 정확히는 무릎 부근에 붉은 자국이 보이는 것이 어디 다친 것 같기도 하다. 누가 봐도 피잖아 저거.
“아, 아가. 아가가, 아가가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해서, 아가가 나올 때까지, 내일까지 기다리려고…”
내가 한숨을 내쉬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마종공은 허둥거리며 말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집사의 멱살을 잡으며 나를 불렀다면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거다. 아침까지 기다리려 했다고? 이 날씨에? 이 맨바닥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마종공을 훑어봤다. 저 꼴로 밤을 지새다니, 도대체 정신이─
‘시발.’
시선을 내리다가 마종공이 끌어안은 물건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물건을 보자마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바람이 찹니다.”
엉망인 마종공과 대비되는 하얀색 빗.
내가 마종공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아무것도 아닌 물건.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그 아무것도 아닌 물건을 마종공은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매정하게 대하겠나. 아니, 애초에 빗이 없었더라도 마종공은 저택에 들여야 하는 몰골이지만.
“그, 그래. 알겠단다.”
내가 말하고도 퉁명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마종공은 고작 그런 말에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없는지 일어나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고, 공작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 눈물 겨운 모습에 경비병들이 먼저 기함을 하고 달려들었지만, 손을 내저으며 끙끙거리는 마종공 때문에 부축하지도 못했다.
미치겠다. 그 마종공이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냐. 마탑을 나오고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그 사이에 왜 저렇게.
“각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파들거리는 손으로 땅을 짚는 마종공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혼자 몸을 가눌 수 없는 것 같으니.
“괘, 괜찮… 단다. 신경 쓰지, 않아도─”
“실례하겠습니다.”
지나가던 탈옥범이 봐도 눈물을 흘리며 도울 것 같은 꼴을 하고 신경 쓰지 말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뭐라뭐라 말하는 마종공을 무시하며 조심스레 안아올렸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눈이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봤다.
“…손님은 주인 말에나 따르십시오.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고.”
손님으로 인정하고 받아주겠다는 말.
그 말에 마종공은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소리를 참았다.
환장하겠다, 진짜.
마종공은 접견실이 아니라 내 방으로 데려갔다. 마침 잘 준비를 하던 곳이라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차갑게 식은 마종공을 데우기에는 딱이다.
이렇게 말하니 시체를 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지만.
“주인님. 가지고 왔습니다.”
“수고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직접 대야와 물에 젖은 수건을 가지고 왔다.
“곧 유리스와 소피아도─”
“됐어. 내가 할게.”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하시면 불러주십시오.”
집사가 물러나고 나와 마종공만 남은 방. 슬쩍 마종공에게 시선을 돌리니 침대에 걸터앉은 채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 밝은 곳에서 보니 더욱 처참하다. 고귀한 공작이 패잔병보다 못한 꼴을 하고 있다니.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넌지시 말을 건네자 이리저리 향하던 마종공의 시선이 순식간에 나에게 꽂혔다.
“아, 음, 그래, 괜찮단다.”
“안 괜찮은 거 아니까 잠시 눈 좀 감으십쇼.”
물론 괜찮다는 답을 원하고 물은 게 아니라 가볍게 무시했다.
내 말에 얼떨떨하면서도 조용히 눈을 감은 마종공. 그런 마종공의 얼굴을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줬다. 비록 운 흔적은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먼지 정도는 닦을 수 있으니.
얼굴을 닦은 후에는 머리카락, 팔, 손, 무릎, 다리. 아무튼 조금이라도 더러운 부분은 전부 닦아냈다.
“아, 아가. 내가 할 수…”
“조용히.”
다시 쓸데없는 말을 하려던 마종공의 말을 잘라냈다. 이미 오늘은 마종공에게 무례를 범한 상황이니 이 정도 무례가 추가되는 건 괜찮을 거다.
‘피.’
그리고 여러 의미로 붉게 변한 무릎을 보니 기분이 더욱 언짢았다.
옷 너머로도 어렴풋이 상처가 보였는데, 직접 확인하니 더욱 가관이었다. 무릎에 난 상처,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피.
살짝 건드릴 때마다 흠칫 떠는 것이 제대로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인 모양이다.
“…왜 오셨습니까.”
이곳까지 뛰어왔을 마종공, 몇 번이나 넘어졌을 마종공을 생각하니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각하께 얼굴을 비추지 않겠다고. 이 무례한 놈은 그냥 무시하시지 그랬습니까.”
일개 귀족, 심지어 작위도 없는 후계자 나부랭이가 공작에게 손절을 선언한 거다. 마종공이 그 자리에서 자존심이 상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발언.
그럼에도 마종공은 달려왔다. 나를 보기 위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리고 처량한 마종공을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고.
“어떻게, 그러니…”
머리 위에서 마종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기가 섞이고 갈라진 목소리가.
“아가한테, 아가한테 그런 상처를 주고, 어떻게 모른 척을 하니…”
이제는 훌쩍이는 소리마저 들렸다. 밖에서는 눈물은 보여도 울음소리만은 참았는데, 지금은 둘밖에 없어서 그런지 최소한의 자제도 없었다.
“…미안하단다.”
그 말에 마종공의 발을 닦던 손이 잠시 멈췄다.
“아가를 위한 일이라고, 아가라면 좋아할 거라고, 나 혼자 그렇, 게… 단정 짓고…”
마종공의 말이 이어질수록 머리로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굳이 무언가라고 할 것도 없지. 아무리 생각해도 눈물밖에 없으니까.
“말했, 어야, 나 혼자 생각하지, 말고… 아가한테도, 말… 했어야, 했는데…”
마종공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머리에 떨어지는 눈물도 더욱 늘어났다.
“미안, 미안하단다. 정말로, 정말로…!”
그 처절한 사과에도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발의 상처가 유독 심했으니까. 조심스레 닦지 않으면 더욱 아플 것 같았으니까.
‘망할.’
환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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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서 계속 마종공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들지 못했다, 가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과를 했어도 얼굴을 보기 싫어서? 그건 아니다. 솔직히 마종공의 처량한 모습을 본 순간부터 마음이 흔들렸다. 체면도 전부 내려놓고 사과를 했을 때는 희미한 원망마저 사라졌다.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어떤 변명도, 자기합리화도 없이 솔직하게 사과하는데.
‘이건 반칙이지.’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필 저 사과를 시작할 때 발을 닦고 있었다. 정말 처참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발을 만지고 있었다.
아무리 제도의 도로가 깨끗하다고 하지만, 맨발로 돌아다니고도 무사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마종공은 마법을 빼면 어떤 단련도 하지 않은 연약한 여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 마종공을 보면 다른 이유로 화를 낼 것 같아서. 도대체 왜 이러고 다녔냐고,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고 목소리를 높일 것 같았다.
그러면 마종공은 또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겠지. 뻔하다.
“각하.”
짧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어린 아이처럼 울고 있는 마종공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다.
“…빗 좀 주십시오.”
하지만 금방 가라앉혔다. 사과를 한 사람한테 다른 이유로 화를 내는 건 너무하니까.
그리고 내 말에 마종공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 아가. 이건, 이건…”
소중하게 품고 있던 빗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발 이건 뺏지 말아달라는 듯이, 이것만큼은 용서해달라는 듯이.
“돌려달라는 거 아닙니다. 머리도 빗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량한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리 화가 난 상태라도 선물을 줬다가 뺏는 짓은 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은 화도 다 풀리지 않았나.
그냥 머리라도 빗겨주려고 하는 거다. 먼지는 아까 닦았지만, 비단결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머리카락은 여전히 산발이었으니.
다행히 그 말에 진정이 됐는지 마종공은 조심스레 빗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눈치를 보던지.
“조금 오래 걸릴 겁니다.”
일단 마종공의 뒤에 앉아 머리카락을 한데 모았다.
얼추 봤을 때도 길었지만 이렇게 모아서 보니 엄청나네.
“괜찮단다. 펴, 편하게 하렴.”
머리카락을 잡자 계속 내려가 있던 마종공의 귀가 미세하게 올라왔다.
…이건 못 본 걸로 하자.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제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도, 미안하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빗이 머리카락에 닿는 소리,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불에 쓸리는 소리 정도만이 겨우 들릴 정도였다.
‘부드럽네.’
너무 고요해서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정말 부드럽기는 했다.
워낙 부드러워서 조금만 빗어도 금방 정리가 될 정도로. 덕분에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이게 마종공이 애지중지 관리를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엘프의 특성인지 모르겠다.
“흐읏…!”
머리를 빗던 손이 귀를 스치자 미약한 신음 소리가 났다. 이윽고 활발하게 파닥거리는 귀.
“저 아직 화났습니다.”
그 말에 도로 내려가 버렸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화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자기 입으로 ‘나 화났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치고 정말 화가 난 사람은 드물지.
그냥, 그냥 약간의 심술이다. 화는 풀려도 아직 속은 복잡했다. 순순히 마음을 풀고 용서하는 게 맞는지 헷갈렸다. 그런 와중에 마종공의 감정 표출기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심술을 부린 거다.
애새끼 같은 짓이지. 두 번이나 할 짓은 아니다.
“왜 그렇게 말하셨습니까.”
계속 손을 움직이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핑계 정도는 댈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용은 덤덤하지 못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담긴 말, 마종공의 입으로 꼭 듣고 싶은 말을 요구했으니까.
“저를 위해서라고, 진정하고 나면 좋아할 거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장생. 어떻게 보면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부와 명예를 가진 상태의 장생이면 누구나 원할 일이 아닌가.
마종공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흥분해서 그렇다고, 머리를 식히고 나면 좋아할 거라고.
“아니면 너무 슬퍼서, 저를 잃고 싶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마종공의 인정에 호소할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해서 너를 잃고 싶지 않았다고. 너 없이 살아갈 수백 년이 너무나 싫었다고.
그렇게 말했다면 당황했을 수도 있다. 내가 인연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기 싫은 것처럼, 마종공도 나를 보내고 홀로 남기 싫을 테니까.
“…왜,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럼에도 마종공은 무엇도 택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할 뿐.
“솔직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마종공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미 아가를 속였으니까. 아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단다.”
그렇게 말한 마종공의 목소리는 자괴감과 허탈함이 뒤섞여있었다.
뒤에 있기에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 표정도 썩 좋지는 않겠지.
“아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자리에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니…”
점점 숙여지는 마종공의 고개. 조금씩 떨리는 어깨.
“아가를 상처 입혀놓고, 나도 아프다고 할 수는 없잖니.”
이미 나를 속인 자신에게는 인정에 호소할 자격도 없다는 말.
그렇기에 마종공은 수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포션을 쓰지 않았다면 나를 먼저 보내야 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단다. 미안해…”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마종공. 하지만 이번에는 오열과 애원이 섞인 사과가 아니었다. 무언가 내려놓은 것 같은, 초탈한 것 같은 사과.
“너무 이기적이었어. 아가를 사랑한다면서, 정작 아가를 배려하지 못했지.”
그렇게 말한 마종공은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겨우 멈춰놓고 다시 흐르기 시작한 눈물, 미세하게 머금은 미소.
“욕심이었단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면서,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
마종공은 분명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울고 있다.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웃고 있다.
분명 내 눈 앞에 보이는 표정인데, 확실하게 보이는 표정인데 너무나 헷갈리는 표정이다.
“나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건 나의 잘못이란다. 아가는 당연한 선택을 한 거야.”
내가 혼란 속에 입을 열지 못하자 마종공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많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가를 멀리서 보는 것만은, 마음에 품는 것만큼은 허락해주지 않겠니?”
그리고 마종공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나는 아가를 볼 수 있는 수십 년만 있으면, 그 후의 수백 년은 없어도 괜찮단다.’ 라고.
‘망할.’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말을 듣고도 마음을 안 풀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마종공이 저렇게 진심을 다한 모습을 보였으면 나도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 아가?”
갑자기 내가 일어나자 마종공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고 근처에 있던 서랍을 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여기 있을 터.
‘있다.’
다행히 기억대로 있었다. 집사나 하인들이 청소한다면서 치우지는 않은 모양이다.
서랍에 옹기종기 모인 세 병 가량의 포션. 여름 방학 기간 동안 마시려고 따로 빼둔 건데, 도로 가져가는 걸 깜빡하고 계속 서랍에 처박아뒀다.
건망증의 부산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각하.”
“왜, 왜 그러니?”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심지어 포션을 들고 말을 걸자 마종공은 긴장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런 마종공을 바라보다가 포션을 들이마셨다.
“…이거, 효과를 보려면 40년은 있어야 한다고 하셨죠.”
살짝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 선택이 맞는 건가 싶지만, 그래도 이 이상 고민해봤자 더 좋은 선택지가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군요. 그때까지 같이 고민합시다.”
내 수명을 마종공에게 맞출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지.
“그러니 멀리서 지켜본다는 헛소리는 마십시오.”
어디서 아련한 대사만 골라서 공부했나, 환장하겠네 진짜.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말에 마종공은 멍하니 나를 보더니 다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종공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어차피 이렇게 넘어갈 거, 괜히 성질을 내서 마종공만 울게 만들었으니.
“저도 죄송합니다, 각하. 마탑에서는 잠시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었습니다.”
그 말에 마종공은 더욱 서글프게 울었다.
내 업보다, 내 업보야.
한참이나 오열하던 마종공은 울음을 그치고 나서도 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 역시 ‘이제 진정하셨으니 떨어지세요.’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미친 놈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문제는 지금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다. 서로 마음도 풀고, 사과도 하고, 관계도 회복했으니 해피 엔딩이기는 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 자체는 너무 머쓱하다. 어떻게 해야 덜 어색하게 떨어지고,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대화할 수 있을까.
‘아.’
슬쩍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깜깜한 하늘. 덕분에 적당한 주제가 생각났다.
“각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품 속에 있는 마종공이 옷자락을 꽉 잡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것 같다. 늦었으니 마탑으로 돌아가라,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봤다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제도를 돌아다닌 마종공이다. 그래놓고 한밤 중에 홀로 마탑으로 돌아가면 대체 무슨 눈길을 받겠나. 내일 아침에 퍼질 소문은 더욱 끔찍해질 거다.
“돌아가기에는 어두우니, 괜찮으시다면 주무시고 가시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말이었는지 마종공의 고개가 마구 끄덕여졌다.
“아가도, 여기서 자는 거니?”
그리고 마종공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각방이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 저는 소파에서 잘 테니, 각하께서 침대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하지만 눈물 젖은 눈을 보니 저절로 양보하고 말았다.
그래, 같은 방까지는 괜찮겠지. 같은 침대는 아니니까.
“…….”
“각하?”
이상하다. 갑자기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말이 없다. 그러면서 옷자락을 잡은 손에는 힘이 가득하다.
솔직히 마법도 못 쓰는 마종공 정도야 100명이 몰려와도 힘으로 털 수 있기는 한데.
“…주무십니까?”
그 말에 마종공의 귀가 흠칫 떨리면서도 본체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자는 척을 하는 것처럼.
‘뭔.’
오늘 좀 많이 놀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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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자 눈이 떠졌다. 지난 밤에 떠돌았을 소문을 생각하니 도로 감고 싶었지만, 그래도 애써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소파에서 자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확실히 아카데미 파견 이후로 잠은 편하게 잘 수 있었는데.
“일어났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침대에 걸터앉은 마종공이 보였다. 혹시 ‘공작은 이런 허접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단다.’ 같은 타입이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아무 소란 없이 자더라.
그리고 마종공이 망토처럼 덮고 있는 셔츠도 보였다.
‘도마뱀도 아니고.’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는 척을 하며 딱 달라붙은 마종공. 아무리 흔들어도 버티길래 셔츠를 허물벗듯이 내던지고 도망쳤다. 비겁하게 나왔으니 비겁하게 응대해야지.
셔츠를 벗는 순간에도 마종공은 깨어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인지 도망친 나를 잡지는 않았다. 자는 척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면 더 민망할 테니.
대신 소파로 향하는 동안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꽂혔지만.
“예, 각하. 좋은 아침입니다.”
“후후, 그래. 오늘처럼 개운한 아침은 오랜만이구나.”
작게 미소를 지은 마종공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어제 펑펑 울던 마종공은 사라지고, 내가 알던 마종공이 돌아왔기에.
“아가?”
“예, 말씀하십시오.”
외투를 걸치는 사이,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던 마종공이 슬쩍 입을 열었다.
“아직 마법을 쓰기 힘들어서 그러는데, 머리를 빗겨줄 수 있겠니?”
그 말에 무심코 마종공을 훑어봤다.
자고 일어났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깔끔함. 오히려 내가 닦아줬을 때보다 깨끗해진 것 같은 몸.
마지막으로 단정함 사이에 유독 눈에 띠는 부자연스러운 산발. 마치 고의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안되… 겠니?”
뻔한 거짓말.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그렇고, 진실을 말해주는 귀도 파르르 떨리는 것이 확실히 거짓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어제 마종공이 했을 고생을 생각하면 머리 빗어주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이런 작은 부탁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종공은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빗을 건네줬다.
“각하, 일단 셔츠는 치워주셔야─”
“이대로 해주렴.”
“예, 알겠습니다.”
…그래, 셔츠 하나 뺏긴 것 정도도 아무것도 아니지.
예전에 마르게타에게는 외투도 뺏겼으니까.
오랜만에 저택에 온, 심지어 하룻밤을 보낸 손님이기에 아침 식사를 권했지만, 마종공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마탑 업무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확실히 지금 마탑은 혼돈 그 자체일 거다. 갑자기 최고 책임자가 탈주했지, 제도를 돌아다니며 온갖 소문을 만들어냈지, 심지어 날이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탑주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같이 가시죠.”
“으, 응?”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자 마종공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던 모양.
그래도 이게 맞다. 밤에 홀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지만, 울면서 배회하던 마종공이 다음날 털레털레 혼자 다니는 것도 이상한 소문이 생기기에 충분하다.
물론 나와 같이 가는 것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지만, 안 좋은 소식보다는 좋은 소식을 퍼뜨려야 하지 않겠나.
“그래, 고맙구나.”
잠깐 망설이던 마종공은 내 손을 잡았다. 아까 방에서 봤던 것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어제는 이 정문에서, 방에서 오열하는 마종공을 봤다. 그리고 오늘은 방에서도, 정문에서도 활짝 웃는 마종공을 보고 있다.
‘한 치 앞도 모르네.’
역시 사람 앞날은 알 수 없다. 불과 하루 사이에 이렇게 변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이니 괜찮다. 어제까지 웃다가 오늘 우는 것보다는 낫지.
“그럼 모시겠습니다.”
내 말에 마종공은 변함없는 미소로 대답했다.
***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늘처럼 요동 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유는 별거 아니다. 아가와 맞잡은 손이 너무나 따뜻했기에. 아가와 함께 걷는 길이 너무 행복했기에.
고작 이런 걸로 기뻐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기쁜 걸 어쩌겠나.
“당분간 소란스럽겠군요.”
기쁨에 머리가 멍해지는 사이, 아가가 작게 속삭이자 무심코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꽂히는 시선, 수군거리는 목소리, 우리를 보고 어디로 달려가는 사람들까지.
“그렇겠구나.”
그 모습에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당분간 제도를 넘어 제국 사교계 전체가 소란스러울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추한 꼴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가를 영원히 잃기 직전이었는데 어떻게 덤덤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제 소문보다는 오늘 소문이 더 빨리 퍼질 겁니다.”
웃음기 섞인 아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더욱 요동쳤다.
‘배려해줬구나.’
이번에는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가가 나와 함께 마탑으로 가는 이유, 남들 보라는 듯이 당당하게 가는 이유를 알았다.
어제 내가 보인 추태를 지우기 위해서. 남들 입에 오고 내릴 내 부끄러운 모습을 지우기 위해서.
물론 이미 퍼진 소문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오늘의 일이 퍼지기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어제의 일은 가라앉게 될 터.
심지어 추태를 가릴 새로운 소문은 나와 아가가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 오히려 내가 앞서서 퍼뜨리고 싶은 소문이다.
“…고맙구나.”
“뭘요. 고작 같이 가는 건데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아가의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행복하다. 아가와 함께 하고, 아가의 배려를 받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
“그런데 각하.”
“왜 그러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여는 아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까지 아가라고 부르실 겁니까?”
“…응?”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나와버렸다.
“각하께서 과분하게도 저를 마음에 품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관계가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는 결혼할 텐데, 그때에도 아가라고 불리기에는…”
그 말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아가가 나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기쁨.
동시에 아가를 아가가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황.
‘맞는 말이야.’
하지만 아가의 말이 맞다. 소중한 반려를 영원히 아가라고 부르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아가는 아가라는 호칭에 맞게 매우 소중한 아이고, 평생 껴안고 싶은 아이기는 하다. 그래도 영 적절하지 않은 호칭이다.
“진짜 아가가 태어나면 어쩌시려고요.”
‘흐읏…!’
그것이 결정타였다. 아가와 나 사이에서 태어날 진짜 아가.
순간 큰 아가, 작은 아가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러면 나와 아가 사이의 결실을 하나만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나, 낭군님… 은 어떠니?”
고민 끝에 조심스레 말했다. 낭군님, 멋진 호칭이다. 어머니도 옛날에는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셨다고 했으니까.
낭군님이라는 말을 들은 아가는 슬쩍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조금 상처받았다.
“시간은 많으니 느긋하게 생각하도록 하죠.”
“…그래.”
심지어 낭군님이라는 말 자체를 못 들은 척 넘어가려고 했다.
많이 상처받았다.
“그러면 아가는 어떻게 할 거니?”
괜히 심술이 나 아가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러는 너는 왜 나를 각하라고 부르냐고.
“저도 느긋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 투정이다. 나도 호칭을 정하지 못했는데, 아가를 독촉할 수는 없으니까.
아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마탑에 가까워졌다.
영지에 있는 성보다 오래 지내는 안식처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 들어가기 싫을까.
“저는 이제 돌아가보겠습니다. 마탑에 들어가면 원망을 받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슬쩍 손을 놓으며 말하는 아가. 아쉽지만 공감이 되는 말이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이미 다 왔으니까. 이 정도 에스코트를 받은 걸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렇게 애써 아쉬움을 억누르는 찰나, 아가가 서로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한마디.
“다음에 또 봐, 베아트릭스.”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멈췄다.
***
마종공과 헤어지기 직전, 문득 현명공이 해줬던 조언이 떠올랐다.
– 조카. 마종공한테 끌려가는 거 같으면 먼저 찔러봐. 그럼 좋아서 자지러질 거야.
내 미래를 위해서라면 마종공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라는 조언. 애초에 그 조언을 실행하기 위해 마탑에 갔다가 사건이 터진 거였지.
아무튼 포션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현명공의 조언은 정말 유용했다. 내가 찌르니 그저 당황하며 끌려오는 마종공. 공작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물론 어제 울고 불며 사과한 마종공에게 주도권 운운하는 건 너무한 일이다. 앞으로는 주도권 쟁취가 아니라 마종공이 좋아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해야지.
마종공이 체면도 내려놓고 사과를 했다면, 나 역시 부끄러움을 미뤄두고 표현을 해야 마땅하다.
“다음에 또 봐, 베아트릭스.”
그래서 했다. 마침 호칭 얘기도 나와서 그냥 저질렀다.
그래도 마종공이라면 좋아할 거라는 판단으로 한 거다. 아까까지만 해도 언제까지 각하라 부를 거냐고 했으니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작에게 말을 놓고 이름으로 부르면 그냥 미친 새끼지. 난 아직 미치지 않았다.
“베아트릭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회심의 일격을 맞은 마종공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능글맞게 반격하거나, 하다못해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아무런 움직임이나 말도 없이 서있었다.
“각하?”
“아, 그, 으, 그으…”
불안한 마음에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그제서야 반응을 했다.
대신 얼굴은 붉게 물들어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로.
‘…괜히 했나?’
순간 선 채로 죽은 단계에 도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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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북동쪽에 튀어나온 반도, 만년설이 내려앉고 바다도 얼어버리는 혹한의 지대. 단순 위치로만 보면 제국이 북방이라 일컫는 초원 지대보다도 더욱 북쪽에 위치한 지역.
그곳에 자리 잡은 루센 왕국은 누구에게도 침공받지 않는 국가이며, 동시에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 기괴한 곳이다. 애초에 왜 그런 곳에 나라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그 혹한의 땅을 가지고 싶어하는 국가는 없기에 다들 그러려니 한다.
아무튼 추위가 가장 강력한 적인 루센 왕국은 뜨거움을 갈망했다. 그 여파인지 루센 왕국의 술은 도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크으으으─!”
지금 마시고 있는 보드카. 이 보드카 역시 루센 왕국의 대표적인 술이자 수출품이다. 향을 맡기만 해도 취할 것 같으며, 식도로 넘기면 내 장기 위치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은 술.
“전하. 그리 마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옆에 있던 비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취하고 싶다. 잠깐 정신을 놓고 에넨의 곁으로 가고 싶다.
그렇게 빈 잔에 다시 보드카를 따르기 위해 병을 잡았다.
“전하.”
그러나 그 사소한 욕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눈을 가늘게 뜬 비가 내 손을 붙잡았으니까.
“미안하오, 비.”
가늘게 뜬 눈, 하지만 그 안에 가득 담긴 염려와 걱정. 그 모습을 보니 차마 더 마시겠다고 난동을 부리지 못했다.
애초에 술에 관대한 비다. 그런 비가 집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내 음주가 위험 수치에 도달했다는 거겠지.
하긴. 갑자기 입에 대지도 않던 보드카를 찾은 것이다. 시종들을 통해 비의 귀에 들어갈 일이기는 하다.
“머리가 복잡하신가 봅니다.”
내 사과에 비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병을 치웠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비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술 기운? 아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감찰부장은 정말 신기한 사람입니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서,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에 서는군요.”
그런 내 심기를 읽었는지 비는 재밌다는 듯 쿡쿡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그런 비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해한다. 나도 일어나자마자 들려온 소식에 웃을 뻔했으니까. 나와 연관이 없는 소식이었으면 정말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오.”
하지만 연관이 있다. 도저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제도 한복판에서 사건이 터졌다. 예전처럼 황태자비를 위한 연회 장소가 아닌,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제도 한복판. 게다가 주인공은 이미 소문의 중심인 감찰부장과 마종공.
‘미치겠군.’
심지어 보통 사건도 아니다. 마종공이 울면서 감찰부장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일반 평민 남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어도 소문이 돌만한데, 공작과 감찰부장 사이의 일이다. 단순 남녀 사이의 치정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공작이 감찰부장에게 일방적으로 구애한다. 감찰부장은 그런 공작을 밀어낸다. 그리고 공작은 감찰부장에게 울면서 매달린다.
끔찍한 일이다. 감찰부장이 공작 하나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파장이 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나마 조용하지만.’
다행히, 솔직히 다행이라는 말도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나마 다행히 마종공의 오열 소문은 잠잠한 편이다.
이유는 별거 없다. 그것보다 더한 소문이 덮어버렸으니까.
“감찰부장이 마종공과 함께 걷는 걸 본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손까지 잡았다고 하더군요.”
아침에 집사장이 가져다준 최신 소식. 마종공의 오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 앞이 깜깜해졌지만,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적으로 목격자가 적은 밤에 일어난 사건과 목격자가 넘치는 아침의 사건. 둘 중 후자가 더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풋풋한 연애 관련이면 더더욱.
‘노렸군.’
슬쩍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감찰부장은 야수의 두뇌를 가진 자가 아니다. 마종공이 울며 자신을 찾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생길 여파 정도는 당연히 알 터.
그렇기에 고의적으로 과시한 거다. 어차피 퍼질 소문이라면 그나마 긍정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공작이 감찰부장에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애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러면 마종공이 감찰부장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까지 퍼지겠지만, 어쩌겠나. 그 정도 충격은 줘야 널리널리 퍼지겠지.
“마종공도 감찰부장도 제국의 기둥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기둥이 서로 얽혀 더욱 굳건해진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오.”
“후후, 그도 그렇군요.”
애써 긍정적인 발언으로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래, 이건 좋은 일이다. 기쁜 일이다.
– 황실은 이번 일에 대하여 함구한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부황께서 황실의 침묵을 결정하셨으니.
부황께서도 나와 비슷한 때에 소식을 접하셨는지, 집사장에게 따끈따끈한 정보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 이미 일어난 일에 황실이 개입하면 더욱 소란만 일어날 것이다.
제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을 통제하려고 해봤자 답이 없다. 그럴 바에는 더욱 큰 소식이 다른 소식을 잡아먹는 걸 구경하는 것이 최선.
– 크라시우스 가문과 카토반 가문이 연결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니 태자도 이번 일에 관여치 말도록.
“예, 부황 폐하.”
요약하면 ‘어차피 결과는 좋으니 과정은 없는 걸로 치자.’ 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행보 같지만, 관여하면 뭐 어쩔 건가. 황실이라고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부황께서도 이 기상천외한 사건에 정신이 아찔해지신 것 같았다.
– 감찰부장을 본 지도 오래됐군. 아카데미에 파견을 나간 상태로도 수많은 역적들을 토벌한 충신이거늘.
“실로 그러하옵니다.”
– 해가 지나기 전에 감찰부장과 식사 자리를 갖고자 하니, 태자는 속히 준비하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대외 활동이 뜸하던 부황께서 친히 감찰부장을 보고자 하셨다. 도대체 감찰부장이 무슨 약을 처먹었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도.
– 허나 감찰부장의 업무를 방해할 수는 없는 법. 적절한 시기는 태자가 감찰부장을 배려하여 정하도록.
그리고 부황을 뵙기 전, 내가 직접 만나서 추궁해도 된다는 허락.
부황께서 허락하신 시간이다. 합법적으로 감찰부장을 놀리고 돌려 깔 수 있는 시간이야.
‘황명이다.’
결코 사적인 감정이 섞인 행동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황명이니.
그리 생각하며 통신구를 잡았다.
***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을 더듬던 마종공은 서둘러 마탑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꼿꼿하게 서있더라. 그래, 좋아할 줄 알았다. 나름 철저한 계산 끝에 한 짓이니.
‘잘 풀렸어.’
절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수습했다.
바닥에 떨어졌던 마종공의 기분이 다시 올라왔고, 밤 사이에 퍼졌을 안타까운 소문도 최대한 억눌렀다.
아무래도 마종공이 울면서 다녔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보다는 나와 손을 잡고 다녔다는 소문을 더 신뢰하지 않겠나. 원래 소문은 막는 게 아니라 더 큰 소문으로 덮는 게 제일이다.
‘밤이어서 다행이다.’
만약 마종공이 밝았을 때 제도를 돌아다녔다면 이 방법도 먹히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신구를 꺼내들었다.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에게 안부 인사라도 해야 하니.
– 우왕, 죠카! 먼저 열락을 다해주구! 무슌 일이야!?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연락을 받은 상대, 현명공.
평소처럼 요란스러운 반김이지만, 평소처럼 귀가 따갑지는 않았다. 오늘은 나름의 감사 인사를 위해 건 것이니.
“외숙모님 덕에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 오오오옹?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는 현명공. 순간 괜히 먼저 연락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먼저 찌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현명공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 퍄하하! 우뤼이~ 조캬~ 우리 쟈기~ 처럼 멋찐 남자가 댔네?
“…과찬이십니다.”
그 한마디에 외숙부가 어떻게 지내는지 대충 그려졌다. 일단 쉽지 않은 삶이라는 건 알겠다.
– 죠카? 죠카는 이 예!쁜! 외슉모 더게 마죵공하구 잘댄거지?
“예, 뭐…”
– 그럼 얘기좀해바!
거하게 취한 아저씨가 첫사랑 얘기라도 해보라고 독촉하는 비쥬얼.
연락을 괜히 한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현명공이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
그렇게 어제 마탑에서부터 있던 일을 적당히 설명해줬고─
– 조오~ 카?
“예, 외숙모님.”
– 난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정도를 원한 거지, 공성추로 명치를 찍어버리라고 한 건 아닌데.
어느새 취기를 몰아낸 현명공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발.
현명공이 당황하여 취기를 날리게 한 영웅. 그게 바로 나다.
‘내가 일부러 그랬냐고.’
씁쓸하다. 마지막까지 받았던 현명공의 눈빛. 그 눈빛은 마치 ‘내 설명이 이 아이한테 어려웠나?’ 같은 눈빛이었다.
당연히 오해다. 나도 원래는 적당히 찌르려고 했다. 그냥 상상도 못한 포션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 문제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마종공의 멘탈을 파괴해버렸다.
그게 흐르고 흘러서 이렇게 돼버린 거지, 아무튼 난 약하게 하려고 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이지만. 솔직히 내가 말하고도 변명 같기는 해.
– 그래도 조카! 마종공하고 연애 문제로 싸울 일은 없겠네!
게다가 현명공은 위로랍시고 그런 말을 했다.
그래, 싸울 일은 없겠지. 이미 처절할 정도로 펑펑 울며 바닥을 보인 마종공이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 슬픈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겠지. 정말 슬픈 일이다…
‘남 걱정할 때는 아닌가.’
연락이 끊긴 통신구를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미래의 남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걱정할 때다.
현명공과 연락을 하는 사이 날아온 문자. 심지어 황실을 상징하는 보라색 테두리로 장식된 웅장한 문자.
[ 공사가 다망한 감찰부장이 제도에 왔다고 하니 반가울 따름이다. 긴히 논하고자 할 것이 있으니 즉시 황태자궁으로 오라. ]바쁜 새끼가 왜 제도까지 꾸역꾸역 올라와서 이런 소란을 피웠냐는 우회적 쌍욕.
그 아름다운 문자에 나는 아무 반항심도 들지 않았다.
‘…징계는 안 받겠지?’
그저 징계를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 위안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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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하반기에만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을 황태자의 긴급 소환령. 이제는 슬슬 익숙하고 정이 들 것 같다.
‘이딴 걸로 정들면 안되는데.’
씁쓸한 심정으로 흉측한 문자를 빠르게 삭제했다. 내 통신구에 보관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문자다.
그리고 문자를 삭제하자마자 바로 마르게타에게 연락을 걸었다.
‘얼마나 붙잡힐지 모르니.’
솔직히 이번 일로 징계까지 당할 것 같지는 않다. 징계 다수 경험자는 어떤 짓을 해야 징계를 먹을지 감이 오는 법. 이번 사건은 높으신 분이 뒷목을 잡더라도, 나에게 징계를 줄 정도의 일은 아니다.
애초에 주고 싶어도 줄 명분이 없고. 공작을 울린 죄? 제도에서 사이좋게 걸어 다닌 죄? 당당하게 말하기 곤란한 것들이지 않나.
때문에 징계를 피했다는 건 다행이다. 동시에 징계가 아니라서 무슨 조치를 받을지 감이 안 잡힌다. 지금 황태자의 소환령에 응하면 언제 아카데미에 복귀할 수 있을지 미지수.
‘저번 같은 일은 피해야지.’
만약 몇 시간이나 붙잡히면 오후가 돼서야 아카데미에 복귀한다. 저번처럼 무단으로 마르게타를 패싱하는 꼴.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의 소문이 마르게타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겨우 진정한 마르게타가 다시 무너지겠지.
그건 피해야 한다.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면 미리 말하고, 마르게타가 들으면 오해할 일은 내 입으로 말한다. 그게 도리다.
– 어머, 칼?
“마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게타가 연락을 받았다. 식사 후 티타임이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한쪽에 찻잔이 보였다.
– 아침부터 연락이라니, 그렇게 제가 보고 싶었나요?
놀란 듯 눈이 커졌던 마르게타는 금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오전이면 부회장실에 올 양반이 아침부터 연락. 마르게타 입장에서는 의아하면서도 그만큼 나를 보고 싶어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일이기는 하다.
“예, 보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늦게 찾아갈 것 같아서요.”
미소를 짓던 마르게타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마종공 각하와 만날 일이 있어서 어제 제도에 왔습니다. 지금은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시고요. 아무래도 아카데미 복귀가 늦어질 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은 내용에 마르게타의 몸이 흠칫 떨렸다. 통신구로도 보일 정도의 움찔거림.
그럴 수밖에 없다. 마종공에게 고백을 받은 내가 마종공과 만나는 것. 근신과 구금 경험이 있는 내가 황태자를 만나는 것. 마르게타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이제 신년하례식도 코앞이지 않습니까. 신년하례식이 끝나면 철혈공 각하께 결혼 허락도 받아야 하는데, 주변이 시끄러우면 곤란하죠.”
– 아, 네. 그, 그렇죠. 이제 코앞이죠.
딱딱하게 굳었던 마르게타는 그 말을 듣자 급속도로 녹아 내렸다. 결혼 허락이라는 말에 근심이 싹 사라진 모양.
마르게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믿음과 안심이다. 그 두 가지만 확실하게 보장하면 마르게타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준다.
“예. 그리고 마종공 각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마르의 위치는 굳건할 겁니다.”
헤실헤실 웃던 마르게타의 눈이 다시 커졌다.
위치가 굳건하다는 것은 마종공에게 첫 번째를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칼의 첫 번째를 차지할 자격은 없어요…”
사실 저번 노숙 사건으로 인해 마르게타는 첫 번째에 대한 열망을 버렸다. 그저 나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몇 번째라도 상관 없다는 듯이. 내 상처를 위해서라면 자기 욕심보다는 내 선택이 중요하다는 듯이.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리 간단히 변하겠나. 열망을 버렸더라도 이왕이면 가지고 싶은 게 사람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첫 번째라고 확언을 줬으니 기쁠 수밖에.
– 가,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나요?
통신구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저렇게 좋아한다.
“자세한 건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신구로 말하기에는 다소 복잡하고 긴 얘기다.
“아가를 멀리서 보는 것만은, 마음에 품는 것만큼은 허락해주지 않겠니?”
마종공이 이리 절절한 말을 했다는 걸 어떻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상 내 뜻에 따르겠다는 항복 선언. 마음 절절해지는 선언인 동시에 마종공을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마종공이 첫 번째에도, 일부일처에도 집착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그리고 마종공이 일부일처를 원하지 않는다면, 마르게타와 마종공이 첫 번째에 대한 갈망이 줄었다면 나름 괜찮은 방법이 있다.
아니, 나름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해답이 있다. 이 방법을 왜 이제서야 떠올렸나 싶을 정도로.
– 그, 그래요. 기다릴게요.
“혹시 모르니 기숙사 창문은 열어두십쇼. 밤에라도 찾아가겠습니다.”
그 말에 마르게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게타 이후에는 교장에게 연락을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일이 있어서 잠깐 제도에 갔는데, 황태자의 호출을 받아 동아리 시간에 늦을 수도 있다고.
순간 교장의 눈에 ‘이 새끼는 무슨 짓을 했길래 황태자를 밥 먹듯이 만나지?’ 같은 의문이 스쳐갔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감찰부장 왔는가?”
“전하를 뵙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교장의 의문이 아닌 내 앞날이니까.
사실 황태자궁 앞에서 많이 고민했다. 정해진 결과가 나오는 징계가 아니라 황태자의 기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쪼인트 까기.
반성의 의미를 보이기 위해 그랜절부터 박을까, 아니면 공중제비를 돌며 입장할까. 만약 황태자궁을 지키기는 기사가 ‘집무실까지 기어서 들어오시라는 명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꿈틀 꿈틀 기어갈 자신도 있었다.
결국 평범하게 걸어들어갔지만.
“요즘 감찰부장을 자주 보는 것 같아 즐겁다네. 업무에 시달리는 일상 속에 자그마한 낙이지.”
= 바빠 죽겠는데 잊을만하면 사고 터뜨려서 고맙다, 개새끼야.
시작하자마자 바로 우회적 쌍욕을 박는 황태자에게 고개부터 숙였다.
억울하지만 지금은 숙여야 한다. 솔직히 울며 돌아다닌 것도 마종공이고, 손을 잡고 마탑에 간 것도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거지만, 아무튼 내 지분도 없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제국의 기둥이 서로 긴밀히 얽히는 것 같아 기꺼울 따름일세.”
“황송하옵니다.”
그 말에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마종공과 얽혀서 터진 사건이 심히 거슬린다는 말이었으니.
모든 작위 귀족들이 모이는 신년하례식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 그 준비로 바쁠 황태자 입장에서 제도 한복판에서 터진 소동은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일단 앉게. 손님을 오래 세워두고 있었군.”
“예, 전하.”
다행히 말로 패는 건 짧았다. 아니, 일단 앉힌 다음에 더 패려는 걸 수도 있지만.
“그건 그렇고 날이 갈수록 기대되는군. 감찰부장의 첫 부인은 어느 가문일지 말이야.”
상석에 앉은 황태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짧은 게 아니라 앉힌 다음에 패려는 거였다. 앉자마자 바로 강력한 직구를 던지는 걸 보니 확실하다.
그리고 노골적인 황태자의 말에 무심코 침을 삼켰다. 내 첫 부인, 내 옆을 처음을 차지할 부인.
‘방법이 있다.’
서로가 싸우지 않아도 될 방법. 더 이상 첫 번째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방법.
나는 그 진리에 도달하고 말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고,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웠다. 연이어 과한 충격을 받은 나는 오늘 아침, 진리의 문을 연 것이다.
“전부입니다.”
“그래, 전─”
잔을 들던 황태자의 손이 멈췄다.
***
들고 있던 잔을 내려다 봤다.
혹시 내가 취한 건가 싶어서.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보드카가 차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물이군.’
하지만 물이 맞다.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는 재미없는 액체. 분명 물이다.
아니면 아까 마신 보드카가 아직도 머리를 좀먹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다. 감찰부장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업무를 보고 있었으니까.
결국 당사자에게 직접 재확인하는 것만이 답이다.
“…전부?”
감찰부장에게 되물었다. 내가 들은 것이 맞냐고.
“예, 전부입니다.”
맞았다. 내가 들은 미친 소리가 맞았다.
“부인은 평생을 함께할 가족입니다. 동등하게 사랑하지 못할망정, 순서를 정하는 건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걸 아는 놈이 일부다처를 택했냐, 라는 말은 애써 참았다. 감찰부장도 마종공의 난입만 없었으면 마르게타 공녀하고만 혼인했을 테니.
“처음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원할 것입니다. 극적인 타협으로 양보가 이루어지더라도, 평생의 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감찰부장이 원래 말이 긴 편이었나? 최대한 용건만 말하는 편인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혓바닥이 길다.
마치 무언가 찔리는 사람이 애써 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첫 번째, 두 번째는 결국 결혼 순서이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렇지.”
그래도 절실한 눈빛을 한 감찰부장의 기세에 어울려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하기는 하니까.
“그렇다면 동시에 결혼하겠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게.
상상도 못한 발언에 입이 굳고 말았다.
“결혼 순서로 몇 번째인지 나뉜다면, 동시에 결혼을 해서 모두가 첫 번째가 되는 겁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감찰부장은 더욱 폭주했다. 누가 들어도 개소리에 미친 발상인데 근거랍시고 주둥이를 놀리고 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진심인가? 아니, 농담이겠지? 그런데 감찰부장이 이런 문제로 농담을 할 사람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딴 미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사람? 그것도 아니다.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애써 부여 잡으며 다시 감찰부장을 살폈다.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친 눈.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미쳤구나.’
그래, 미친 것이다. 감찰부장은 연이은 사건사고에 결국 정신을 놓고 말았다.
17살부터는 전장에서 무인으로, 19살부터는 정계에서 부장으로. 그렇게 4년 동안 이어진 고통과 인고의 세월.
그리고 누구도 상상 못한 마종공의 고백, 그로 인하여 두 공작가 사이에서 치일 운명.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감찰부장은 결국 내부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감찰부장을 너무 혹사시켜서 망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도 하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전하.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뭐라뭐라 말을 잇던 감찰부장은 당당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문제가 없기는 하겠지. 네 머릿속에서는 말이야.
“그래, 대단하군.”
그래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감찰부장을 보면 놀릴 생각도, 추궁할 생각도 전부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이 미쳐버린 가련한 남자를 위로하고 싶었다.
감찰부장에게는 적당히 고개만 끄덕여주다가 돌려보냈다.
“…그런가.”
그리고 부황께 달려가 감찰부장의 상태를 설명했다. 감찰부장의 상태가 좋지 않지만, 아무튼 충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감찰부장의 노고가 실로 많다.”
“예, 그러하옵니다.”
“…신년하례식 중에 시간을 만들도록. 내 친히 감찰부장을 치하할 터이니.”
결국 부황께서도 감찰부장을 떠보기 위한 자리를 접으셨다.
그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버린 충신을 위로하고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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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막을 걷고 미래를 보아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말로 패는 걸 준비하던 황태자도 내 말을 듣더니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나.
내 획기적인 발상에 황태자도 감탄한 것이 틀림없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는 하지만, 기존 상식의 틀을 깨는 진리가 나오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간이 걸렸어도 결국 새로운 진리를 이해하지 않았나. 황태자라는 직함을 포커로 얻은 놈이 아닌 만큼 훌륭한 이해력이다.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긴급 소환령을 때린 황태자도 납득한 진리. 이대로 눈을 감아도 좋을 것 같은 만족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시간이 쓰레기 같다. 아니, 아니지. 그 고민을 거치며 지금의 결론에 도달했으니 쓰레기는 아니다.
‘이리 간단한 문제를.’
머리가 맑아졌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래, 고르디우스의 매듭도 알렉산드로스가 자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풀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달걀도 콜럼버스가 답을 내놓기 전까지는 누구도 세우지 못했지.
이제 이 대륙에는 새로운 관용구가 생길 거다.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고 깔끔하게 해결했다는 의미, 바로 ‘칼의 결혼’이 말이다.
만족스러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 나를 감싸주는 것 같았다.
‘바로 복귀하면 되겠다.’
게다가 예상과 달리 대화가 몹시 빨리 끝났다. 마르게타도 이제 막 부회장실로 출근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한밤 중에 벽을 타며 기숙사에 침투할 필요는 없어졌다. 안 들킬 자신은 있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들키면 너무 어색하고 머쓱한 상황이니.
아무튼 빨리 돌아가자. 황태자도 납득한 이 기쁜 소식, 마르게타에게도 알려줘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법 아니겠나.
부회장실에 들어가니 다소 놀란 듯한 마르게타가 보였다. 늦을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니 뭔가 싶었겠지.
“어서 와요, 칼. 전하께서 찾으신 일은 잘 끝났나 보네요.”
그래도 일찍 온 게 나쁜 일은 아니니 웃으며 맞이해줬지만.
“예, 무사히 끝났습니다.”
“후후, 다행이에요. 갑자기 전하와 만난다고 하길래 걱정했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마르게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슬쩍 양팔을 벌렸다.
이제는 평범한 아침 인사와 같은 과정.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아주자 가슴에 얼굴을 비비더니 살며시 떨어졌다.
원래는 한 번 붙으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익숙해져서 그런지 적당히 끊고 떨어지는 법을 배웠다.
“점점 짧아지는군요.”
조금 장난기가 돌아 언급하니 마르게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카, 칼하고 평생을 지낼 거니까요. 짧은 시간에 집착할 필요는 없죠.”
그래도 애써 당당하게 말하니 못 본 척 넘어가 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마르게타가 이렇게 여유롭다면 나와의 관계에 대해 불안감이 없다는 뜻 아니겠나.
“하하, 맞는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자 마르게타도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만, 뒤늦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르. 어제 제가 마종공 각하를 만났다고 했었죠?”
마르게타가 더 초조해 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마종공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기로 했었지. 황태자를 설득하느라 정신이 팔려 잠깐 잊고 있었다.
새로운 진리에 도달한 대가로 기억력이 다소 안타까워진 건가. 슬픈 현실이다.
“아, 네.”
그리고 내가 운을 띄우자 마르게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도대체 마종공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무슨 대화가 오고 갔기에 자신이 첫 번째가 된 것인지. 아마 나와 연락을 한 이후부터 궁금했을 테니까.
“각하께서 조금 실수를 하셔서, 저에게 사과를 하셨습니다.”
“…네?”
짤막하게 요약한 한마디에 마르게타가 눈을 깜빡였다. 공작의 실수, 그로 인한 사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공작은 제국 귀족의 정점이요, 황제의 수족으로서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설령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감히 지적할 수 없는 지고의 존재이며, 사과를 할 필요가 없는 거물이기도 하다.
물론 나와 마종공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니 예외다.
“그게 말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말을 이었다.
현명공의 조언을 듣고 마종공에게 찾아간 일, 마종공이 나 몰래 수명 연장 프로젝트를 진행한 일, 대판 싸우고 판을 뒤엎기 직전까지 갔다가 마종공의 사과로 겨우 잠재운 일. 그리고 하룻밤 저택에서 자고, 아침에는 손을 잡고 마탑에 간 것까지 전부.
정말 구체적으로, 세세한 것까지 전부 말했다. 더 이상 마르게타에게는 그 무엇도 숨기고 싶지 않으니. 괜히 숨겼다가 오해로 이어지고 싶지 않으니.
“그, 그렇군요.”
다행히 마르게타도 정보 과잉으로 혼란스러워할 뿐, 내가 마종공과 노닥거렸다며 원망이나 분노를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전부 말하는 게 정답이다.
“각하께서… 그러셨군요.”
나지막히 중얼거린 마르게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럽겠지. 무단으로 내 수명을 늘리려고 했다는 잘못, 그러나 빠르게 사과하며 처절한 눈물까지 보였다는 반성. 아마 화를 내야 할지, 동정을 해야 할지 헷갈릴 거다.
“…칼에게 푹 빠지셨나 봐요.”
입을 달싹이던 마르게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민 끝에 후자를 택한 모양.
“과분하게도 그렇습니다.”
그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찌 보면 말년에 ‘네 남편 쩔더라.’를 당할 뻔한 마르게타다. 그럼에도 엘프라는 종족의 차이, 눈물로 사과한 마종공의 마음을 이해하고 넘어가 줬다.
정말 과분하다. 마종공도, 루이제도, 이리나도, 1… 과장… 도 나에게 과분하지만, 마르게타의 드넓은 마음씨도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이다.’
그러니 그런 마르게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마종공은 물론 마종공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첫 번째를 빼앗길 일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아무튼 각하께서 조금 실수를 하셨지만, 그래도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쇼. 같은 첫 번째 아닙니까.”
“알겠어요. 같은 첫…?”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던 마르게타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과 ‘첫 번째’가 붙여서 쓸 수 있는 단어인지 헷갈리는 거겠지. 이해한다. 황태자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했으니까.
그래도 내 설명을 들으면 마르게타도 납득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가 너무 편견에 갇혀 있었습니다.”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순서를 정해야 한다는 편견에 갇혀 얼마나 고생했는지.
즐거운 마음으로 황태자에게 말했던 것을 마르게타에게도 설명했다. 결국 첫 번째니, 두 번째니 하는 건 결혼 순서에 묶인 부질없는 이름이라고. 그렇다면 동시에 결혼을 하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고.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마르게타는 조용히 나에게 다가오더니 꼭 안아줬다.
“칼이 그걸 원한다면 저도 좋아요.”
나 또한 그런 마르게타를 끌어안았다.
‘역시.’
믿었다. 마르게타도 납득할 거라 믿었다.
***
언제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칼. 가끔 독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칼.
그런 칼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지금 칼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칼을 걱정 끼칠 것 같아 그저 끌어안았다.
‘어쩜 좋아.’
즐겁다는 듯 말하던 칼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눈시울도 조금씩 뜨거워졌다.
‘많이 아팠구나.’
칼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칼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니 이렇게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종공이 칼에게 고백했을 때, 내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던가. 그리고 칼은 마종공만이 아니라 다른 여인들의 고백도 신경 써야 했다.
그렇게 칼의 어깨에는 많은 짐에 얹어졌다. 감찰부장으로서의 책임감, 아카데미 감찰관으로서의 역할, 제과 동아리 고문으로서 왕족 관찰, 거기에 화려한 고백까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압박을 당하면 아무리 마음이 강철 같은 사람도 타격을 입을 텐데.
“모든 신부들이 마종공 각하와 같은 위치에서 혼인을 하는 겁니다.”
“네, 정말 멋져요.”
“누구도 위가 아니고, 누구도 아래가 아니죠.”
“생각만 해도 좋네요. 고마워요.”
계속 말을 이어가는 칼의 등을 토닥였다.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동시 혼인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머리가 이해를 거부했다.
그래도 차마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칼은 장난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떠보기 위한 발언도 아니었으니까.
‘진심이구나.’
칼은 진심이다.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고생하고 고생한 끝에 자기 나름의 답을 찾은 것이다.
그 답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말려.’
홀로 끙끙 앓았을 칼을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드디어 해답을 찾은 걸로 착각, 아니 생각하는 칼에게 ‘전 싫어요.’ 라고 정색할 수 없었다.
그래, 칼이 그 방법을 원하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지. 모두가 첫 번째라면 행복한 결과잖아.
모두가 같은 위치. 어찌 보면 정말 꿈과 같은 일이다. 가문의 격이 낮은 부인들이 높은 부인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지고, 아무 부담 없이 칼과 사랑을 나누며 지낼 수 있다.
“처부모님들을 설득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지만…”
칼이 중얼거리는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외로 그런 정상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신부가 다섯이면 식장도 큰 규모로 골라야겠고…”
순간 칼의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다섯.’
이미 알고 있는 숫자지만 다시 들어도 머리가 멍해졌다. 일부다처를 각오하기는 했지만, 설마 다섯이나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나마 다섯이면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숫자다. 두 손으로도 부족한 황금공을 생각하면 칼은 양호한 거지.
만약 다섯보다 늘어나면 조금 어지럽겠지만, 그 역시 칼이 선택한 일이다.
“마르.”
“네, 칼.”
“만약 부케 여러 개를 한 사람이 잡으면 어떻게 하죠?”
그 말에 아무 대답 없이 칼의 등을 토닥였다.
‘가엾게도.’
이제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칼이 어딘가 망가졌다는 게 느껴져서.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무언가 이상해졌다는 게 느껴져서.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칼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칼, 걱정 말아요. 난 언제나 칼의 편이니까요.
지금은 많이 혼란스럽고 아플 거예요. 그래도 전 칼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설령 돌아오지 않는다면, 칼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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