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29)
‘시발…’
그 문자가 어떤 도발보다도 가슴 아팠다.
겨울이었다.
사람이 미쳐도 시간은 흐른다. 내가 정신을 놓은 사이, 놓았던 정신줄을 도로 잡고 흑역사를 애써 외면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다.
오히려 종업식이 코앞이다 보니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더라.
“멀쩡한 칼을 보고 학기를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면목 없습니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 팔뚝을 쿡쿡 찌르는 마르게타의 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르게타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지 짐작이 가니까. 혹시 내 광기가 오래 가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겠지.
“저는 공동 결혼식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흥얼거리듯 들려오는 마르게타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오직 한 명 아닙니까.”
“그래요? 칼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원하던 답을 들은 것처럼 쿡쿡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어색히 마주 웃었다.
이번 일은 마르게타에게도 상처가 됐을 거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주목을 나눠가질 뻔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내가 정신을 차린 걸 알게 된 이후로, 잊을만하면 이렇게 테스트를 한다. 꾹꾹 눌러뒀던 서운함을 투정의 형태로 터뜨리는 것처럼.
“미안합니다, 마르.”
슬쩍 마르게타를 품에 안자 마르게타도 순순히 품에 안겼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하겠습니다. 그날 하루는 오직 마르를 위한 날이니까요.”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마르가 좋다면 제도에서 한 번, 울켄 공작령에서 한 번, 타일글레헨에서 한 번 치르는 건…”
그 말에 마르게타가 찰싹 내 등을 때렸다.
“너무 많아요. 제 결혼 기념식을 몇 개로 만들 생각이에요?”
가늘게 뜬 눈과 마주치자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게타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시간상 세 번은 무리지. 대신 세 번 같은 한 번을 하자. 어차피 쓰지도 못하고 모아둔 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쓰겠나. 자금만 생각하면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을 해도 문제 없다.
“우선 약혼부터 해야겠지만요.”
결혼 얘기를 하는 도중에 약혼으로 꺾으니 조금 이상하지만, 애석하게도 정말 약혼이 먼저다. 아직 마르게타가 학생인 상황에서 결혼하는 건 곤란하지 않나.
…사실 약혼이 먼저가 아니라 철혈공에게 그랜절을 박는 게 먼저라고 봐야겠지만.
“걱정마세요. 아버님도 칼을 사위라고 생각하시니까요.”
“하하, 그거 다행인 말입니다.”
그래도 마르게타의 위로에 조금은 마음이 풀린다.
그래, 까짓 사흘이나 나흘 정도 성 앞에서 무릎 꿇으면 봐줄 거다. 마르게타를 평생 미혼으로 둘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허락해줄 거다.
‘일이 안 풀려도 사지 몇 개 꺾이는 걸로 끝나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오빠가 제정신을 차리셨다.
“오라버니.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렇게 물어볼수록 이 오라버니는 마음이 아파…”
이미 루이제는 해맑은 얼굴로 오빠 곁을 맴돌았다. 그동안 걱정한 것에 대한 보답을 받겠다는 것처럼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야.’
안도감과 행복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뒀었다. 오빠의 상태가 종업식까지 이어지고 신년하례식 때도 고칠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제도에 있는 가문의 저택에 머무르려고 했었지.
하지만 최악은커녕 최선으로 끝났다. 종업식 전에 오빠가 회복에 성공했다.
‘고마워, 에리히.’
다른 부원들과 족구를 하고 있을 에리히를 떠올렸다.
역시 가족이야. 힘들 때는 가족만큼 힘이 되는 존재가 없어. 오빠와 에리히의 사이가 그렇게 친밀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준 건 에리히잖아.
이것이 가족의 힘. 지금의 나로서는 이길 수 없는 관계.
‘언젠가는.’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지금은 이길 수 없지만, 언젠가는 나도 오빠와 가족이─
“으흠, 흠!”
“이리나?”
“왜 그래?”
“자, 잠깐 목이 조금 막혀서요.”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에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성급하다. 아직 공녀님도 결혼을 하지 못했는데 너무 성급한 상상이다.
‘…아직 답도 못 들었는데.’
그 대가인지, 의식의 흐름이 좋지 못한 곳에 도착하자 조금 슬퍼졌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오빠에게 고백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물론 내가 천천히 답해줘도 좋다고 했지만, 이왕이면 빠르게 승낙을 받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나.
그래도 희망은 있다.
“신부가 다섯이니 식장은 큰 곳으로 골라야겠다고 했어요.”
공녀님이 오빠의 마음이 다쳤다는 말을 하셨을 때, 그때 들었던 말.
다섯. 분명 다섯이라고 하셨다. 공녀님, 마종공으로 둘. 나와 루이제까지 넷. 거기에 우리 다음으로 오빠에게 고백했다는 부하 관료까지 다섯.
“일단, 칼이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를 밀어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솔직히 기뻤다. 오빠의 마음이 아픈 상황에서도, 정말 이기적이게도 그 말에 은근히 좋아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 뒤로 바로 자괴감에 빠졌지만,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섯.’
오빠는 신부가 다섯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게 마음이 아파서 잘못 얘기한 것이 아니라면, 아픈 것을 떠나 이미 다섯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기다리면 돼.’
그저 오빠가 나에게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다. 오빠가 마음을 정리하고, 편할 때 답을 주는 걸.
비록 내 앞에 밀린 사람이 제법 있는 것 같지만, 좋은 답이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니 충분히 기다릴 용기가 생겼다.
“자.”
그리고 홀로 마음을 다잡는 사이, 오빠가 찻잔을 불쑥 내밀었다.
“오, 오빠?”
“추울 때는 따뜻한 거라도 자주 마셔야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하는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까 목이 막혔다는 말에 이러는 거겠지. 그냥 둘러대려고 한 말인데, 그 말을 넘기지 않고 이렇게…
“고마워요.”
나도 미소로 화답하며 찻잔을 받았다. 역시 멀쩡하니 이렇게 멋진 오빠다.
이 나쁜 마음의 감기. 우리 오빠를 괴롭히기나 하고.
“이거 네가 가져온 찻잎이잖아. 내가 고맙지.”
그 말에 더욱 미소가 짙어졌다.
***
살짝 옆을 쳐다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으며 내 잔에 차를 따르는 루이제가 보였다.
시선을 도로 앞으로 돌렸다. 차를 홀짝이는 이리나가 보였다.
‘더 미루면 곤란한데.’
평온한 둘을 보니 정작 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제 한 해가 끝나간다. 게다가 아카데미 특성상 종업식이 1년의 마지막 날이나 다름없다.
종업식을 찍으면 그대로 해산. 내년 3월 개학식까지는 그대로 볼 일이 없다.
‘그러면 답변도 3월.’
끔찍하다. 그렇게 되면 둘 입장에서는 고백을 하고 거의 반년이나 답을 못 받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입장이라면 울고 싶지 않을까.
그렇다고 종업식 전에 답을 준다?
‘너무 졸속이야.’
아무리 갑작스레 받은 고백이라도 그 마음이 가벼운 건 아니다. 그러니 답변은 정성을 다해 해야지.
…이미 공동 결혼이니 뭐니 광기의 발언을 한 입장이니 더더욱.
‘그렇다고 천천히 하면 3월이고.’
골치가 아프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아닌가.
‘차라리 거절이라면.’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할 텐데.
답답한 심정에 머리를 쓸어올렸다. 만약, 아주 만약 내가 이 둘의 고백을 거절한다면, 차라리 졸속이라도 빠르게 답을 주는 게 맞다.
애초에 거절 답변을 공 들여서 하는 건 티배깅 아니냐.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아도 달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거절이 아니다.
‘광기 속에 답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했지만, 놀랍게도 미치고 나서야 내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