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30)
거절하기 미안해서? 그건 아니다.
‘기뻤지.’
원래 이 육체의 주인이 만든 관계가 아닌, 빙의한 후에 내가 쌓은 인연. 그 인연이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고 고백했다는 기쁨.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 기뻤다. 내 가족이 되어준다는 말에 기뻤다. 그래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백을 받아서 무작정 결혼하는 건 아니다. 그건 장담할 수 있다. 고백을 받기 전부터 쌓아온 관계가 있으니 좋은 거다.
비록 루이제, 이리나와 만난 건 1년도 되지 않았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것도 깊은 인연이다. 나는 거의 업무적으로만 교류하지, 사적으로 누군가를 만난 적은 거의 없으니까. 그게 이성이라면 더더욱.
‘쉬운 사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나 나름의 기준과 판단으로 고백을 받으려고 하는 거지만, 3자의 눈으로 보면 ‘고백만 하면 받아주는 남자.’ 아닌가.
이게… 맞나?
‘…맞겠지.’
그래도 고민은 짧았다. 남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는 거지.
부인을 무럭무럭 늘리는 쉬운 남자. 어쩌면 헤카테를 핑계 삼아 마음을 억누른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헤카테와 결혼했어도 다른 부인들을 들였을 놈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곧 방학인데.”
물론 의미 없는 가정이다. 중요한 건 지금 내 선택 아니겠나.
“괜찮으면 여름 방학 때처럼 같이 놀까?”
마음을 정리하며 내뱉은 한마디. 그 말에 루이제와 이리나의 눈이 커졌다.
졸속 대답을 피하고 3월 대답을 피하려면 이게 정답이다. 방학 동안 같이 지내면 충분히 대답할 여유가 있다.
“저, 저는 괜찮은데 다른 애들은 어떨지…”
잠시 말이 없던 루이제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른 애들은 필요 없지만, 이미 내 입으로 여름 방학 때처럼이라고 말한 상황.
“아마 다들 좋아할 거야. 여름에도 그랬잖아.”
게다가 요즘 저것들 하는 꼬라지를 보니 다른 지역으로 데리고 다녀도 딱히 피곤할 것 같지 않다.
어차피 방학 동안 아카데미에 있을 바에는 이미 겪어본 제도 여행을 다시 하는 게 편하지.
족구를 끝내고 돌아온 5인방에게 겨울 일정을 물었다. 할 거 없으면 이상한 곳에 가지 말고 저번처럼 동아리 여행이나 가자고.
그리고 그 말에 류티스가 대표로 대답했다.
“아, 저희 이번에는 귀국할 예정입니다.”
?
뭐지, 환청인가?
‘귀국?’
얘네가 그런 단어를 알고 있었어…?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대하는 방법을 잊었다. 괜히 희망을 가질수록 반작용으로 돌아올 절망만 짙어질 테니.
“1년 넘게 제국에서만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류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때, 기쁨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찾아왔다. 당연히 꽝이 나올 줄 알고 긁은 복권에서 2등이 나온 기분.
물론 1등은 이 새끼들의 자퇴지만, 그건 이미 포기했고.
“그런가?”
“하하, 혹시 저희가 간다니 아쉬운 겁니까?”
어디서 개소리야. 너무 기쁜데.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않고 표정으로 대답하자 류티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새해는 조국에서 보내야지요. 제국의 신년하례식 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아르메인도 새해에 기념식을 하거든요.”
굉장히 그럴 듯한 사유라 납득하고 말았다.
확실히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에 왕실 인사가 불참하는 건 곤란하겠지. 그랬다가 괜히 왕실 내 불화설이 떠돌면 국왕만 귀찮아진다.
그리고 라테르와 타니안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 둘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회의와 승천식.’
새해가 가지는 중요성은 유벤과 신성교국이 아르메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
연합을 이루는 다섯 왕국의 군주가 모이는 연합회의, 에넨의 첫 번째 사도가 하늘로 올라간 날을 기념하는 승천식. 타국에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행사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갈 수 있는 사람만 가는 수밖에.”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 급속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근래 들어 데려가도 무방할 정도로 잠잠해진 녀석들이지만, 최선은 즈그들 나라로 꺼지는 거니까.
생각도 못한 연말 선물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에넨의 소소한 자비인가.
‘고맙다…’
이딴 걸로 고마워하는 팔자가 슬프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제발 앞으로도 이런 선물 많이 줘.
***
고문에게 아르메인 특산품을 선물로 가지고 돌아오겠다 말하는 류티스를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귀국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졸업까지 제국에서 버티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나.
‘그게 왕실을 위한 것이니.’
내가 조국에 머무르며 존재감을 보일수록 형님의 세자 자리만 위협하는 꼴이다. 그러나 자국이 아닌 타국 교육 기관에서 3년을 배운 왕자, 어느 귀족이 세자로 지지하겠는가.
그래서 3년 동안 버티고 버틸 생각이었는데─
‘눈치 없이 낄 수는 없지.’
슬쩍 루이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문과 여행을 간다는 게 기쁜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
그래, 저런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끼겠다고 말하겠나. 여름 때는 루이제를 마음에 품었기에 함께 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는 루이제를 포기했고, 친구로서 루이제의 사랑을 응원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이게 옳다. 제도 여행은 연인의 데이트여야 한다. 동아리 단체 여행은 여름에 했으니 충분하지 않나.
‘애초에 귀국할 수밖에 없고.’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도 여행을 포기한다고 굳이 귀국할 필요는 없다. 방학 중에 아카데미 기숙사에 머무는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귀국해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세자 저하께서 이번 연합회의에 참가하신다고 합니다.”
며칠 전, 본국과의 연락책을 통해 형님이 연합회의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비록 부왕의 보조 역할이지만,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부왕 옆에서 회의에 참석한다는 건 명백히 후계자의 입지를 굳히는 행보. 내부적이 아닌 대외적으로도 세자임을 입증하는 활동.
그런 기념비적인 자리에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은 왕자가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세자의 입지를 부정하고 불화를 일으킨다는 낭설만 퍼지게 될 것이다.
‘노리셨군.’
살며시 뒷목을 주물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왕의 계책이다. 타국에 가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을 부르기 위한 계책.
내가 잠시 얼굴을 보여도 형님의 입지에 지장이 가지 않는 상황을 만드셨다. 심지어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왕실 불화설이 떠돌 판을 까셨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건 가야지.
‘타니안도 굳이 제국을 고집할 이유는 없고.’
귀국할 이유가 있는 건 타니안도 마찬가지다. 여명 교단에서 손꼽히는 행사인 승천식. 그런 승천식에 차기 성자가 불참하는 건 교황과 추기경들이 기절할 일이다.
“아카데미에는 예비 사제들을 위한 교실도 있지 않습니까. 미래에 교단을 이끌어 갈 동포들을 보고 싶기도 하고, 제국의 사제들과 지식을 나누고 싶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예전, 우연히 들었던 타니안의 입학 이유.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가 모인 제국의 사제들과 교류하기 위한 입학.
제법 중요한 이유기는 하지만, 승천식 불참을 각오하고 제국에 남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교류와 친목은 학기 중에 활발히 할 수 있지 않나.
‘반면…’
아직도 웃고 떠드는 류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입학한 이유?”
그때 들었던 말이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딱히 없다. 그냥 아르메인에 있는 건 지겨우니까, 색다른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지!”
광기 100%의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름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이유가 순수 재미였을 줄은 몰랐지.
그 대답을 같이 들은 빌라르 경은 조용히 눈을 감을 정도였다. 분명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 무표정이 우는 것 같이 보인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미친 놈.’
아무리 생각해도 저 놈은 귀국할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제국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 놈이다.
그냥 이대로 귀국해서 2학년 때 오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저런 녀석과 동급.’
그런 생각이 들자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내 입학 이유, 류티스의 입학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남들 시선으로는 나나 류티스나 자국 교육 기관을 버리고 제국에 온 별종으로 보이겠지.
억울하다. 내가 저런 광기에 물든 미친 놈과 동급으로 보일 거라니. 나는 왕실과 조국을 위해 힘든 발걸음을 옮긴 건데.
‘…아무렴 어때.’
그래, 아무렴 어떻겠나. 이미 1년이나 지났고, 아직 2년이나 남았다.
이제 와서 억울해 하기에는 돌이킬 수 없다.
망할.
***
불참 선언자는 귀국하는 3인방 외에도 더 있었다.
애초에 집이 황궁인 아인테르와 이번에는 영지에 있겠다는 에리히. 이렇게 둘.
“나는 영지에 있을게. 오랜만에 세라 얼굴도 좀 봐야지.”
“그래. 대신 안부 전해주고.”
“알았어.”
학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집으로 가는 아들. 분명 어머니도 기뻐하실 일이지.
그건 그렇고 세라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안 본 지 오래 되기는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