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40)
“나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루이제의 난입 덕분에 가슴의 고통은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침묵 속에서 따가운 눈초리만 받으면 버티지 못했을 텐데, 고맙다.
“헤헤, 전 오라버니가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너무 순진한 말이라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초창기 관료 생활을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왔을 거다.
막 관료가 됐던 나, 막 부장이 됐던 나는 정말 기괴하기 짝이 없는 발자취를 뽐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나 싶어.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경험하면서 크는 거지.”
그래, 경험하면서 크는 거다. 이번 사태는 내게 가족도 처음, 약혼도 처음이라 생긴 일. 하지만 이제 약혼도 했다. 가족에게 보고하는 것도 해봤다.
그러니 마종공, 루이제, 이리나, 1과장과의 약혼 때는 제대로 해야 한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면 실수가 아니라 지능 문제니까.
‘내가 눈치가 없지, 머리가 없나.’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머리가 사라진 실수였지만, 앞으로 같은 실수 따위는 없다. 약혼식 스페셜리스트- 칼 크라시우스가 되는 거다.
그렇게 다짐하며 걷다 보니 슬슬 보이기 시작한 저택.
“다들 먼저 들어가. 집사한테는 온다고 말해뒀으니 안내해줄 거야.”
이제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찾아갈 테니 슬쩍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도 무릎 꿇는 건 아니죠?”
내 말에 흠칫 몸을 떤 마르게타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울켄 공작령에서도 이 패턴이었지.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먼저 들어가라고 하고, 냅다 무릎을 꿇었다. 마르게타 입장에서는 PTSD가 생길 일.
“제 저택에서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과한 걱정이다. 그 성은 철혈공이 거주하는 마왕성이라 그런 거고, 이 저택은 내 명의의 자가다. 자기 집 앞에서 무릎 꿇는 놈이 어디 있겠어.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먼 곳이 아니니 금방 다녀올 겁니다.”
“정말 금방이죠?”
“물론입니다. 만약 늦을 것 같으면 연락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진동 상태였던 마르게타의 몸이 잠잠해졌다. 이렇게 당당히 말하니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별 문제다. 마르게타의 우려처럼 무릎을 꿇거나 그랜절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보통 일은 아니다.
– 뭐, 반지는 어디에서 사든 비슷할 겁니다. 제도의 상점들은 거의 상향평준화 상태라서요.
“그래도 그중에서도 순위는 있을 거 아냐.”
–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번에 2과장에게 물어봤던 적당한 반지 판매점.
– 마침 부장님 저택 근처네요. 진짜 운명인가?
고백을 받아들이며 선물로 줄 예정인 네 개의 반지.
– 아칼라 거리를 쭉 걷다 보면 3층 건물 나올 겁니다. 거기 통째로 쓰는 곳이에요.
이제 그걸 사야 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다.
“자존심은 팔아도 양심은 팔지 말아야 한다.”
정말 어린 시절부터 누누이 들었던 말씀. 우리 집안이 운영하는 가게를 처음 만드신 증조부님의 말버릇.
그 말씀은 조부님, 아버지를 거쳐 나에게까지 이어졌다. 상인으로서 자존심을 팔며 이익을 남길지언정, 양심을 팔아 손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귀중한 조언.
그 조언은 실로 아름답고도 훌륭한 말씀이었다. 그 조언을 따라 나아갔기에 건물 구석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우리 가게는 조금씩 커져갔고, 결국 3층이나 되는 건물 하나를 구매하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의 성공은 네 능력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선조가 뿌린 씨앗이 지금 싹을 틔운 거다.”
그럼에도 나는 으스대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이 가슴 깊숙이 남았기에.
그래, 내 능력이 아니다. 작은 쪽방에서 시작한 가게가 어느덧 제도에서도 알아주는 대형 상점으로 변한 기적. 이 기적이 어찌 나 혼자 해낸 것이겠나.
그렇기에 기적의 시발점인 증조부님의 초상화를 가게에 걸었다. 매일매일 초상화 앞에서 기도를 했다. 오늘도 무탈히, 오늘도 기적 같은 하루를 보내게 해달라고.
그리고 기도를 마치면 가문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액자를 닦았다. 정확히는 그 액자 속의 물건이 보물이지만.
[ 성실 납세점 표창 – 제국 재무성 징수부장 ] [ 청정 사업자 표창 – 제국 재무성 감찰부장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곳에 배치한 두 개의 액자. 화려한 포장에 비해 내용은 몹시 짧았지만 저 표창이야 말로 내가, 조상님이 양심을 팔지 않았다는 증거다.
세금을 덜 내기 위해 꼼수를 부리지 않았고, 영업을 하며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표. 그 깐깐한 징수부와 감찰부에게 동시에 인정받았다는 자랑스러운 훈장.
저 표창을 받은 이후로는 높으신 분들도 자주 이곳을 애용했다. 심지어 감찰부의 간부도 방문했지. 제도에서 여러 의미로 유명한 2과장이.
덕분에 어지간한 손님들은 아무 동요 없이 접대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감찰부의 간부도 자주 보는데, 평범한 귀족들이야 뭐.
…라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증조부께서 벌을 주신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2과장이 자기 이름을 대면 될 거라고 하더군.”
“예, 예, 물론입니다.”
나지막하게 말하는 청년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찰부를 상징하는 흑색 제복, 간부인 2과장을 편하게 부르는 저 모습.
틀림없다. 저 사람이 감찰부장이다. 예전에 2과장에게 들었던 묘사와 일치한다.
“나보다 젊은 사람인데, 온통 시꺼멓고 건드리면 피 볼 것 같은 인상이야. 그냥 보면 느낌 올걸?”
처음에는 무슨 묘사가 그러나 싶었지만, 지금 보니 그보다 정확한 설명이 없었다.
“오, 청정 사업자였나.”
주변을 둘러보던 감찰부장이 작게 탄성을 냈다.
“과분한 이름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나. 받을만해서 받은 거겠지.”
아까보다 온화해진 감찰부장의 목소리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첫 인상은 좋은 것 같다.
“그것보다 반지 좀 사려고 하는데.”
“잘 오셨습니다! 마음에 드실 물건으로 골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감찰부장의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거 잘하면 과장에 이어 부장도 단골로 만들 수 있겠다고.
***
2과장이 가게 하나를 추천했을 때, 솔직히 뒷돈 받고 추천하는 건가 싶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기 이름을 대라는 말을 하겠나.
하지만 청정 사업자 표창이 눈에 들어오자 의문이 풀렸다. 감찰부가 공인한 곳이니 감찰부 간부가 추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오히려 이렇게 밀어줘야 다른 가게들도 열심히 해서 표창 조건을 충족하지 않겠나.
“결혼 반지가 아니라면 제작 주문보다는 진열된 상품을 고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게다가 장사 수완도 제법 좋아서 마음에 들고.
“그런가?”
“예. 결혼 반지가 아니라면 결국 빼야 할 반지인데, 너무 공을 들여 만들면 신부 분이 난감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렇군.”
설득력 있는 말이라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결혼 반지라면 평생 낄 반지지만, 지금은 고백 수락 겸 약혼 반지 포지션이 아닌가. 괜히 화려하게 만들었다가 결혼 반지보다 정이 붙으면 곤란하다.
애초에 지금 마르게타가 끼고 있는 (반)지를 언젠가 빼야 하는 상황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생 낄 반지를 주면 좀.
“그리고 미리 만들기는 했지만, 결코 부족한 물건들은 아닙니다.”
그건 보면 알 것 같다. 진열된 반지들 하나하나가 화려한 디자인을 자랑했다.
“심지어 마법적 조치가 취해진 물건들이라 착용자에 맞게 크기가 조절됩니다.”
그것도 보면 알 것 같다. 링 부위에 새겨진 문양. 분명 내가 끼고 있는 반(지)와 유사한 문양이니까.
그 생각은 주인장도 했는지, 내 손가락을 향한 시선이 복잡미묘했다. 넌 도대체 뭐길래 그걸 반 잘라서 끼고 있냐는 눈빛.
하지만 금방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의 사생활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쿨함. 정말 뛰어난 상인이다.
“흠, 추천 좀 해줄 수 있나? 보석은 다이아몬드면 된다.”
“물론입니다!”
그 말에 주인장은 기다린 것처럼 백색의 반지를 보여줬다.
“이건 백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과거에 성행했던 디자인이라 구식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최근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음 반지도 나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끄덕, 다음 반지 출몰, 다시 끄덕, 다다음 반지 출몰.
열심히 보여주는 주인장에게 미안한 반응이지만, 솔직히 봐도 잘 모르겠다. 내가 패션과는 거리가 멀어서.
“전부 주게.”
그래서 주인장이 네 번째 반지를 보여줬을 때, 추천해준 반지를 전부 샀다.
“…예?”
내 정체를 알고도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던 주인장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슬며시 드는 고개,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 자기가 들은 게 맞냐고 묻는 듯한 눈빛.
유감스럽게도 맞다. 연인에게 주는 반지를 네 개나 구입하는 또라이, 그게 바로 나다.
‘시발.’
순간 자괴감이 몰려왔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반지를 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부다처가 당연한 세계니까.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개를 사는 새끼는 없을 거다. 연인을 들이는 것도 시간을 두고 하는 짓이지, 한날 한시에 들이는 경우는 없다.
“알겠, 습니다. 바로 포장해드리겠습니다.”
당사자도 자괴감이 드는 기괴한 현장. 그럼에도 주인장은 프로였는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구매서와 보증서가 있으면 환불도 가능합니다.”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