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43)
‘공녀와 먼저.’
반지를 끼고 있던 손이 떨렸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결혼 일자를 물어보니 마르게타 공녀를 언급했다. 이는 첫 부인이 마르게타 공녀라는 것.
당연한 일이다. 아가가 먼저 반지를 준 상대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아가에게 상처를 준 나와 달리 마르게타 공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니, 그러니 마르게타 공녀가 첫 부인인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나는.’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생각하기를 꺼렸던 문제가 슬금슬금 머리를 잠식했다.
첫 부인보다 격이 높은 자는 둘째 부인으로 들어올 수 없다.
첫 부인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암묵적 관례. 결혼이 임박하고 나니 이제야 그 관례가 떠올랐다.
마르게타 공녀가 첫 부인이 되면 사실상 제국의 모든 영애가 아가의 부인이 될 수 있다. 공녀보다 높은 영애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공작인 나는 공녀보다 위인 존재다.
‘차라리 나도 공녀였다면.’
그렇다면 마르게타 공녀보다 아래는 아니지만, 적어도 위도 아니다. 두 번째 부인이 될 자격으로는 충분.
평소에도 그리웠던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졌다. 만약 아버지가 지금까지도 건재하셨다면… 내 사랑도 이루고, 아버지에게도 귀여운 손주를 보여드렸을 텐데.
처음으로 공작이라는 이름이 무겁게 느껴졌다. 100년의 세월 동안 이런 적은 처음인데, 이번에도 아가는 내 처음을 가져가는구나.
이런 처음은 없어도 되는데…
‘…그래도 결혼 반지라고 했으니까.’
우울한 생각을 털어내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그래, 아가는 분명 결혼 반지라고 했다. 비록 내가 부인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결혼식을 치루지는 못하더라도 나를 부인처럼 생각하겠다는 말.
정부가 되는 건 슬픈 일이지만, 관례라는 벽이 막고 있으니─
“두 번째라 조금 걸리겠지만 이해해줘. 동시에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잖아.”
…?
아가의 말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저 말은 나와 결혼식을 하겠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이상하다. 나를 첫 부인으로 삼지 않는 이상, 아가와 결혼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가도 내가 두 번째라고 하지 않았나.
“나와 결혼, 말이니?”
“어.”
왜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머리가 멍해졌다.
‘아.’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가는 관례를 모르는구나.
하긴. 아가는 이제야 스물이 넘은 아이다. 게다가 막 성인이 되자마자 관료 생활을 한 아이. 결혼에 대한 지식이 적을 수도 있다.
“아가. 그건 불가능하단다. 두 번째 부인이 첫 부인보다 격이 높아서는 안되잖니.”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아가의 부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내 입으로 설명하는 건 참담하지만, 그래도 아가가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알아.”
“으, 으응?”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 혼란이 가중됐다.
안다, 고…?
“혹시 관례를 어길 생각이니? 그건 안돼. 그러면 바렌티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오르자 황급히 아가를 만류했다.
아가가 관례를 알면서도 나와 결혼한다는 건, 그동안 이어진 관례를 무시하겠다는 것.
그건 안 된다. 아무리 아가여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첫 부인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부인을 들인다면 바렌티 가문이, 정확히는 철혈공이 격노할 것이 분명하다.
겨우 나 때문에 아가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야 할 철혈공이 아가와 적대하게 둘 수는 없다. 내 욕심만 접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지 않나.
“너도 관례에 걸려?”
하지만 내 만류에 아가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 격, 그냥 가문 기준 아니었어?”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공작가 사람끼리는 동격인 줄 알았는데.”
그야 동격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작과 공녀를 동급으로 보기는 힘들다.
“첫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전부 백작 영애인 경우도 있었잖아.”
있다. 오히려 많은 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부인이 백작 영애가 아닌 백작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아니, 정말 불가능할까?
‘전례가 없기는 한데.’
아가의 말에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확실히 같은 격을 지닌 가문의 영애가 나란히 부인으로 들어온 경우는 많다. 그러니 나와 마르게타 공녀를 작위 유무를 떠나 같은 공작가 인물이라고 치면 동격이라고 칠 수 있다.
이 가정을 부정하려면 작위 보유자와 일개 영애가 한 사람의 부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전례가 없다. 작위 보유자가 뭐가 부족해서 여러 부인 중 하나가 되겠는가.
“…아니야?”
“아니, 맞단다. 아가의 말이 맞아.”
조심스레 되묻는 아가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사실 억지다. 너무 편의주의적인 해석이다.
그래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다. 관례를 어기는 게 아니라, 다르게 해석하는 것 정도는 시도하기에 충분하다.
‘역시 아가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길을 만들어 낸 개척자. 나도 정식 부인으로 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반려.
안 그래도 사랑스러운 아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
칼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그 집사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걸을 때마다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집사의 안내는 손님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미래의 안주인, 그중에서도 첫 부인에게 저택을 소개하는 절차였으니까.
‘훌륭해.’
집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번 여름부터 느낀 거지만,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정말 훌륭했다.
사실 저택에 들어왔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주인인 칼 없이 손님만 온 상황에 당황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 집사는 완벽히 접대했다.
정문을 통과하자 성대하게 환영해주는 사용인들. 특히 맨 앞에서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집사의 모습은 손님을 넘어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 같았다.
지적할 거 하나 없는 정중함에 편히 행동해도 된다고 했지만, 내 반지를 본 집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비록 부족한 게 많은 몸이지만, 눈과 귀가 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찌 만류할 수 있겠나. 역시 칼이 엄선한 사용인들이라 그런지 너무나 뛰어나다.
“마님이 되실 레이디들을 모시려니, 조금 긴장되는군요.”
심지어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도 고려하여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는 두 영애를 배려한 말.
센스도 있다. 칼이 믿고 저택을 맡기기에 충분하다.
“혹시 저번에 머무르신 곳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그곳으로 안내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렇게 시작부터 손님을 기쁘게 만든 집사의 안내를 받아 머무를 방에 도착했고, 짐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이는 집사.
“괜찮으시다면 저택의 시설을 안내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에게 저택의 시설을 상세히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이제 보물고만 남았습니다.”
“그런가요? 기대되네요.”
상념을 깨는 집사의 말에 부드럽게 대답했다.
벌써 저택을 돌고 돌아 마지막 장소만 남았다. 정말 넓은 저택이지만, 정작 칼이 활용하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돌 수 있었다.
“이런, 안타깝게도 바렌티 공작가에 비하면 부족한 수준입니다.”
“후후. 바렌티의 보물고는 300년 동안 이어졌지만, 여기는 칼이 몇 년 사이에 쌓은 거잖아요?”
자부심이 느껴지는 집사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크라시우스의 보물고도 아닌 칼의 개인 저택에 위치한 보물고다. 그런 보물고의 비교 대상을 바렌티의 보물고로 삼았다면, 평범한 보물고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는지 집사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보물고 문을 열었다.
‘세상에.’
칼의 보물고를 보자마자 집사의 자부심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무인인 칼이 좋아할 것 같은 무구, 여러 빛깔을 자랑하는 보석, 화려한 의복과 옷감, 그 외 다양한 보물들.
양이 많은 건 아니지만 종류는 다양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품질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작지만 알찬 곳이다.
“대토벌 전쟁의 전리품, 황실의 하사품, 여러 포상들이 쌓이고 쌓여 이 보물고가 만들어졌습니다.”
심지어 보물고를 채운 과정도 범상치 않았다. 오직 능력으로 얻은 보물.
“대단하군요.”
“정작 주인님께서는 관심을 두지 않지만 말입니다.”
아쉽다는 듯 덧붙인 집사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래. 칼이 워낙 검소해야 말이지. 옷도 감찰부 제복 정도만 입고 돌아다닐 정도잖아.
‘저렇게 좋은 옷들이 많은데.’
한쪽에 몰려있는 온갖 예복. 저 중에 아무거나 입어도 문제가 없을 텐데.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