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54)
매일 시달리는 두통에 잠시 미간을 짚은 사이, 차장이 다가와 얇은 서류 뭉치를 제출했다.
‘감찰부.’
반가운 곳에서 온 자료이기에 슬쩍 입꼬리가 올라왔다. 사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감찰부는 인외마경의 끝을 달리던 곳이었는데.
“푸흐─”
가장 위에 있는 감찰부장이 작성한 평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온갖 덕담과 찬양으로 가득한 평가. 평가서만 본다면 세상에 둘도 없을 장관이자 인격자. 허위 찬양도 3번 연속으로 보면 오히려 즐거운 법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든 지금 장관을 붙잡고 있겠다는 절절한 의지, 그리고 누가 봐도 허위 작성이기에 대가를 받고 싶다는 뒤틀린 다짐.
재미있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평가서를 보다 이런 투박한 걸 보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다.
심지어 감찰부장만 그러는 게 아니라 부하들도 마찬가지.
[ 감찰부장은 언제나 앞장서며 부하들의 과실을 온전히 책임지고 다독여주는 인격자─ ] [ 상사에게 깍듯하고 부하들에게 상냥하다. 무리한 지시는 거부하고 합당한 명령을 내린다. ] [ 한 말에 책임을 지고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책임 회피를 위해 꼬리를 자르지 않는다. ]“크흐…”
에이만카 대제의 건국 일대기도 이렇게 찬양 일색이지는 않을 거다.
차장은 물론 과장들의 열렬한 칭찬 세례에 당사자가 아닌 나조차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 그리고 그 칭찬 속에 숨긴 검은 음모에 다시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감찰부장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평가서니까.
“젊은 나이에 부장이 되어 우려가 많았으나, 훌륭히 부서를 이끄는 것 같아 실로 안심이다.”
감찰부에서 보낸 평가서를 본 폐하께서는 그 말을 끝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 감찰부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임이라는 암묵적 표현.
“인사부장. 조금이라도 업무가 줄면 편하지 않겠나. 감찰부에서 보낸 평가서는 신경 쓰지 말게.”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감찰부의 현상 유지에 대한 의지가 굳건하시다.
그렇기에 감찰부의 평가서는 인사 이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감찰부장이 안타까울 뿐.
‘다른 부서도 이랬으면 좋을 텐데.’
과한 욕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뭐 어떤가. 꿈꾸는 건 자유지 않나.
아무튼 고작 글로 사람을 웃기는 것도 재능. 내년에는 어떤 평가서가 올지 기대된다.
***
부대장이 무언가 열심히 작성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말 인사 평가 기간이니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부대장이 할 말이 많다면 내가 부족하다는 의미니 부대장을 탓할 게 아니다.
대원들이 부대장과 속닥거리는 걸 볼 때는 내가 그 정도로 부족했나 싶었지만, 애써 넘어갔다. 내 부족함으로 불만을 품었을 대원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화를 냈어야 했다.
“부대장.”
“예.”
“이건 뭐지?”
비장한 기색이 가득한 부대장이 건넨 종이. 그 종이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감고 말았다.
“묵광대 전원의 총의입니다.”
그리고 거창한 선포에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총의라니, 이런 문서에 총의라는 단어를 붙여도 되는 건가.
“저를 비롯한 모든 대원들의 충심입니다.”
“이게 어딜 봐서 충심─”
“충심이 아니라면 가족의 애정이라고 봐주십시오.”
그 말에 입이 닫히고 말았다.
비겁하게 거기서 가족을 운운하다니. 그러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지 않나.
“한 번, 딱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렇게 나오니 어쩌겠나.
…그래, 부하로서 상관에게 올리는 충언, 가족으로서 표현하는 애정이라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
그렇기에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부대장이 준 종이를 읽었고─
[ 묵광대 부대장 주세페 디고를 포함한 모든 묵광대원들은 묵광대 대장 페넬리아 유스에게 정식으로 청합니다.감찰부장님의 은혜를 받아 새롭게 태어난 것이 어언 수년 전. 그 은혜는 실로 수십 번을 다시 태어나도 갚을 수 없으나, 그렇다고 보답을 포기하는 것은 짐승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대장께서 감찰부장님을 은혜에 보답할 대상이 아닌 그저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니 어찌 통탄치 않겠습니까.
지금 대장─ ]
얼마 읽지 못하고 도로 눈을 감고 말았다.
“대장.”
하지만 부대장은 눈을 감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보답의 이유가 보답이어서는 안됩니다. 부장님과 저희의 관계를 그저 철저한 주종으로만 간주하는 건 슬픈 일 아닙니까.”
“…….”
“물론 저희는 기꺼이 그분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부장님이 그 너머를 원하시는데, 보답이라는 이유로 가만히 있는 것도 실례입니다.”
드물게도 진지한 부대장의 말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반박해야 한다. 부대장이 말한 것처럼 받은 은혜가 많다. 철저히 보답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감히 부장님에게 친근히 다가가는 건 분수를 모르는 일이다. 분명 그럴 거다.
“보답을 하고 싶다면 부장님이 뭘 원하는지 생각하십쇼. 대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자기 만족입니다.”
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부대장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죄책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꼈다. 주인님을 위한 보답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주인님이 아닌 나를 먼저 생각했다는 자괴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평생을 주인님을 위해서 살아가도 부족한 판국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께 은혜를 받아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답하기 위해 보답한다는 기괴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언제부터 이런 거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 스스로도 속이며 살아온 걸까.
물론 주인님을 위한 충성과 경애는 굳건했다. 설령 내가 잘못된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만일 그것조차 비틀렸다면 내 눈과 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기에.
하지만 부대장의 말처럼 나는 자기 만족에 빠졌었다. 그렇다면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다를 게 무엇인가.
“보답은 보답을 받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결정하면 그건 보답이 아니라 생색입니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자 부대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봐주지 않고 휘몰아치는 것이 실로 4과다웠다.
그 4과다움을 나한테 뽐내는 것이 서글픈 일이지만.
“대장님은 부장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다. 설령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
그래도 지금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주인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거나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을 거다.
그러니 주인님이 주신 생명과 인생. 그것을 도로 가져가시겠다면 기꺼이 드릴 수 있다.
“그럼 부부가 되는 건 어떻습니까?”
“그, 그건…”
다시 자신감이 사라졌다. 무엇이든 할 각오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 아닌가. 나 따위에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다.
나는 그저 주인님의 그림자, 주인님 곁을 떠도는 개로 충분하다. 그 이상 다가가면 찬란한 그분을 더럽히는 꼴이지 않나.
“그건 부장님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그걸 결정하는 건 부장님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평민 출신인 내가…”
“부장님이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을 분입니까?”
내가 아는 걸 주인님이 모를 리가 없다.
결국 부대장의 맹렬한 공격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덫에 걸렸다. 무슨 말로 반박을 하든 효과가 없다. 너무 과분하다고 하면 그걸 결정하는 건 주인님이라고 할 거고, 불가능한 이유를 말하면 주인님이 그것도 모르겠냐고 할 터.
“저는 부장님이 결혼을 원하신다면 성별도 바꿀 의향이 있습니다.”
그 말에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부대장의 의지가 파괴적이어서? 아니. 어차피 바꿀 일이 없다고 막 얘기하는 것이 얄미워서.
주인님이 부대장에게 청혼을 할 일이 없으니, 어차피 성별을 바꿔야 할 일도 없으니 말만 하는 거다. 부대장 입장에서는 나만 설득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그럴 수고를 거칠 필요도 없는 대장님은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 뒤로도 부대장은 한참이나 떠들고, 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심지어 겨우 부대장에게 탈출한 뒤로는 만나는 대원마다 잔소리를 시작했다.
‘…파견을 다시 가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북방이 아니더라도 갈 곳은 많지 않을까.
***
평가서에 장관어천가를 작성하고 실물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산타클로스가 아빠라는 걸 깨달은 어린 아이가 대충 이런 기분이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 더하겠지. 적어도 아이 입장에서는 아빠도 소중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니.
“왜 그렇게 보냐?”
“오늘도 건강하시다 싶어서요.”
씁쓸하다. 사실 평가서에 적힌 장관어천가는 단순히 좋은 말만 쓰기 위해서 적은 게 아니다. 나도 그런 상사를 두고 싶다는 무의식을 표현한 하나의 예술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아무리 예술 활동을 해도 잔혹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직속 상관만 아니라면.’
오늘만큼 부장이라는 자리가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차라리 과장이나 팀장 나부랭이였다면 장관 가챠라도 노렸을 텐데. 지금 장관 가챠를 돌리면 100% 내가 후임 장관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