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55)
생각해 보니 황태자가 나를 부장으로 올리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구나. 시발, 역시 내 인생에 뭔가 잘못된 게 있으면 절반은 황태자 때문이다. 나머지 반은 카간이고.
“왔으면 앉아라. 정신 사납게 서있지 말고.”
“예.”
제일 정신 사나운 건 집무실 한가운데에서 운동하는 사람 같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아, 평가서 제출했냐?”
덤벨을 구석으로 던진 장관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의외다. 저 양반도 남의 평가를 신경 쓰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짓이 워낙 파괴적이라 그런 거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걱정 마십쇼. 세상에 둘도 없을 성인처럼 썼습니다.”
그래서 안심과 신뢰의 따봉을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장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 평가서를 보면 장관을 다시 보게 될 거다. 보기와는 달리 부하들을 사랑하는 참된 상사라고.
그러나 장관은 부하의 성의에도 불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발 평소 나한테 하는 말의 절반이라도 적어라.”
“제가 미쳤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기에 단호히 대답했다.
내 손으로 장관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운 행동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 1초라도 장관이 나보다 빨리 은퇴하는 꼴은 볼 수 없다. 내가 부장이면 당신도 평생 장관이야.
“징한 새끼.”
결국 장관은 극찬을 날리며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장관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터. 이미 나나 장관이나 평가서 하나로 목이 잘릴지 아닐지 고민할 단계는 지나고 말았다. 그냥 혹시나 하는 희망만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아무튼 장관이 자리에 앉자마자 슬쩍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통신으로 정기 보고도 했고, 지금 시즌에는 딱히 중요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장관이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같은 살가운 짓을 할 사람도 아니고.
“북방 소식 때문에 불렀다.”
그 말에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장관 쪽으로 기울였다.
“뭐 나온 거라도 있습니까?”
의외의 발언이라 절로 관심이 갔다. 분명 4과장이 한 말을 들어보면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복귀한 것 같았는데, 장관이 언급할 정도면 무언가 나왔다는 것 아니겠나.
“아니. 아무것도.”
?
‘이 시발.’
그럼 난 왜 부른 거야.
“너무 없어서 오히려 이상하지. 특무성이 총력을 다해서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빡침이 가라앉았다.
나온 것이 없는 것과 성과가 없는 건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중요한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도 흔적 정도는 찾기 마련. 그조차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북방이 넓다고 하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제한적이다. 역천자의 잔재가 어디 만년설산에 은거 중이라면 모를까.”
“그 새끼가 은거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문제지.”
역천자의 잔재, 팔준마 중 유일한 생존자인 우데스르 도르곤.
마지막 전투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도주한 그 새끼 때문에 특무성은 아직도 북방을 구르는 중이다.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은 놈이 복수도 포기하고 은거 중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초원의 전사들이 네놈들이 채운 기만의 목줄을 풀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날! 우리가 개에서 늑대가 되는 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애초에 그딴 말을 남기며 사라진 놈인데 잠수타는 것도 웃기지 않나. 역사에 남을 떡밥만 남기고 잠적한 맥거핀. 여러 의미로 전설이다.
“놈에게 협력하는 부족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것도 한둘은 아니야.”
“끔찍하군요.”
은거도 아니면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건 흔적을 이 악물고 지우며 감추는 세력이 있다는 것. 제국의 추격을 피하는 건 결코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이미 2과장이 차우지드 부족과 조우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장관 말처럼 부족 한두 개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거머리도 아니고.’
답답한 심정에 마른 세수를 했다.
이미 극렬한 반제국 부족들은 카간과 함께 저승행 편도 열차를 탔다. 그런데 아직도 카간의 아들한테 협력하는 놈들이 있다고? 이 새끼들 어디서 리스폰 되거나 그런 건가?
“그래도 당장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 거다. 북방의 겨울은 원주민들도 못 버티는 시기 아니냐. 빨라도 여름은 돼야 이변이 보일 거라는 게 특무성의 판단이다.”
그래도 긍정적인 소식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토벌 전쟁 중에도 겨울은 암묵적인 휴전 기간이었다. 카간도 겨울에는 본진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을 정도. 뭣도 모르고 싸돌아다니면 북방의 칼날 바람에 갈기갈기 찢길 뿐이다.
“뭐, 너도 알아두라고 불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건데─”
그렇게 말한 장관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중요한 거?’
그런 장관을 보자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다. 도르곤의 행방보다 중요한 안건이 있다고? 어떤 미친 시체 애호가가 카간을 부활시키기라도 했나?
아니, 이미 카간 시체는 불에 태워서 일으킬 것도 없을 텐데?
“청첩장이다.”
“…예.”
장관의 품 속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아기자기한 물건. 상상도 못한 물건의 등장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망할.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몸은 안 와도 되지만 축의금은 무겁게 보내라.”
“아니, 보통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하지 않습니까?”
“반지 다섯 개 낀 놈이 새신부 결혼식에 얼굴 비추면 부정 타지 않겠냐.”
시큰둥한 장관의 말에 무심코 왼손을 보고 말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반(지) 다섯 개. 마치 누가 보면 일부다처를 장려하는 것 같은 모습.
‘시발.’
확실히 제도의 카사노바로 유명했던 2과장 결혼식에서 보일 모습은 아니다. 괜히 자극 받아서 신혼을 즐기기도 전에 두 번째 부인을 들이면 할 말이 없다.
결혼식에 참석한다면 반지 위에다가 장갑을 끼고 가야 하나…
장관의 소환술에 응한 이후로는 평온하고 무난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사실 도르곤의 행방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한겨울에 북방으로 갈 수는 없지 않나. 애초에 재무성 소속인 내가 북방으로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감찰부 1년 업무 종합은 부장 대리로 열심히 일한 차장이 끝냈고, 인사 평가서도 장관어천가를 작성했다. 내가 해야할 일은 전부 처리한 상황.
그나마 신경 써야 할 사안이 있다면 다른 부서의 1년 예산이 제대로 쓰였나 감찰하는 정도인데, 이것도 내가 없는 사이에 차장이 미리 처리했더라.
‘부하 하나 잘 두니 이렇게 편하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차장이 제출한 서류를 훑어봤다. 만약 차장이 없었으면 감찰부는 진작에 망했겠지. 내 공무원 생활 중 최고의 선택은 일개 팀장이었던 차장을 차장으로 끌어올린 거다.
만약 내가 승진하게 되면 차장은 꼭 장관 비서로 데려가자. 이제 난 차장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돼버렸어.
대신 부장, 차장이 동시에 공석이 되면 어떻게 채울지가 관건인데─
‘알아서 하겠지.’
솔직히 내 알 바냐. 상남자는 떠난 자리를 뒤돌아보지 않는 법.
게다가 파격적, 이라는 이름의 통수 인사 명령이 주특기인 황태자 아닌가. 알아서 잘 할 거라 믿는다. 여차하면 3과장이나 5과장을 승진시킬 수도 있고.
‘…3과장이 부장.’
순간 부장 자리에 앉은 민머리 거구를 떠올리고 말았다. 감찰부가 아니라 마피아라고 해도 믿을 비주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미래다.
다시 생각해 보니 3과장만큼은 안된다. 지금도 3과장하고 같이 다니면 행동대장을 대동하고 다니는 보스가 된 것 같은데, 마피아 부장을 데리고 다니는 장관?
‘누가 봐도 흑막이네.’
헛웃음과 함께 무심코 눈가를 매만지고 말았다. 만약 내가 실눈이었으면 완벽한 흑막이었겠지.
– 똑똑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던 도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부장님. 차장입니다.”
“차장?”
“예, 부장님.”
문 밖에서 들리는 차장의 목소리. 의외의 방문자라 누군지 밝혔음에도 되묻고 말았다.
아니, 서류 제출하고 돌아간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와. 제출할 서류가 더 있었나?
“들어와.”
물론 기껏 찾아온 차장을 돌려보내는 것도 이상하니 들어오라고 했다. 차장이 다시 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무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차장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단 빈손. 추가 제출할 서류가 있는 건 아니다.
‘표정도 나쁘진 않고.’
평온한 얼굴을 보니 긴급 사태가 터진 것도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긴. 갑자기 일이 터졌다면 차장이 오기도 전에 내 통신구가 번쩍번쩍 빛났겠지만.
“그래. 무슨 일이야?”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가볍게 물었다. 빨리 듣고 차장도 돌려보내야지. 나보다 바쁜 게 차장일 텐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의외의 말인지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연말 손님?
어차피 나를 찾아올 정도의 인물이면 신년하례식에 참가할 수준의 인물이다. 굳이 만나기 쉬운 시기를 두고 연말에 조기 접촉을 하는 경우는 드문데?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