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59)
“2학년으로 입학하기로 했어. 1학년 생활이 날아간 건 아쉽지만─”
혼란에 빠진 내 손을 세라가 슬며시 잡았다. 그리고 배시시 웃는 것이 마치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것 같았다.
“에리히보다 후배면, 에리히랑 떨어지는 시간이 생기는 거잖아. 그런 건 싫어.”
“…그런 거면 내가 방학 때 매일…”
“싫어. 난 에리히랑 같이 추억을 만들고 싶은 거야.”
지금은 세라가 조금 원망스럽다. 왜 이럴 때는 단호한 걸까.
“걱정하지 마. 마법사도 사제도 전부 괜찮다고 했어. 아직 완치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 하는 것 정도는 해도 된대.”
게다가 비겁하게 전문가의 의견도 동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반대할 명분이 없잖아.
“그리고 기사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가장 믿으면 안 될 사람인데.”
그 말에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완벽한 명분으로 반대를 막아놓고 마무리가 어설프다.
난 세라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도, 굳건하지도 않은 일개 영식에 불과하다. 너무 과분한 믿음이라 머쓱할 지경인데.
“왜? 혹시 다른 레이디를 섬기는 중이야?”
하지만 은근히 서운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뻔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민망하게도 섬기는 사람 없는 편력 기사다.
…뭐, 사실 다들 괜찮다고 하는데 혼자 반대하는 것도 웃기지. 게다가 홀로 쓸쓸히 지낸 세라가 드디어 세상 빛을 보겠다는데, 친구로서 축하하지는 못할 망정 방해를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슬쩍 손을 내밀었다. 세라가 기사를 원한다면 그 정도 역할이야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레이디. 기사 잘못 고르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요.”
“후후, 나하고는 상관없는 말이네?”
가끔 보면 나보다 나를 더 믿는 것 같다.
***
에리히가 떠난 후, 한참이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면 레이디. 2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정말 동화에 나오는 기사님처럼 내 손등에 입을 맞춘 에리히. 아마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었다면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세라를 지키는 기사가 될게! 천사가 세라를 데리러 오면 내가 쫒아낼 거야!”
그리고 8년 전, 병세가 절정에 이르던 나에게 9살에 불과했던 에리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손등에 입을 맞춘 에리히에게서 그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물론 어린 아이의 치기 어린 말이다. 하지만 그 치기 어린 말이 내가 포기하지 않고 버티게 만들어준 구원의 말이었다. 심지어 에리히도 그때 한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동심 가득한 표현이라 크고 나서 생각하면 부끄러운 거지.
“평생 지켜도 되는데.”
오른손을 매만지며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치사하게 2년이 뭐야. 내 평생을 지켜주면 덧나나? 어차피 크라시우스 가문은 칼 오빠가 이을 텐데, 에리히는 나 하나만 봐줘도 되잖아.
“바보.”
그래도 좋아. 그 바보 같은 모습도 에리히의 일부니까.
‘…다행이야.’
그리고 뒤늦게 안도감이 몰려왔다. 만약, 만약 에리히가 마음에 품은 상대가 있었다면 도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만의 기사님, 평생을 함께 할 기사님. 오직 그것만 보고 버틴 세월인데,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다른 레이디가 내 기사님을 낚아챘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다.
‘에넨께서 보살폈구나.’
하지만 에리히가 아카데미에 있던 1년. 다행히 누구도 에리히를 채가지 않았다.
정말 에넨께서 보우하신 일이다. 비록 에넨께서 나에게 병을 주셨지만, 그 대가로 누구보다 소중한 인연을 주셨으니까.
‘얼마 안 남았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날짜를 계산했다. 두 달, 앞으로 두 달 정도만 지나면 나도 아카데미에서 생활한다.
분명 제과 동아리라고 했으니 나도 거기에 가입하자. 만약 반이 다르더라도 동아리가 같으면 자주 볼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같이 학창 생활을 보내고, 평소보다 더 자주 보고, 정도 더 들고…
‘후후…’
행복하다. 아마 내 생 최고의 2년이 될 것 같다.
역사적으로 대륙의 중심은 제국이었고, 제국의 심장은 제도다. 그렇기에 제도는 그 시대 대륙을 대표하는 곳이자 천명을 상징하는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며, 오늘날 제도인 아우스엔 역시 빛이 사라지지 않는 불야성, 번영을 상징하는 영광의 도시다.
연말은 그런 제도가 특히 활발해지는 시기다. 제국의 모든 작위 귀족들이 신년하례식을 위해 모이고, 귀족들을 수행하기 위한 인원도 몰리며 안 그래도 북적거리는 제도는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단순히 사람이 늘어나도 여파가 올 수밖에 없는데, 그 늘어난 사람이 귀족과 수행원이라는 큰손이지 않나. 당연히 큰손의 대거 유입으로 제도의 상인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된다. 긍정적인 의미의 소란스러움.
덩달아 고요하던 귀족 저택 지구도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온기를 되찾는다.
“제도에 오자마자 보는 사람이 감찰부장이라니, 기쁜 일이로군.”
바로 지금처럼.
“각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얼굴에 행복이라는 글자를 써넣은 것 같은 이오네스 후작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더욱 좋아했고.
‘이걸 이렇게 만나네.’
연인의 저택에서 예비 장인 어른과 만나게 된 미묘한 상황. 하지만 이게 후작의 기습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과장이 개인 저택처럼 사용하는 마살로 가문의 저택이지만, 어디까지나 저택의 주인은 가주인 이오네스 후작이 아닌가. 저택에 주인이 찾아오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
문제는 예정에 없던 만남이라는 것이다. 1과장이 아무 말도 없길래 당연히 나중에 오는 줄 알았는데, 설마 오늘 올 줄은 몰랐지.
‘이상한 꼼수를.’
슬쩍 1과장을 쳐다보자 1과장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저택에서 식사라도 하자고 떼를 쓰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던 거냐.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확실하다. 분명 후작이 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던 거다. 혹시 후작이 오는 걸 알면 내가 초대를 거절할까 봐 그랬겠지. 애초에 1과장 성격상 점심 데이트를 방해 받으면 길길이 날뛰며 후작을 쪼았을 테고.
‘알았어도 상관 없는데.’
의미 없는 계략을 펼친 1과장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어차피 신년하례식 때 만날 사람을 조금 빨리 만난다고 문제될 것이 있겠나. 만약 후작이 철혈공처럼 나에 대한 언짢음이 가득한 상태라면 모를까, 후작과는 딱히 어색한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우호 관계라고 봐도 무방하지.
사적으로는 딸의 상관, 공적으로도 후작가 중 필두였던 애실론 후작가를 개박살 낸 기특한 관료. 애실론이 박살나며 흘린 이권을 마살로 후작가가 알차게 파밍했었으니 얼마나 예쁘게 보이겠나.
“어때요? 예비 사위를 보니 반갑죠?”
그리고 침묵을 지키던 1과장이 은근슬쩍 나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후작 입장에서는 눈 앞에서 소중한 딸이 웬 도둑놈과 애정을 나누는 것이지만, 후작의 표정은 온화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일생의 소원을 이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우리 딸이 드디어 짝을 찾은 걸 보니 목이 메이는구나.”
그 진심 가득한 말에 나는 물론, 당사자인 1과장마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짧은 한마디지만 그 안에는 그동안 후작이 했을 마음 고생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감정이 없는 냉혹한 전투병기도 그 말을 들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사실 그럴만하다. 21살인 나도 혼인 적령기 끄트머리에서 탭댄스를 추는 판국인데 1과장은 오죽하겠나. 아마 후작은 1과장이 스물을 찍었을 때부터 속이 타들어갔고, 지금 나이에 도달했을 때는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러다녔을 거다.
심지어 적령기를 돌파한 딸의 직업이 감찰부? 아마 비참한 심정과 별개로 머리로는 결혼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동안 짝이 없어 걱정이 많았는데, 감찰부장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다면 그럴 수 있지. 아암, 그럴 수 있어.”
그러나 지금의 후작은 그 비참함과 걱정, 해탈을 모두 날린 것 같았다. 비록 딸이 애인 없이 지낸 시간이 길었지만, 그 시간이 SSR급 남편을 구하기 위한 존버였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웃어넘길 수 있는 것처럼.
“고맙네, 감찰부장. 내 부탁을 잊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워.”
“예?”
감정에 북받쳤는지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은 후작의 말에 절로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부탁? 후작과는 만날 일이 극히 드물어서 부탁을 받은 적도 없는데. 기껏해야 딸을 잘─
…?
‘아니 설마.’
그 잘 부탁한다는 게 상사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말한 거였나.
“내 비록 부족할 거 없는 삶을 살았지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건 저 아이였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작은 내 반문을 신경 쓰지 않고 아비의 심경을 토로했다. 후작이라는 고귀한 위치, 번영하는 가문, 장성하고 성실한 자식들. 그러나 유일하게 짝을 찾지 못한 딸을 향한 걱정.
그 눈물 겨운 호소에 1과장마저 눈을 내리 깔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도 1과장… 가족이 자기를 아끼는 건 아는지 가족에게는 약하구나. 다른 사람이 저랬으면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거라며 한 귀로 흘렸을 텐데.
“첫 부인이 아니라는 건 아쉽지만, 저 아이한테 부족함 없이 대해줄 거라 믿네.”
“믿음에 부응하겠습니다.”
그 말에 후작은 가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몇 번이나 토닥였다.
낯설다. 매운맛 장인 어른인 철혈공을 보다가 순한맛을 보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앞으로 둘.’
그리고 본능적으로 떠오른 다른 장인 어른(본 적 없음)의 존재에 눈을 감을 뻔했다. 나와 접점이 하나도 없는 남작 장인 어른, 접점은 있지만 그 접점이 멸문 미수인 백작 장인 어른.
이번 신년하례식은 많이 화끈하겠네.
사위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후작 덕분에 두 손 무겁게 돌아가야 했다. 사실 선물의 사이즈는 작았지만 그 가치가 무겁더라. 후작가 1, 2위를 다투는 가문이라 그런가, 무슨 앉은 자리에서 땅문서를 넘기냐.
철혈공도 지갑이 터질 정도로 혼수를 욱여넣었는데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는 부동산으로 마음을 표시하는 건가 싶다. 조금 무서운 유행이네. 내 자식들이 결혼할 때가 되면 모은 거 다 털리겠다.
“사랑받는 사위라 다행이지 않나요?”
“직책이 직책이라 그런지 조금 눈치가 보입니다.”
살포시 미소를 지은 마르게타의 말에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래도 조금은 진심이다. 감찰부의 책임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친구비를 받은 적은 많지만, 그건 보통 전달 과정을 꼬고 꼬아서 수령할 수 있는 친구비다. 이렇게 다이렉트로 받은 적은 극히 드물지. 그래서 뭔가 받으면 안 될 걸 받은 느낌이다.
그나마 철혈공에게 혼수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철혈공에게 받은 전례가 없었다면 장인 어른의 호의를 부담감에 거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후후, 익숙해져야죠. 듬직한 사위한테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은 게 장인과 장모의 마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이젠 처부모가 넷이니 각오해야 하지 않겠냐.’ 라고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래도 마르게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정말 대놓고 해쳐먹는 비리가 아니라면 혈연끼리 이것저것 오고 가는 것이 관례다. 일이 생기면 가족에게 눈이 가고, 좋은 걸 얻었으면 가족에게 챙겨주고 싶고─ 대충 그런 거.
“예, 그래야죠. 저도 관료이기 이전에 귀족이니까요.”
황명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는 공무원이 아니라 가문과 영지의 이득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귀족.
공무원이라는 명함은 뗄 수 있… 아니, 솔직히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후천적인 것에 비해 귀족이라는 명함은 타고난 것 아닌가. 나도 크라시우스라는 성이 붙어 있으니 귀족식 결혼 생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칼이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말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