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63)
황제가 노망이 들지 않은 이상 아인테르를 내세워 2차 계승권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다. 황태자의 표정도 평온─ 아니, 미미한 피곤에 찌든 것을 보니 썩 불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계승권 분쟁이 아니고, 황태자도 용납했다. 그러면 2황자의 동복동생이라는 이유로 숙청의 위기를 달고 살던 아인테르가 평범한 황족으로 복귀했다는 뜻. 아인테르의 고문인 입장에서는 기꺼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일이 꼬여서 아인테르를 죽일 이유가 사라진 게 아닌가.
“그간 제국은 여러 소란을 겪었으나, 그 소란 역시 무궁한 제국 역사의 한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선대부터 쌓은 유산과 그대들의 충정은 제국이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눈치 챈 황실의 변화를 다른 귀족들이 모를 일은 없을 터. 은근히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도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제국은 굳건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곳을 쳐다볼지언정, 제국은 쓰러지지 않는다. 설령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더라도 빠르게 올바른 길을 찾을 것이다.”
짧지만 직설적인 신년사. 그 말에 조금 술렁이던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야 황제가 한 말은 넘치는 자신감과 은근한 경고를 담고 있었으니까.
역천자에게 명치를 처맞고, 2황자의 개지랄 때문에 제국의 손실이 이만저만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회복했다는 선언. 아직 북쪽에 역천자의 자식이 남았지만 문제 없다는 자신감.
그러나 이 모든 건 제국의 일치단결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만약 과거 2황자파처럼 주춤거리는 수준을 넘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개박살을 내주겠다는 경고.
‘살벌하구만.’
보는 사람의 심장이 타오를 정도로 화끈한 신년사에 귀족들은 감동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정치인의 상징인 우회적 화법. 그 끝판왕인 황제가 저리 투박하게 말했다면 그건 작정하고 말했다는 뜻이니. 앞으로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귀족이 있다면 순식간에 뚝배기가 깨질 것이다.
“짐이 할 말은 끝이다. 태자는 귀한 시간을 낸 충신들을 위해 자리를 지키라.”
“예, 폐하.”
신년사를 끝낸 황제는 황태자에게 자리를 맡긴 후 몸을 돌렸고, 그 모습에 다시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황제가 일선에서 물러난 건 다들 알고 있다. 작위 다수를 넘긴 것도 방금 궁내성 장관 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신년하례식에서 신년사만 하고 자리를 비우는 건 별개의 문제다. 모든 작위 귀족들이 모이는 1년에 한 번뿐인 자리.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않고 황태자에게 넘긴다는 건 자신이 남을 필요가 없다는 뜻.
“…길어도 3년이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양위의 징조다. 그것도 상당히 임박한 양위.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는 무조건 터진다.
“내년일 수도 있다.”
다행히 혼자만의 설레발은 아니었는지, 조심스레 장관에게 묻자 장관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프다. 황제가 업무나 작위를 하나둘 넘기는 걸 보고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런 붕어로 황위가 넘어갔을 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대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번 퍼포먼스로 그 사람들도 생각을 바꿀 거다. 이건 양위각이라고.
‘망했네.’
어쩌지 이거. 양위 선언하면 부장급 관료 이상은 통촉해달라고 대가리 박아야 하는데. 어차피 양위로 마음을 굳혔어도 몇 번은 만류하는 게 이 기괴한 세상의 관습이라.
미치겠다. 원작 작가가 유교-휴먼이라 그런지 이상한 곳에서 유교 흔적이 보여…
황제가 귀족들에게 대형 폭탄을 3연속으로 날리고 사라진 후, 귀족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황위 계승이 코앞으로 임박한 황태자에게 달려가 조금이라도 눈도장을 찍으려는 귀족들, 이름만 3황자에서 진짜 3황자로 진화한 아인테르와 적당히 연을 쌓으려는 귀족들, 마지막으로 황족이 아닌 귀족끼리 어울리려는 귀족들.
나는 그중에서 맨 후자였다.
“죠오오옷─ 캬아아아아! 직쩝 보눈건오랫마니야!”
“예,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으히히힣, 그치? 방갑찌?”
아뇨, 전혀요.
목 끝까지 치솟은 말을 도로 삼키며 눈 앞의 주정뱅이를 쳐다봤다. 신년사도 끝났으니 공작이 돌아가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텐데, 하필 나한테 들러붙냐.
착잡한 심정으로 현명공을 보다가 옆에 있던 남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외숙부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옆에 있는 광폭화 주정뱅이와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살론 공작가의 부군, 어머니와 같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내 외숙부─ 지만 스트레스를 절찬리에 받고 있는지 흰머리가 조금 보였다.
안타깝다. 놀랍게도 정략이 아닌 연애로 결혼한 사이지만, 그 넘치는 사랑도 저 꽐라공을 이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기에 아내의 주정에 더욱 안타까워 하는 걸 수도.
‘누가 이 사람을 말리겠나.’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키는 현명공. 분위기를 보니 신년사가 끝난 후가 아니라 그 전부터 저 꼴이었던 것 같다. 공작이 가장 앞에서 신년사를 듣는 걸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명공의 음주는 황제도 막지 못하는데 어쩌겠나.
과거, 현명공의 미친 음주를 보다 못한 황제가 잔을 하사하여 하루에 한 잔만 마시는 걸 권한 적이 있다. 물론 작은 걸 주면 잔을 늘려서라도 마실 위인이라는 걸 알기에 꽤 큰 사이즈를 줬지만, 그 사이즈만큼만 마신다면 평소보다 덜 마시는 거였다.
그러나 그날부터 현명공은 병째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당연히 기함을 한 황제는 ‘너 이 새끼, 드디어 뇌가 알코올에 담긴 거냐?’ 라는 말을 잘 포장해서 말했고─
“제 몸이 곧 잔이고, 저는 하나의 잔에 술을 담는 중입니다!”
취기도 몰아내고 당당히 내뱉은 그 말에 황제는 직감했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음주의 연쇄는 막을 수 없다고.
“므잉? 죠카, 왜 구러케바?”
황제도 포기한 주정뱅이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외숙모가 걱정되는 모양이야. 조카 앞이니 적당히 마셔.”
“이이이이잉~ 쟈기, 죠아하눈걸 차므면 안조타고한건 쟈기면서~”
“이렇게 안 참을 줄은 몰랐지…”
미소를 지으며 현명공의 어깨를 토닥이는 외숙부, 그런 외숙부를 향해 안 그래도 맛이 간 혀를 더욱 꼬며 애교를 부리는 현명공. 그 와중에 음주를 부추긴 건 외숙부였구나.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네.
아무튼 미칠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이럴 때는 잘도 튀고.’
아찔한 어지러움은 재무성 간부들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등이 차갑다. 등 뒤로 아무도 없어서 휑한 느낌마저 든다. 플란벨 백작, 철혈공, 아티니 남작이 등장했을 때는 말려도 붙었으면서, 정작 같이 있어줬으면 할 때는 귀신같이 사라졌다. 이게… 재무성의 정? 역겹기 짝이 없어.
“현명공. 부부의 사이가 좋은 건 축하할 일이나, 너무 과시하는 건 민망한 일이오.”
하지만 의외의 구원자가 등장하며 등이 급격히 따뜻해졌다.
“아! 처렬공!”
갑작스러운 철혈공의 난입에 현명공은 히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외숙부는 목례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감동적이다. 직장 동료들이 나를 버리는 상황 속에서 첫 번째 장인 어른은 나를 지키기 위해 와줬다. 이게… 바렌티의 정? 아름답기 그지 없잖아.
“여유가 많은 모양이군. 신년사가 끝나면 바로 처가를 보러 와야 할 것 아니냐.”
외숙부의 목례에 마주 고개를 끄덕인 철혈공은 나를 향해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비록 말투는 퉁명스럽고 책망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나를 현명공의 마수에서 빼주기 위한 배려가 담겨있다는 걸.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봐라. 지금도 사과 한마디에 바로 넘어가지 않나.
“이 녀석을 데려가도 되겠소? 손가락만큼이나 바쁜 놈이라 가만히 둘 수가 없소.”
그 말에 현명공의 시선은 내 손─ 정확히는 반(지)를 향했고, 여섯 개의 반(지)를 보자마자 푸히힝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열받는다. 진심에서 터지는 웃음이라 더 열받아.
“이거 바뿐 죠카를 귀찬게했내!”
그건 조금 새삼스러운 말이다. 당신은 언제나 귀찮게 했어.
하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놀리면 조카의 사랑이 식었다고 징징거릴 테니까.
“잘가, 조캬! 나 말고 예에에에쁜 부인들하고 놀앙!”
“예, 외숙모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현명공이 그냥 귀찮은 타입이지, 질척거리는 타입은 아니라 다행이다.
신년하례식. 제국의 모든 작위 귀족들이 황제 폐하 앞에 모여 다시금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 그 어느 행사보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그만큼 무겁고 부담스러운 자리.
그래서 신년하례식이라는 행사에 호기심은 가졌어도 참석하고 싶은 적은 없었다. 어차피 작위를 물려받으면 가기 싫어도 가야 할 곳이니까.
간혹 인맥을 넓히기 위해 스스로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남작이 돼도 영지에서만 오붓하게 지내고 싶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도 내 마음을 이해하셨기에 제도에 상경하자는 말조차 하지 않으셨고.
‘이런 곳이구나.’
하지만 올해는 신년하례식에 참석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버지의 권유가 아닌 내 의지로. 갑자기 내가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놀라시던지.
아니, 정확히는 공녀님의 말을 듣고 결정했으니 공녀님의 의지라고 해야 하나?
‘아무렴 어때.’
내 의지든, 공녀님의 의지든 신년하례식에 처음 왔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하나하나 둘러보자. 이왕 왔으면 최대한 즐기는 게 맞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사이, 갑자기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히잇─!”
“아핫, 놀랐어?”
파르르 떨며 옆을 돌아보니 작은 잔을 들고 미소 짓는 이리나가 보였다.
“목마를 텐데 마셔. 술 말고 주스로 가져왔으니 부담 갖지 말고.”
내 뺨에 댄 것으로 추정되는 잔을 건네는 이리나. 어찌나 차가운지 잔 표면에 성에마저 낀 것 같다. 아무리 실내라 따뜻해도 한겨울에 저런 걸 들이대는 건 너무하잖아.
“평범하게 줘도 되는데.”
“너무 정신 팔린 것 같아서.”
조금 원망스레 말했지만 쿡쿡 웃는 이리나의 답에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올 생각이 없던 자리기는 하지만, 호기심 정도는 계속 가지고 있었으니까. 눈을 돌리면 전부 처음 보는 것, 처음 오는 곳인데 어떻게 정신이 팔리지 않을까.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이다. 어지간한 귀족들도 신년하례식이 아니면 감히 오지 못한다는 황궁. 신기해하는 게 당연해.
“…그렇게 티 났어?”
“응, 엄청.”
하지만 남들 눈에 ‘시골에서 올라와 모든 것이 신기한 아가씨’ 처럼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진짜로 시골에서 올라온 게 맞으니 더더욱.
“나도 아까는 그랬어. 먼저 구경했으니 괜찮은 거고.”
조금 시무룩해진 마음을 읽었는지, 이리나는 가볍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자기도 아까는 신기해서 두리번거렸다고.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은 거라고.
슬프지만 그 따뜻한 위로에 더욱 부끄러워졌다. 다르게 생각하면 저런 위로를 해야 할 정도로 내 모습이 치명적이었다는 거잖아.
“다행이네…”
그래도 이리나의 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마음이 풀린 척 넘어갔다.
…그래, 구경은 무슨 구경이야. 난 오라버니와의 관계를 보이기 위해 온 거지, 놀러 온 게 아니잖아.
두리번거리는 게 너무 티가 나면 아무것도 보지 말자. 그런 다짐으로 주스를 홀짝이며 시선을 아래로 고정하자, 어느새 공녀님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셨다.
“처음 오면 그럴 수 있죠. 저도 그랬으니 너무 걱정 마요, 루이제 영애.”
“아, 선배.”
“둘이 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