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64)
그 말에 공녀님이 있던 쪽을 보자 지루하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 가문의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 아무리 공녀님이어도 가벼운 마음으로 낄 수 있는 구성이 아니다.
“그래서 칼도 여기로 오고 있잖아요.”
쿡쿡 웃으며 정면을 가리키는 공녀님의 말에 나도 이리나도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빠르다. 철혈공께서 오라버니를 데려오겠다고 떠난 게 방금 전이었는데, 벌써 찾아서 돌아온 거야?
‘좁은 곳도 아닌데.’
비록 실내지만 절대 좁은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황제 폐하께서 신년사를 한 장소인 만큼 넓은 편에 속한다. 그런 곳에서 사람을 이렇게 빨리 찾다니, 공작이 되면 생기는 능력인가?
“…조금 걸릴 것 같은데요?”
인파 속에서 오라버니를 발견한 이리나가 조금 떨떠름한 듯이 중얼거렸다.
뒤늦게 오라버니를 발견한 나도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저걸 오고 있다고 표현해도 괜찮은 걸까? 잡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
인파를 뚫고 지나가느라 여러 귀족과 접촉하는 오라버니, 그런 오라버니에게 인사 한 번이라도 건네기 위해 접근하는 귀족들. 옆에 철혈공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오히려 귀족들이 다가오는 이유가 됐지, 막을 방패가 되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죠. 칼은 이럴 때가 아니면 사교계에서 볼 수가 없거든요.”
어깨를 으쓱이는 공녀님의 얼굴에는 아쉬움보다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라버니가 귀족들의 중심에 선 것이 자랑스러운 것처럼.
그리고 그건 나도 그렇다. 오라버니의 색다른 모습, 정확히는 내가 보지 못했던 진짜 모습을 보고 있는 거니까. 동아리의 고문이 아닌 감찰부장인 오라버니를.
남 부러울 것 없는 고위 귀족들도 먼저 말을 걸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경외를 받는 사람.
‘멋지다…’
안 그래도 오라버니만 보면 두근거리던 가슴이 더욱 요동쳤다. 저게 진짜 오라버니구나. 다정하고 상냥한 오라버니가 아니라 귀족인 오라버니야.
이미 반했는데 한 번 더 반할 것 같다. 어머니는 일에 열중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
아잇, 싯팔. 제발 길 좀 가자.
뭔 포켓몬 트레이너도 아니고 눈만 마주치면 바로 달려드는 건데. 싸워서 이기면 돈이라도 주냐?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동부 방면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거 사령관 각하의 위엄에 왕국들이 고개도 못 들겠군요.”
“저번에 보내주신 건 잘 받았습니다. 저도 보답을 드리고 싶은데 대법관 각하께서는 부족한 게 없는 분이시니, 도저히 뭘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제분이 총사령부에서 근무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승공 각하께서도 눈 여겨볼 정도로 영특한 친구더군요.”
하지만 나에게 말을 걸 정도의 귀족이면 하나하나가 거물인 양반들이다. 함부로 무시하거나 건성으로 대하면 후폭풍 때문에 온몸을 비틀 미래가 뻔하지.
지금만 해도 그렇다. 방면군 사령관, 대법관 같은 현직 거물. 그리고 정계에서 목소리 좀 낼 수 있는 대귀족들만 말을 걸지 않나. 하필 처음 보는 양반들도 아니라 기억을 쥐어짜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골치 아프다.
그래도 어쩌겠나. 원활하고 평온한 공무원 생활을 위해서라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이 혼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19살에 부장이 된 능력자. 듣기에는 좋지만 까놓고 말하면 나이도 경력도 전부 무시하고 남들 위에 선 애송이다. 아무리 황태자의 의지가 있었다지만 행정부는 물론 정계의 이단아인 건 부정할 수 없다.
불만이 있는 것들이 시끄럽게 굴면 쓸어버릴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감찰부 내로 국한된다. 자기 욕한다고 다른 부서 관료도 처리하면 그냥 미친 새끼잖아.
그러니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 만약 내가 제 잘난 맛에 사는 막가파라면 진작에 두들겨 맞고 황태자에게 손절당했겠지. 황태자가 필요한 건 자기 말에 따라 사냥하는 사냥개지, 아무한테나 짖는 미친개가 아니니까.
…생각해 보니 결국 이 고생도 황태자 때문이라는 거네.
‘개새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구만.
“감찰부장의 배려를 받는 일이 많아 부끄럽군. 내 축의금이라도 넉넉히 보내겠네.”
그리고 한 귀족이 은근슬쩍 걸어온 청탁을 스리슬쩍 접수하자, 분위기가 급변할 키워드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거, 제가 좀 기대해도 되겠지요?”
“물론이오. 내 몇 번이라도 만족할 정도로 보내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급격히 반(지)에 시선이 몰렸다. 시선에도 물리력이 있다면 손이 사라졌을 정도로.
‘시작됐다.’
그 뜨거운 눈초리에 쓴웃음이 나올 뻔했다. 눈치 게임을 하느라 안부 인사만 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아무래도 작위까지 소유한 나이 지긋한 양반들 입장에서 ‘자기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귀족 자제의 결혼’은 먼저 꺼내기 애매한 주제지 않나. 그런데 그걸 다른 귀족이 먼저 언급했다? 그럼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 도리.
“감찰부장도 곧 짝이 생길 시기로군. 제국의 홍복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심지어 그 짝이 바렌티의 보물이라니.”
누군가 듣는다면 격렬히 부끄러워 할 말에 철혈공의 입술이 씰룩였다.
다른 사람은 못 봤어도, 아니 못 본 척하더라도 나는 봤다… 저 양반, 마르게타가 보물이라는 말에 은근히 좋아하고 있다.
“각하, 축하드립니다. 감찰부장 같은 사위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시의적절한 축하 인사에 철혈공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축하는 이 녀석에게 해야지. 어디 가서 마르 같은 아내를 찾겠나.”
“하하, 그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말에 주변의 귀족들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가족 사랑, 막내 사랑으로 유명한 철혈공이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다른 반응이 나왔다면 축하 인사를 한 귀족이 당황했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사위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제 나는 철혈공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렌티의 일부가 된 것.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아내죠.”
슬쩍 말을 보태자 철혈공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여섯이나 만났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다소 초를 치는 것 같은 말에도 철혈공의 입꼬리는 변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진짜 부인이 여럿이어도 신경 쓰지 않는구나. 마르게타가 첫 번째라는 입지만 보장되면 한없이 자비로운 것 같다.
하긴. 본인도 부인이 여럿인데 나한테만 가혹하면 너무한 거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기쁘구나.”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답변에 몸이 굳고 말았다.
“후후, 하지만 이건 알아주렴. 나는 아가에게 여섯 중 하나지만, 아가는 나에게 있어 오직 하나라는 걸.”
아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오른쪽에 있던 인파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존재감으로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다니, 역시 공작이다.
“아가. 잘 지냈니?”
빙긋 웃는 마종공을 보자마자 입이 움찔거렸다.
여기서 베아트릭스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딜레마에 빠졌다. 마종공이라 부르는 것과 베아트릭스라고 부르는 것, 둘 중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귀족들의 멘탈, 사교계의 평온, 마종공의 체면을 생각하면 전자가 맞다. 하지만 마종공의 행복과 예비 부부라는 관계를 생각하면 후자가 맞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폭풍이 확실한 일. 복잡하기 그지 없는 문제다.
“아가?”
‘아.’
그리고 마종공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공작이 먼저 말을 걸었는데 대답도 하지 않다니, 신분을 떠나서 그냥 무례잖아.
게다가 인사를 무시 당한 마종공의 눈에 미약한 불안감이 깃들고 말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수준이지만, 일단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문제.
차라리 인사를 받자마자 마종공이라고 불렀으면 큰 문제는 없었을 거다. 그랬다면 조금 아쉬할지언정 보는 눈이 많아서 자제한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으니. 하지만 불안을 느낄 정도로 망설인 후에 딱딱한 칭호가 나오면 마종공이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구체적으로는 ‘혹시 남들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과시하고 싶지 않은 건가?’ 같은 이상한 오해로 혼자 상처 입겠지.
‘가능성 높네.’
뭐 그런 오해를 하나 싶지만 방심할 수 없다. 이미 마종공은 포션 사건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찍은 전적이 있지 않나. 쿠크다스 포장지 까듯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
“예, 잘 지냈습니다. 베아트릭스.”
조금 늦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 반말이 아닌 존대로 대한 건 마지막 이성이었다.
본명으로 부르는 건 변명의 여지가 있다. 반지까지 주고 받은 사이에서 각하라고 부르는 건 너무 기괴하잖아. 반대로 100살 연하인 애송이가 까마득한 연상에게 반말을 뱉는 것도 정신 나간 일이다. 결혼 생활을 오래 한 이후면 모를까, 아직 대외적으로 반말을 하기에는 곤란하다.
그러니 이 정도가 적당하다. 본명은 부르되 예의는 갖추는 수준. 보는 눈이 많을 때는 이 수준을 유지하자. 그러면 마종공도, 귀족들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일 터.
─라고 생각했다.
“그, 그으, 래… 그렇다니 다행이구, 나.”
이름을 부르자 미약한 불안감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마종공은 귀를 파닥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수줍게 얼굴을 붉힌 것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
아니, 왜 그런 반응인데. 반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이름만 불렀잖아. 말을 놓는 것보다 이름으로 불러주는 걸 더 무겁게 생각하는 건가?
“…….”
그리고 옆에서는 철혈공이 소리 없는 경악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헛웃음이나 탄성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모양.
물론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사와 청탁으로 소란스럽던 주변이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시발.’
잘못 판단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 정도는 놀라더라도 수용할 수 있는 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름조차 귀족들 입장에서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볼드모트인가. 마침 마법사기는 한데.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10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공작으로 군림한 존재, 여러 황제를 섬긴 살아있는 역사다. 그런 존재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애초에 상상도 한 적이 없었겠지.
망했네 이거. 이름으로도 이런데 반말까지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종공이 부끄러워하는 건 둘째치고, 귀족들이 단체 쇼크사 할 것 같은데.
“…각별한 관계인 것 같아 보는 제가 설레는군요. 각하, 미리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아무튼 단체 스턴에 빠진 귀족 중에 한 명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사교를 위한 발언은 한다. 그것이 귀족의 본능.
“그렇습니다. 각하와 감찰부장의 사이의 난관이 많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종족의 차이가 가벼운 문제는 아니지요. 허나 그 문제를 극복하였으니 오히려 어떤 관계보다 끈끈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총대를 메고 입을 여니 너도 나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축하와 아부가 난무하는 자리. 비록 모두의 머릿속에 베아트릭스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히 박혔겠지만, 누구도 그걸 언급하지 않았다. 다들 자연스럽게 넘어가기로 암묵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파닥이는 마종공의 귀에서 시선을 돌릴 뿐. 마치 쳐다보면 살인멸구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베아트릭스. 다른 처가 분들께 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 기묘하고 어색한 상황 속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마종공 입장에서는 흑역사가 쌓이는 거고, 귀족들은 ‘소인은 사실 눈이 멀었습니다!’를 시전해야 하는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예, 같이 가시지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모이겠습니까.”
침묵을 지키던 철혈공도 내 말을 지지했다. 아직 표정 한구석에는 미미한 혼란이 깃들어있지만, 입은 멀쩡히 움직였다.
마르게타가 마종공과 같은 남편을 두게 된 이상, 철혈공은 절대 마종공과 거리를 둘 수 없다. 어차피 떨어질 수 없다면 귀족들 사이가 아닌 가족들 사이에 있는 게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