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66)
“맞아요. 저희 애는 이제야 영지 업무를 돕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학을 떼던지.”
그리고 자식을 가진 안주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식 얘기가 나오는 건 필연. 거기다 비슷한 또래의 자식 중 가장 잘난 자식이 언급되는 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뿌듯하다. 아쉬울 것 없을 부인들이 부러움과 미약한 질투가 깃든 눈으로 볼 때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입에서 칼에 대한 칭찬이 나올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그래, 정말 자랑스러운 아이다. 이 미숙한 어미 아래에서, 제대로 된 사랑과 관심도 받지 못한 환경에서 훌륭하게 자랐다. 또래의 귀족 자제들은 물론 모든 작위 귀족들을 통틀어도 밀릴 것 없는 아이로 자랐다.
“후후, 그런가요?”
그래서 부인들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만일 내가 칼을 제대로 키웠다면 내 교육이 뛰어났다고 은근히 으스댔을 수도 있다. 부인들의 시선을 즐겼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나. 무슨 염치로 홀로 자란 저 아이의 길에 내 지분을 주장하겠나. 그러니 미소만 지을 수밖에.
“그런데 부인.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나요?”
그렇게 자식을 주제로 긴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어느 부인의 말에 시선이 다시 나에게 쏠렸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지만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모두 알고 있다. 칼이 연인들, 처가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나는 여기에 있어도 괜찮겠냐는 말일 터.
“네. 칼은 아카데미에 있느라 마음 편히 있을 시간이 적잖아요. 제도에 있는 연인들을 볼 기회도 없었고요. 지금은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면 해요.”
“어쩜. 부인께서는 속이 깊으시네요.”
그 대답에 질문을 한 부인도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애초에 나를 보내려고 한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했을 질문이었을 테니까.
그런 부인을 향해 다시 미소를 짓고 살짝 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붓한 시간.’
사실 가고 싶다. 그 오붓한 시간에 나와 빌리도 함께 하고 싶다. 칼의 연인들, 내 며느리가 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 사돈이 될 가문과 안면을 트고 싶다.
그래도 애써 참았다. 신년하례식 전, 칼이 했던 말이 있으니까.
– 아마 둘째 날까지는 소란스러울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사를 나누는 것도 피곤하니, 잠잠해지면 그때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칼이 직접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게다가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납득했다.
어차피 신년하례식 초반에는 제국백 회합 때문에 빌리도 움직일 수 없다. 사돈끼리 만난다면서 가주가 없는 장면은 이상하지 않나. 그렇다면 칼의 말처럼 잠잠해질 때, 빌리도 용무가 끝났을 때 움직이는 게 맞다.
– 차근차근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됐습니다. 괜히 두 분을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닌지…
“괜찮단다. 며느리를 보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리고 민망하다는 듯 웃는 칼을 보니 더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연인을 앞장서서 소개해 주는 아들. 혹시 과도한 일정에 부모가 피곤하지 않나 걱정하는 아들. 어찌 기쁘지 않을까.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 감사합니다. 처가분들께는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편한 대로 하렴.”
– 아, 그리고 신년하례식이 끝나면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마르도 그렇고, 시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서요.
그렇게 통신이 끊어진 후, 한참이나 통신구를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었다. 칼과 나눈 대화가 평범한 모자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대화 같아 기뻐서.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던 것이 너무 행복해서.
‘며칠만 지나면 돼.’
당시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며칠만 참자. 칼의 말처럼 이틀, 길어도 사흘만 지나면 잠잠해질 거다.
그리고 사흘 후, 겨우 소란이 잠잠해지기 무섭게 황제 폐하께서 칼을 오찬에 초대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하루만 더 참자.’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지 않으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역적의 씨앗이 자랄 것 같았다.
어머니, 잘 지내십니까? 이 불타는 효자, 어머니께 상견례 노쇼라는 희대의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결혼 적령기 끄트머리에서 탭댄스 추던 후계자가 드디어 결혼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쁘셨을 텐데, 이렇게 신박한 엿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잘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은 주방장이 특별히 힘을 썼지. 입맛에 맞을까 모르겠군.”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아득한 윗분이 밥이나 먹자고 부르는데 어떻게 거절해.
당연하게도 황제의 초대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 그나마 교황과 선약을 잡았다면 또 모를까, 그런 약속이 있을 리 없지 않나. 덕분에 상견례고 나발이고 개처럼 달려가 대가리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편히 있으라. 이 자리는 감찰부장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이니.”
아무튼 황제의 초대라는 갑작스러운 봉변에 딱딱히 굳어있자, 황제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편히 있으라니. 너라면 편하게 있을 수 있겠냐.
물론 황제가 편히 있으라고 하면 불지옥에서도 웃어야 한다. 사실 여기가 제 집 같고, 음식도 집밥 같고 그렇습니다… 너무 편안해서 극락 갈 것 같아…
“예, 폐하. 그리 하겠습니다.”
내 눈물 겨운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빵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물론 동석 중인 황태자와 황태자비도 식사를 시작했다.
체할 것 같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말 치하를 위한 식사 자리라는 것. 만약 추궁이나 지시를 위한 자리였으면 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앉은 채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돈으로 주지.’
조용히 샐러드를 씹으며 입 밖으로 내면 안 될 생각을 했다. 치하는 이런 식사 자리가 아니라 반짝이는 금화로도 충분한데. 제발 높으신 분들이 그걸 알아줬으면 싶다.
귀족 입장에서 황제와 식사했다는 건 자기 소개서에 30pt로 쓸만한 업적이지만, 그것도 한 번이면 족하지 않나. 여러 번 이런 자리에 끌려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감찰부장. 아카데미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가?”
‘시발.’
기습적인 질문에 급히 샐러드를 삼켰다. 편하게 있으라며. 밥 먹는데 일 얘기하는 게 언제부터 편한 거였는데.
아니, 이 워커홀릭 황제 입장에서 이런 대화는 업무에도 속하지 않는 건가? 상당히 그럴 듯하다.
“폐하의 은덕이 아카데미에도 닿거늘, 어찌 불편함이 있겠습니까.”
“감찰부장의 노고는 잘 알고 있다. 3황자와 귀한 손님들이 머무르고 있으니 어찌 편하겠는가.”
순간 ‘알면 다른 곳으로 보내줘.’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특히 귀빈들이 걱정이다. 제국에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을 것이니, 홀로 헤맬까 우려스럽다.”
“심려치 마소서. 소신이 부족함 없이 대접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니 미더울 따름이다. 3황자와 함께 귀빈들을 성심껏 대하라.”
“예, 폐하.”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만 들으면 손님을 걱정하는 마음씨 따뜻한 주인 같지만─
‘여전하네.’
그 속내에는 황제의 고질병인 의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생활이 익숙지 않으니 홀로 헤맬까 우려스럽다? 이거 왕족들이 괜히 제국의 기밀에 기웃거리지는 않을까 걱정된다는 의미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왕족이라 건드리기 힘든 것들인데, 학생이라는 합법적 직책으로 제국에 머무는 꼴이 영 거슬린다는 말.
그러니 아카데미에 있는 내가 그것들을 잘 감시하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저게 정상이기는 하지.’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의심이니 뭐니 했지만, 정치가 입장에서는 합당한 추측이다. 갑자기 타국 왕족이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틀렸다. 그것들은 기밀이니 뭐니 그런 거창한 것에 관심이 없는 즐겜러에 불과하다. 황제에게 죄가 있다면 정상인의 시선으로 비정상인을 봤다는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행종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겠지.
물론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다. 황제한테 ‘그것들 연애에만 관심 있었는데, 다 같이 차이니까 그냥 놀러 다니던데요?’ 같은 말을 하면 뚝배기가 깨질 거다. 아마 내가 뇌물을 받아 먹어서 우호적인 말을 하나 의심할 터. 솔직히 나라도 그럴 것 같긴 해.
그래, 그냥 입 다물고 있자. 황제가 무의미한 의심을 품은 건 안타깝지만, 그 와중에 아인테르와 함께 귀빈들을 대하라고 하지 않았나. 신년사 때에 이어 황제가 아인테르를 명실상부한 황족으로 인정한 것이니 좋게 생각하자.
“후후, 감찰부장은 폐하께도 신뢰를 받는군요.”
조심스레 스테이크를 자르려는 찰나, 이번에는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까와 달리 심장이 떨리지는 않았다. 황태자비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언을 피하고, 업무에 간섭하는 일도 적기로 유명하지 않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황태자비가 가장 온순하고 편안한 사람이다.
“그런 감찰부장의 가문이 번성할 걸 생각하니 제가 다 흐뭇합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손이 잠깐 떨렸다. ‘너 연인도 많으니 자식도 많이 낳을 듯.’ 이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으니 정신이 아찔하다.
편안한 사람… 맞나…? 아니, 맞다. 분명 맞아. 황제와 황태자에 비하면 압도적 선녀지.
“전하와 저도 감찰부장에 밀리지 않는 사랑을 나누려고 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황태자비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태자 부부의 사이가 좋으면 축하할 일이기는 한데, 그걸 왜 저한테 말하세요.
그런 나를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보인 황태자비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
?
‘뭐야 시발.’
그리고 왼손, 정확히는 약지 손가락을 보자마자 동공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소문을 듣고 바로 제작했습니다. 하나가 되는 반지라니, 정말 낭만적인 물건 아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그 내용은 흉악하기 짝이 없다. 있으면 안될 것이 있다. 황태자비의 약지에 (반)지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황태자비가 1과장과 친하기도 하고, 마종공도 저걸 끼고 다녔으니 황태자비 귀에 반/지가 들어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저걸 따라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떨리는 눈으로 슬쩍 황태자를 쳐다 보자, 황태자는 덤덤한 표정으로 왼손을 보여줬다. 당연히 황태자의 손에도 반(지)가 있었다.
‘망할.’
정신 나갈 것 같다. 내가 제국 사교계에 독을 푼 건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겨우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중간부터 내가 뭘 먹는지도 모르겠더라.
“이미 많은 부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렇군요.”
“아마 올해가 지나기 전에는 유행이 시작될 것 같네요.”
황태자비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죄책감도 무럭무럭 자랐다. 내 가벼운 행동이 제국 사교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으니까.
이제 너도 나도 반쪽 반지를 끼고 다니겠지. 황태자비, 공작, 공녀가 주도하는 유행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나.
“플란벨 백작이 이미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
“그렇군요.”
그 씁쓸한 심정을 철혈공에게 토로하자 더욱 씁쓸한 답이 돌아왔다.
이미 내 장인 어른 중 한 분이 발 빠르게 움직이셨다. 심지어 내가 반지를 낀 모습을 보고 결심하셨다고 하니, 정말 내 업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