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67)
“축하한다. 그 나이에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한 놈은 드물거다.”
시큰둥하게 말하는 철혈공의 모습에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다.
만약 철혈공이 아닌 장관이 한 말이면 당연히 후자라 고민도 안 할 텐데.
“이제 가지. 다들 기다리고 있다.”
“예, 각하.”
멍하니 서있던 내 등을 툭 친 철혈공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오늘 진행했어야 할 상견례(참여 가문 5개)는 황제의 호출로 무산될 뻔했으나, 다행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철혈공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차피 오찬이라 하루 전체를 잡아 먹는 일정도 아니고, 부모끼리 미리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나.
덕분에 오찬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철혈공에게 붙잡혔다. 연이은 일정에 정신적으로 피곤하지만, 상견례 노쇼라는 불효는 피했으니 참아야지.
“…….”
“각하, 혹시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그렇게 철혈공이 대여한 별실로 이동하던 중,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생겼나?
“사돈 어른도 사부인도 정숙한 분인데, 자식은 왜 이런가 생각 중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어색하게 웃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의문이었으니까. 육체가 자식이면 뭐하나, 그 안에 든 내용물이 다른 놈인데.
…아니, 그런데 에리히도 딱히 정숙한 편은 아니지 않나? 활발과 정숙 중에서 따지면 아무리 봐도 전자인데.
‘성격은 어디 간 거야.’
크라시우스 가문의 흑발과 어머니의 청안을 물려 받은 걸 보면 피는 짙은데, 정작 성격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유전자가 오는 길에 배송오류라도 난 건가.
그래도 에리히마저 무뚝뚝하고 조용했다면 가문이 너무 삭막했을 거다. 차라리 오류가 난 게 다행이네.
“그리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장인이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더냐.”
홀로 안도하는 나에게 철혈공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영 입에 익은 호칭이 아니라 자꾸 각하라고 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장인 어른.”
“알면 됐다.”
한 번 코웃음을 친 철혈공은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
칼이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좌초될 위기였던 가문끼리의 만남. 다행히 철혈공이 주도하여 연기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철혈공이 마련한 별실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일 때, 가슴을 가득 채우는 행복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몰아서 느끼는 것 같았다.
‘칼의 연인.’
내 앞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혹은 긴장한 채로 인사하는 아이들… 과 한 분이 있었다. 언제나 홀로 지낸 그 아이 곁에서 함께 걸어갈 인연이다.
‘처가.’
빌리와 악수를 나누며, 나와 마주 고개를 숙이며 안면을 트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그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줄 인연이다.
행복하다. 너무 행복하다. 칼에게 이런 인연이 생겼다는 게, 그 소중한 인연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다만─
‘많다.’
너무 많다. 설마 한 자리에서 다섯이나 되는 며느리, 넷이나 되는 처가를 만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며느리는 한 명이 더 있다고 한다. 특무성에서 활동 중이라 신년하례식에 참가하지 못했을 뿐.
‘…행복하면 된 거야.’
이 상황이 조금 기괴하게 느껴졌지만 빠르게 생각을 털어냈다.
그래, 칼이 행복하면 그만이다. 칼이 원한다면 몇 명이라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다.
‘여섯 정도면 문제 없지.’
게다가 황금공은 무려 두 배인 열두 명을 만났다. 여섯이면 애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황금공도 차근차근 만남을 가졌지, 동시에 여럿과 이어진 것은 아니라는 건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어색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사돈,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예비 며느리들. 이 모든 것들이 낯설기만 하다. 내가 가진 상식과 어긋나는 모습이었으니.
‘이게 상식인 건가.’
아티니 남작과 악수를 나눈 손을 멍하니 내려다 봤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정상일 수 있다. 나는 겪지 못한─ 부인도 겪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상식일 수도 있다.
내가 아직 후계자에 불과했던 시절, 부친의 의지를 거부하고 부인과 연을 맺었다. 그 뒤에 다른 가문과 관계를 맺으라는 말조차 무시하고 부인을 유일한 반려로 두었다. 그렇기에 부친께서는 아라스 가문과의 만남에서 딱딱한 모습을 보였고, 이후 우리 부부도 차갑게 대했다.
애초에 그 일이 없었어도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그런 걸 대물림 할 필요는 없지.’
다행히 지금의 만남, 칼이 이끈 인연은 우리 부부와 다르다.
나는 칼에게 혼인을 강제하지 않았다. 어떤 기대나 의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칼은 자신이 원하는 인연을 데려왔고, 부친 때와 달리 우리는 순수하게 축하할 수 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상견례는 다소 어색할지언정 화목했다. 며느리는 시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갑게 대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그러나 우리 부부는 겪지 못한 상식.
‘다행이군.’
왼손에 쥐고 있던 와인잔을 입에 댔다. 마침 양도 얼마 남지 않았길래 전부 털어 넣었다.
그래, 다행이다. 칼에게는 불행을 물려주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며느리들에게 부인과 같은 고통을 주지 않아 다행이다. 그러니 지금의 어색함은 기꺼이 견딜 수 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면 맞을 때까지 입으면 된다.
“아버님. 제가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어색함은 도저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예. 부탁드립니다, 각하.”
“후후,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어느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말을 높이겠습니까.”
살포시 웃으며 새로이 와인을 따라주는 마종공. 그 다소곳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아버님이라.’
마종공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며느리에게 아버님이라 불리는 것도,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맞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내 부친과 조부께서도 마종공을 깍듯이 대했는데, 정작 나는 며느리로 대하라니. 그게 말이 되겠나. 차라리 사돈으로 만났다면 어색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직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것도 아닌데, 벌써 각하를 편히 대하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그럴 듯한 말을 꺼냈다.
비록 혼례가 기정사실이기는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치른 것은 아니기에 정중히 대하겠다.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사유다.
“그렇습니까? 아쉽지만 결혼 때까지 참아야겠군요.”
그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종공도 납득할 정도로 확실한 사유지만, 동시에 써먹을 수 있는 기간도 명확한 사유다.
아직 공식적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정중히 대하는 거라면 결혼을 하자마자 편히 대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결혼 이후에도 존대를 고집하면 마종공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라니요. 당연한 말씀을 하셨는데 어찌 이해라고 하십니까.”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는 마종공에게 그저 맞장구만 쳤다.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칼이 마종공과 결혼을 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상식과 이성을 내려놓자고. 연상인 공작 며느리에게 반말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자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칼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마종공이 아니라 마르게타 공녀라는 거다. 게다가 마르게타 공녀가 졸업하기 전까지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 못해도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얼마나 다행스럽─
…정말 다행이 맞나?
‘공작이 두 번째 부인.’
현기증이 돌 것 같다. 공작이 유일한 부인이 아닌 여러 부인 중 하나인 상황도 놀라운데, 심지어 첫 부인조차 아니다. 대륙 역사를 통틀어 이런 적이 있었던가.
“마르게타 공녀도 공작가고, 저 역시 공작가입니다. 두 가문의 격이 동등하니 마르게타 공녀가 첫 부인이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쩌겠나. 두 번째라도 상관 없다고 마종공이 당당히 선포했는데.
그 말을 들은 철혈공의 표정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강력한 경쟁자가 스스로 첫 부인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기쁘지만, 동시에 기존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테지. 이해한다. 아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거다.
분명 둘 다 공작가지만 공녀보다는 공작이 위인 것이 명확하지 않나. 하지만 작위를 떠나 가문만 보면 동등한 게 맞기는 하고…
…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법적 문제나 관습 문제는 사법성과 대법관들이 처리할 문제다. 그들이 알아서 마종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할 거라 믿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비우자마자 칼이 철혈공과 함께 나타났다.
‘왜 이제야─’
순간 머리에 떠오른 원망을 황급히 털어냈다.
이 무슨 참담한 생각인가. 칼은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오찬 자리에 참석하고 온 것이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해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을 한단 말인가. 애초에 내가 칼에게 원망을 품을 자격이 있겠는가.
“아가.”
그래도 마종공이 빠르게 칼에게 간 것을 보니, 아주 미약한 원망이 꿈틀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벌 받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부인.”
며느리들과 사돈들이 하나둘 칼에게 모이는 사이, 나에게 다가온 부인이 작게 속삭였다.
“그러게 첫날부터 사돈끼리 모였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요.”
“…….”
흘깃 째려보는 부인의 말에 입이 닫히고 말았다. 부인의 말처럼 첫날부터 모였다면 칼이 자리를 비울 일도, 나 홀로 마종공을 상대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물론 변명거리는 있다. 칼도 부인에게 나중에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나. 그러니 내가 첫날에 시간을 냈어도 별 의미는 없었을 거다.
‘괜한 말을 해서.’
문제는 신년하례식 첫날, 황태자 전하께서 칼에게 가보라는 권유를 하셨음에도 버텼다는 걸 부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쩌겠나. 멀리서 칼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부인을 그냥 둘 수 없었는데. 나에게 죄가 있다면 부인을 달래느라 온갖 대화 주제를 꺼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원히 숨겨야 할 말도 꺼내고 말았다는 것.
“영지로 돌아가면 한동안 각방이에요.”
안절부절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