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68)
그래도 달래는 건 성공했으니 썩 괜찮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
상견례는 별 소란 없이 끝났다. 애초에 신년하례식 기간 동안 처가와 붙어 다니기도 했고, 내가 황제에게 끌려간 사이에 가주와 어머니도 처가와 충분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가주는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이미 며느리로 점찍었던 마르게타는 말할 것도 없고, 한 번 만났던 루이제와 이리나, 초면인 1과장을 정말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정도로.
오죽하면 마종공에게도 다소 어색해할 뿐, 웃는 얼굴로 친절히 대하더라. 장남을 장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강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상견례는 아무 문제 없이 끝났다.
상견례만.
“올해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신 분 아닌가. 드디어 만나는군.”
상견례는 끝났지만 신년하례식은 계속 된다. 그것은 아직 무수히 많은 귀족들과 접촉해야 한다는 뜻.
비록 처가에 착 붙어서 다른 귀족들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든 귀족들을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국에는 어떤 울타리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로드-롤러들이 존재하니까.
“올해라니요. 아직 1월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봐도 자네를 능가하는 소식이 터질 것 같지는 않네.”
예를 들면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날리는 황금공이라거나.
“그래도 감찰부장, 이런 소식이라면 언제든 환영일세.”
같이 웃고 있는 전승공 같은 사람들.
현명공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대충 구석에서 위스키에 보드카라도 말아먹고 있겠지.
“두 분의 귀가 조금이라도 즐거웠다면 다행입니다.”
일단 두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 와중에 황금공 근처에 있는 열두 부인과 홀로 온 전승공의 대조를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같은 공작인데 왜 이리 캐릭터가 다른 거지.
“당분간 계속 즐거울 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말게.”
“예에…”
존나 신경 쓰이는 말을 한 황금공은 피식 웃더니 내 왼손을 바라봤다.
“소문으로만 듣던 기물을 이제야 보는군.”
기물, 기이한 물건. 이 반(지)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황금공의 안목에 감탄이 나올 뻔했다.
그래. 이게 아무리 봐도 기물이지, 유행을 선도할 물건은 아니지 않나. 역시 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능력자라 그런지 안목이 좋─
“역시 유행은 기물이 선도하는 법이지.”
좋… 좋… 좆…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조금은 섭섭하군. 이런 아이디어가 있었으면 나에게 말해줬어야지. 지분은 넉넉하게 나눠줬을걸세.”
“이렇게 유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황금공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커플링 사는 걸 깜빡해서 급조한 반지인데, 그걸 공작에게 아이디어랍시고 말하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어.
“그래도 플란벨 백작이 사업을 준비하는 것 같더군. 감찰부장이 장인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네.”
그 말에 더욱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철혈공에게도 들은 말이지만, 황금공 입으로도 들으니 미칠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금공이 언급할 정도면 정말 각 잡고 준비하는 사업이겠지. 아무리 플란벨 백작이 황금공 파벌이라고 하지만, 황금공이 휘하 파벌원 하나하나의 사업까지 기억할 일은 없잖아.
그 황금공이 메모리 공간을 할애하여 기억하는 사업… 너무 두렵다…
“사업이 시작되면 나도 주문할 생각일세. 드디어 열두 개를 전부 손가락에 낄 수 있겠어.”
“그, 예, 축하드립니다.”
정말 기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황금공의 손으로 시선이 가고 말았다.
부인이 열두 명이니 반지도 열두 개인 황금공. 당연히 열 손가락 전체에는 반지가 하나씩 자리 잡고 있었고, 두 팔목에 있는 반지─ 라고 주장하는 팔찌가 있었다.
‘…잘됐네.’
그 팔찌, 아니 반지, 시발 아무리 봐도 팔찌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래, 반/지 사이즈면 열두 개 전부를 손가락에 낄 수 있겠지.
내가 황금공에게 평화를 선사했다.
가족이란 선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태어나고 보니 바렌티의 일원일 수도 있고, 결혼을 통해 다른 가문이 바렌티와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기에 아버님은 이번 상견례를 중히 여기셨다.
상견례 한 번으로 제국백 중 하나인 크라시우스 가문과 사돈 관계가 되었다. 카토반 공작가, 마살로 후작가, 요룬 백작가, 나이어드 남작가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속하게 됐다. 가족을 중시하는 아버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일 터.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건 가문의 어른들뿐만이 아니다.
“언니는 계속 오라버니와 근무하신 건가요?”
“아~ 니~ 같이 근무한 건 2년… 아, 이제 3년이네? 그 전에는 그냥 소속만 같았어.”
“그래도 3년이면 오래 알고 지내신 거네요.”
같은 남편을 두게 된 여인들. 이전까지 남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 된 사람들.
게다가 우리의 관계가 유지되어야 각 가문의 연결도 지속되는 것이기에, 부인인 우리의 역할과 의무는 무엇보다도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부인들 중 첫 번째 부인으로서 더욱 부담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문제 없겠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루이제 영애와 에르제베트 영애를 보니 긴장감이 풀렸다. 후작가와 남작가, 관료와 학생, 10대와 20대. 충돌할 여지가 많은 관계임에도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다행인 일이다. 부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성격이 날카롭고 흉포하면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어렵다. 다행히 저 둘은 물론 다른 부인들도 모가 난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에넨께서 보우하시는 건지, 아니면 칼이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건지.
사실 감찰부 간부인 에르제베트 영애에 대한 악명이 사교계에 떠돌기는 하지만, 솔직히 악명으로만 따지면 감찰부장인 칼이 더 심하고. 악명 따위는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다.
“그러면 뭐 해. 요즘은 부장님이 밖에만 있잖아. 나도 부장님이랑 학창 생활 보내고 싶은데에에~”
우는 소리를 내며 루이제 영애를 끌어안는 에르제베트 영애. 그 모습에 이리나 영애는 쿡쿡 웃음 소리를 냈고, 마종공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상적인 모습이다. 서로 질투를 하지 않고 등을 돌리지 않는 모습. 비록 서로 모르는 것이 많아 알아가는 단계지만, 알아가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다.
‘고마워요, 루이제 영애.’
그리고 감사함을 담아 에르제베트 영애 품에 파묻힌 루이제 영애를 바라봤다. 아무리 서로의 성격이 원만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노력이 모든 걸 해결하는 건 아니다.
어색하기에 말을 걸기 힘들고, 괜히 눈치를 보고, 그러다가 허무하게 시간이 가버린다. 그것이 첫 만남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과정. 그러나 루이제 영애 덕분에 그 어색한 단계를 생략할 수 있었다.
루이제 영애 입장에서 이리나 영애는 친구, 나는 선배, 마종공은 스승, 심지어 에르제베트 영애마저 아카데미 박람회 때 만난 지인이다. 모두와 연이 있는 루이제 영애가 우리 사이에서 열심히 말을 걸어준 덕분에 어색함은 다소 빠르게 사라졌다. 역시 황족과 왕족도 반하게 만든 사교력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숨을 못 쉬는 것 같구나. 그만 놓아주지 않겠니?”
“네에─”
그 결과, 서로 안면이 없던 관계여도 루이제 영애를 주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제자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본 스승은 제자를 괴롭히는 영애를 타이르고, 영애는 아쉬워하면서도 제자를 풀어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광경.
‘이렇게 친해지는 거지.’
어느새 루이제 영애 대신 이리나 영애를 끌어안은 에르제베트 영애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급하게 나아갈 건 없다. 이렇게 차근차근 친해지고, 루이제 영애 없이도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면 된다.
“와, 혹시 따로 운동하니? 의외로 탄탄─”
“어, 언니!”
그 와중에 에르제베트 영애가 이리나 영애의 몸을 조물거리며 감탄했다. 난데없이 몸을 평가 받은 이리나 영애는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진심으로 질색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리나 영애도 이렇게 친해지는 거라 생각 중이겠지. 다들 친해질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아 기쁠 뿐이다.
…마종공이 언니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더 기뻤을 텐데.
“이제 저희도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적어도 저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부르지 않을래요?”
루이제 영애의 제안에 우리만 있는 자리에서는 서로 언니, 동생이라 부르기로 결정했지만─ 도저히 마종공에게 언니라고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종공도 그런 마음을 이해하는지 언니라는 칭호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저 은근한 눈길을 보내기만 할 뿐. 그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된다.
‘베아트릭스 언니.’
미리 마종공을 언니라고 부르는 연습을 해봤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며 몸이 떨렸다.
내가, 내가 감히 그래도 될까? 아버님보다도, 내 조부님이나 증조부님보다도 먼저 공작이 되신 분인데…?
‘노력해야지…’
하지만 가족끼리 공작님, 각하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
그래, 노력하자. 그렇다면 언젠가는 빛을 볼 거다. 그렇게 믿는다.
***
신년하례식 기간은 우려와 달리 무탈하게 지나갔다.
비록 황금공이라는 로드 롤러에 치여서 빈사에 빠지는 위기가 있었지만, 아무튼 숨만 붙어있으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황금공 정도를 제외하면 처가 방패가 뚫릴 일도 없었으니 너무 안락했다.
가끔 처가 방패도 쓰지 못할 것 같으면 슬쩍 재무성 쪽에 합류하면 그만이고. 역시 사람은 몸을 숨길 굴을 여러 개 준비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이게 안락.’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황제의 오찬 초대, 귀족들의 뜨거운 눈빛, 황금공의 열두 반지 선언, 한자리에서 네 쌍의 처부모와 만나기. 이 모든 걸 동시에 겪었는데 안락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선녀가 맞다. 만약 작년 말에 터졌던 1과장의 애원이나 마종공의 오열을 신년하례식 기간에 겪었다면 어떻게 됐겠나. 절대 눈길을 받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다행이다. 어차피 터졌을 일들… 미리미리 분산해서 겪어서 다행이야.
‘더 문제 터질 일도 없겠고.’
슬쩍 처가, 정확히는 예비 부인들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보통 치정극을 보면 부인들끼리 온갖 계략이 난무하고 신경전이 펼쳐지던데, 감사하게도 저 다섯 사이에서는 그런 조짐이 없다. 이 자리에 없는 4과장도 남들과 기싸움을 할 타입은 아니니, 기적적인 확률 끝에 모든 부인들이 순한맛인 것이다.
순한 척하는 매운맛 고문광이 하나 껴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순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싸우지만 않으면 충분하지.’
초면부터 사이가 좋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작위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당신이 저하고 같은 남편을 공유하는 거죠?’ 나 ‘어째서 당신이 첫 번째죠?’ 같은 말만 난무하지 않았으면 했다. 막말로 마종공이 미쳐 날뛰면 신년하례식은 그날로 말년하직식이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싸우지 않는 수준을 넘어 나름 화기애애한 것 같으니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다. 말아먹은 부하 운을 다른 곳에서 충당하는구나.
“아직도 고민되는군. 축의금을 한 번에 줘야 할지, 나눠서 줘야 할지 모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