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269)
“편한 대로 주십시오. 형태보다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더 어려운 말이오.”
1과장의 품에서 탈출한 이리나가 루이제 품에 안기는 걸 보는 사이, 정보부장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정보부장이 합법적으로 쉴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인 신년하례식. 덕분에 정보부장은 평소보다 밝은 안색을 보였다. 그래봤자 남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우중충했지만.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뭐, 살아있는 것만 해도 잘 지내는 거지. 감찰부장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오.”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진심이 가득 담긴 것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지. 정보부장이 과로로 먼 길 떠나는 것만 아니면 잘 지낸 거지.
“아무튼 갑작스레 미안하오. 신년하례식 때도 업무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픽 웃음을 터뜨렸던 정보부장은 금방 표정을 가다듬더니 사과를 했다. 처가나 재무성 쪽에 붙어있던 내가 갑자기 정보부장과 만나는 것도 잠깐 만나자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솔직히 정보부장 말처럼 업무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일 얘기를 하기 싫어할 사람이 만나자고 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오히려 두려울 정도다. 도대체 무슨 일이 터졌길래 이 사람이 먼저…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쉰 것만 해도 어디 입니까.”
“그리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작게 한숨을 내쉰 정보부장은 빠르게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5제국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소. 감찰부장도 들어야 할 것 같아 불렀지.”
그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개새끼들.’
하지만 덤덤한 겉과 달리 속은 그렇지 못했다. 화려하게 자폭한 다섯 기둥을 빼면 1학기 때 세 번째 영광, 여름 방학 때 황혼 교단, 2학기 때는 붉은 파도가 나타났다.
마치 짠 것처럼 줄줄이 나올 때부터 혹시나 하기는 했는데, 정말 겨울 방학에 튀어나올 줄이야. 소름 끼치도록 정직하다.
‘새해부터 뭔.’
머리가 지끈거렸다. 새해에 중요한 행사가 진행되는 건 제국뿐만 아니라 아르메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자국이 행사로 소란스러운 와중에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도 제국 정보부 눈에 들어올 정도로?
기이한 새끼들이다. 아무리 아르메인 정계에서도 비주류라지만 너무 아웃사이더처럼 행동하는 거 아니냐.
“숙청됐다고 하오. 제5제국의 주요 인물 여럿이 목이 잘렸다더군.”
그래, 그렇지. 새해부터 아웃사이더처럼 행동하면 당연히 숙─
…?
“숙청을 주도한 건 3왕자 류티스. 감찰부장도 고문으로서 알아야 할 것 같아 부른 거요.”
“…예?”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가 누굴 숙청해?
지루하다. 이 지루한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제국으로 향한 것인데, 새해라는 이름은 제국으로 떠난 왕자도 돌아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
솔직히 왕세자도 아닌 일개 3왕자는 새해 행사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어쩌겠나. 있는 자리는 티가 나지 않아도 없으면 바로 티가 나는 것이 왕실인데. 아마 이번 행사에 불참했으면 부왕께서 직접 아카데미 자퇴서를 작성하셨을 거다.
‘불참할 명분이 없으니 원.’
새해를 중시하는 건 대륙의 공통적인 특징. 만약 새해에도 제국에 남아 있었다면 오히려 제국이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넌 뭔데 새해에도 남의 나라에 있냐고.
게다가 한 해의 시작은 공동체와 함께하라는 에넨의 말씀으로 인해 작게는 가족, 크게는 국가의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새해다. 잊을 때마다 귀족들의 기강을 잡아야 하는 군주 입장에서 이런 새해 행사를 허술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심지어 아르메인 왕국의 건국절도 새해와 미묘하게 겹치기에 더욱 그렇다. 빠지면 귀족이 아니라 왕족이어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새해만 보내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아예 귀국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귀국했는데 조기에 제국으로 돌아가는 건 어려운 일. 애초에 부왕께서 출국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다.
“3월까지 어떻게 버티지.”
답답한 심정에 홀로 중얼거렸다. 3월 초에 이루어지는 개학식. 앞으로 2개월을 이 지루한 왕궁에서 버텨야 한다.
슬픈 일이다. 2개월 동안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지내야 할까. 라테르가 있었다면 새로 개발한 4 비숍 플레이를 실험했을 테고, 에리히가 있었다면 환상의 서브를 시도했을 텐데 아무도 없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동물이거늘,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정식으로 초대할 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면, 차라리 부원들도 정식으로 왕궁 초청을 하는 게 어땠을까 하고.
그러나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부원들도 새해에는 본국으로 가거나 가족의 품에 있어야지. 내가 불가능한 일은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만큼 대륙에서 새해가 갖는 의미는 강력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나마 혼자 밤바람을 맞고 있으니 복잡한 머리가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다른 귀족들이 붙어 있었다면 더 골치 아팠겠지.
“빌라르 경이 곁에 있으니 든든하군.”
“황송한 말씀입니다, 저하.”
슬쩍 옆에 있는 빌라르 경에게 시선을 돌리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정말 빌라르 경이 있어서 다행이다. 왕실 기사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빌라르 경이다. 그런 빌라르 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국 유학을 떠난 왕자 곁에 있으니, 올 귀족도 도로 돌아가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마 무언가 중요한 대화가 있어 둘이 발코니에 숨어 있는 걸로 지레 짐작할 터.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지.’
당연히 중요한 대화 따위 없다. 빌라르 경의 표정이 딱딱한 건 원래 그런 거다. 아니, 어쩌면 내가 옆에 붙잡고 있어서 굳은 걸 수도 있지만.
‘이제 보내도 괜찮겠어.’
빌라르 경을 향했던 시선을 내부 연회장으로 돌렸다. 몇 시간 동안 발코니에 머무르며 혼자 있고 싶은 티를 냈으니 굳이 다가올 귀족은 없을 거다. 간혹 이렇게 눈치를 줌에도 다가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눈치를 뚫고 접근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나 벌어지는 일.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절실히 다가올 귀족은 없다. 왕세자인 형님을 중심으로 후계 구도도 탄탄해서 다른 왕위 계승자와 친해질 필요도, 성인이 되자마자 자국이 아닌 타국 교육 기관으로 간 왕자와 만날 필요도 없지 않나. 심지어 나는 정계나 행정부가 아닌 기사들과 친한 편이니 더더욱.
“경. 그러고 보니 페로사 경이 경호 인력으로 왔다고 들었는데.”
“예, 저하. 과분한 신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페로사 경에 대해 언급하자 빌라르 경의 표정이 미세하게 따뜻해졌다.
왕실은 물론 왕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경호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건 페로사 경의 능력이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부친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렇기에 내 옆에서 고생했을 빌라르 경을 보낼 명분으로 충분하다.
“과분하다니, 능력에 맞는 역할을 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경험은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
그렇게 말을 흐리자 빌라르 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챈 것처럼.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이라도 해주는 건 어떤가?”
업무로 고생 중일 딸에게 가서 대화라도 하고 오라는 말. 그 말에 빌라르 경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고개를 숙였다.
“예, 저하. 그리 하겠습니다.”
매우 짧은 고민과 재빠른 대답. 평소 무뚝뚝하고 엄격한 빌라르 경을 생각하면 의외인 모습이지만, 실상을 알면 당연한 일이다. 빌라르 경은 거의 1년 만에 본국으로 귀국한 상황 아닌가. 3월이면 다시 제국으로 가야 하니, 조금이라도 본국에서 가족과 있고 싶을 거다.
물론 페로사 경도 제국으로 가는 인원이지만, 본국에서 가족과 지내는 것과 타국에서 지내는 건 느낌부터 다르지.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빌라르 경을 보다가 다시 난간에 몸을 기댔다. 이제 혼자 바람이나 쐬다 적당히 돌아가자.
아르메인에는 정상과 거리가 먼 존재들이 있다는 걸 잊고 말았다.
“저하의 기사도는 대륙의 귀감이지요. 그 어떤 기사도 저하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운 말이로군.”
“하하, 겸손하시기까지 하시군요.”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비주류, 누구라도 접촉하여 세력을 넓히려는 소수 세력, 여러 의미로 정계의 괴물인 단체, 제5제국. 이것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빌라르 경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가데로 백작. 분명 제5제국 인원 중 행동대장처럼 활동하는 인물로 기억한다. 인원 하나하나가 시끄러운 제5제국 내에서도 독보적인 활동량을 보였었지.
하필 그런 인물이 다가오다니, 오늘 운수는 최악이군.
“크펠로펜에도 저하를 능가하는 기사는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크펠로펜에게 제국의 자격이 없다고, 아르메인이 진정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정작 크펠로펜을 최고로 두고 있다. 본인들도 크펠로펜의 저력을 내심 알고 있다는 거겠지.
제발 알면 가만히 지냈으면 좋겠다. 크펠로펜 제국이 과거 아펠스처럼 천명을 잃은 것도 아니고, 여러 위기와 도전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이겨내지 않았나. 그런 국가와 천명을 두고 싸울 명분도, 실리도 없다. 그저 제국이라는 이름에 눈이 먼 자들만이 일방적으로 주장할 뿐.
‘귀찮게.’
아무튼 일방적으로 떠드는 상대에게 적당히 답하는 것도 고역이다. 아무리 제5제국이 정계에서 비주류에 현실 감각 없는 자들로 통하지만, 그래도 엄연한 왕국의 귀족이고 일원이다.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대충 대하는 건 왕실의 포용력과 관대함을 의심 받을 수 있는 일.
물론 제5제국이 귀찮은 건 다른 귀족들도 잘 알지만, 뒷담은 그런 걸 따지며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본인들이 제5제국을 배척하는 건 파벌 싸움이지만, 왕실이 특정 귀족들을 외면하는 건 탄압이 된다. 그 미묘한 차이가 중요하지 않겠나.
그렇기에 여기서 사고를 치면 아카데미 자퇴서가 작성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텼고─
“강한 지도자가 이끌어야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선을 넘는 발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접대 미소를 지으며 백작을 바라보자 백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온갖 미사여구, 우회적 발언이 덕지덕지 붙었지만, 그 속내는 노골적이기 짝이 없었다.
제국이 유목민과의 전쟁, 내부 숙청으로 소모한 힘을 회복하기 전에 아르메인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봉에 온건파인 부왕과 형님이 아닌 내가 서야 한다는 것.
‘주제도 모르고.’
거슬린다. 타국의 저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가, 감히 왕족을 자신들의 체스 말처럼 사용하려는 교만이.
겉으로는 제국의 사정에 해박한 내가 앞장서는 것이 다른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에 유리할 거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를 방패로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려는 것 아닌가. 만약 일이 잘 풀리면 온건파인 형님을 밀어내고 나를 세자로 내세우겠지.
‘비울 때가 됐나.’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귀족들이 제5제국을 하나의 파벌로 인정하는 이유, 왕실이 제5제국도 귀족으로 인정하는 이유. 단지 시선 때문에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쓸모가 있으니 두는 것이지.
정계에는 여러 성향이 존재하고, 그 성향 중에는 과격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제5제국은 누가 봐도 과격하고 극단적인 광견이지만, 동시에 광견 수용소기도 하다.
만약 제5제국이 없다면 광견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짖었을 거다. 하지만 자신들의 동포가 모인, 아늑해 보이는 요람이 있다? 그러면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모이게 된다.
‘영원히 박혀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일종의 광견 수용소, 혹은 쓰레기통.
그러나 미친 개가 수용소를 탈출하여 사람을 물려고 하고,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넘쳐 악취를 풍기면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나. 부왕께서도 제5제국이 이상한 조짐을 보이면 바로 보고하라고 하셨으니 기꺼이 움직이실 거다.
명분은 뭐가 좋을까. 감히 조국을 무리한 전쟁에 밀어 넣으려고 했고, 은근히 왕실 후계 구도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니…
***
“혹세무민, 왕실모독, 천명부정…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였소. 마침 귀족들의 시선이 신년회에 묶였을 때, 3왕자가 기습적으로 칼을 휘둘렀지. ”
“…그렇군요.”
하나만 붙어도 자신의 목과 굿바이 키스를 나누어야 할 혐의. 그걸 종합 세트처럼 올인했다면 정말 작정하고 칼춤을 췄다는 거다.
대단하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왕족이기는 하구나.’
그리고 그런 기습적인 숙청을 류티스가 주도했다는 게 놀라웠다.
아르메인이